# 0.
액션은 지금부터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
『본 슈프리머시 :: The Bourne Supremacy』입니다.
# 1.
기본적으론 정체성 갈등을 그린 영화다. 주인공은 사고로 기억을 잃어버린 특수요원으로, 냉혹한 과거의 행적과 따뜻한 현재의 윤리 사이의 괴리에 느끼는 고통과 불안을 물리적으로 치환한 작품이라 요약해도 큰 무리는 없다. 열감으로 비유하자면, <007 제임스 본드>는 차가운 내면과 뜨거운 액션의 결합, <미션 임파서블>은 뜨거운 내면과 뜨거운 액션의 결합, <존 윅>은 차가운 내면과 차가운 액션의 결합이라 한다면, <제이슨 본> 시리즈는 뜨거운 내면과 차가운 액션의 결합이라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액션 어드벤처로서 거대한 지배력을 가진 <인디아나 존스>, 코미디 활극으로서의 <폴리스 스토리>를 더하면, 이후 어떤 영화가 나오더라도 이 여섯 시리즈가 그리는 육각형 테이블 안에서 나름의 좌표를 차지할 뿐 그 이상으로 뻗어나가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과거의 글에서도 주장한 바 있다.
다만 맷 데이먼 특유의 불안에 떠는 소년의 눈망울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를 보며 정체성과 관련된 철학적 사색에 도달할 사람은 많지 않다. 결국 영화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끝내주는 맷 데이먼의 끝내주는 액션이고, 이 영화가 끝내주는 작품임을 다시 이야기함에 있어 액션을 논하지 않을 길은 없다.
# 2.
본 슈프리머시에서 선보인 시네마 베리테(Cinéma Vérité) 기법은 액션 영화의 문법을 근본적으로 재정립해 이전에 없던 경험을 선사한다. 폴 그린그래스의 핸드헬드 카메라 활용은 스타일적 선택을 넘어 내러티브적 도구로 승화된다. 특유의 필름 화면은 독특한 질감을 부여, 다큐멘터리적 진실성을 강화한다. 불안정한 프레이밍과 급격한 패닝은 본의 혼란스러운 정신 상태를 시각화해 관객을 그의 불확실한 세계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는 전통적인 액션 영화의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카메라워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당시 관객에게 큰 충격을 준 것으로 기억된다.
퀵 컷 편집(Quick-cut Editing)은 화면에 액션의 역동성을 극대화한다. 크리스토퍼 라우즈의 편집은 전통적인 연속성 편집 규칙을 과감히 파괴한다. 평균 샷 길이(Average Shot Length, ASL)를 2초 이하로 유지해 관객의 인지 능력을 교란, 정보 처리 한계를 시험하듯 시각적 과부하를 준다. 이는 명료성을 희생하는 대신 압도적인 긴장감과 현장감을 선사하다. 불완전한 정보 제공은 관객의 각각의 액션 시퀀스 안에서 능동적인 해석과 몰입을 유도한다. 단순한 시청을 넘어 관객의 인지적 참여를 유도하는 새로운 방식의 스토리텔링인 것이다.
핸드헬드와 퀵 컷 편집의 기법적 결합은 전에 없던 하이퍼리얼리즘을 창출한다. 관객은 타인의 위기를 지켜보는 나태한 관찰자가 아닌 액션 한가운데 던져진 참여자가 된다. 올리버 우드의 촬영은 자연광을 최대한 활용하고 색보정을 최소화해 현실감 높은 톤을 유지, 관객의 몰입을 돕는다. 폴리 사운드의 정교한 활용 역시 기여가 적지 않다.
# 3.
실용성이 극대화된 전투 시스템 또한 격투 액션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다. 정형화된 무술 대신 상황에 맞춰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실전적 움직임은 시리즈의 정체성이 되었다. 영화는 다양한 무술 기법을 융합하여 독창적이면서도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전투스타일을 창조한다. 카포에라, 권투, 주짓수, 크라브 마가 등 여러 격투기술의 혼합은 본의 다재다능한 전투 능력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즉흥성과 적응력이 돋보이는 액션은 캐릭터 특성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환경 활용의 극대화는 영화의 또 다른 혁신적 요소다. 성룡의 그것이 기예에 가까운 스턴트를 선보이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면 맷 데이먼의 그것은 보다 진실된 의미에서의 '환경'에 가깝다. 일상적인 오브제들, 이를테면 펜이나 잡지, 수건, 주방 도구 등을 활용하는 장면들은 본의 임기응변 능력을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이 역시 단순히 화려한 액션을 넘어 캐릭터의 지능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스토리텔링 도구로서 기능한다. 도시 환경과의 유기적 상호작용 역시 액션 시퀀스에 입체감을 더한다. 좁은 아파트, 복잡한 광장, 공공장소 등 다양한 로케이션은 단순히 시각적 자극 내지 집중을 환기하기 위한 동선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제약과 가능성이라는 양가적인 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모두는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속 액션이 '언제든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라는 믿음을 강화한다. 심리적 요소와 신체적 액션의 결합은 액션의 퀄리티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든다. 본의 기억 회복과 연계된 전투 스킬의 진화는 그 자체로 캐릭터의 내적 방황과 성숙의 여정이다.
# 4.
앞서의 일반론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의 차량 추격 장면은 짚어 소개할만하다. 실제 도로에서 촬영된 고난도 스턴트와 정밀한 카메라 워크는 전례 없는 몰입감과 긴박감을 선사하는 것으로 2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회자된다. 과장된 CGI 효과를 대신하는 실제 차량의 물리적 충돌과 정교한 드라이빙 테크닉은 액션에 순애적인 진정성을 불어넣는다. 좁은 골목길과 복잡한 도로를 누비는 카메라와 함께 추격전의 한 복판으로 뛰어드는 경험은 특별하다.
본 슈프리머시는 액션 영화의 미학적, 기술적 한계를 동시에 확장한 작품으로서 손색이 없다. 우스갯소리로 관객들의 액션 영화에 대한 기대치를 한 층 끌어올린 공공의 적 같은 작품이다. 새로운 미학적 패러다임을 수립한 영화는 리얼리즘에 기반한 새로운 액션 트렌드를 제시함으로써, 21세기 액션 장르의 진화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이정표로 자리매김한다. 후속작 <본 얼티메이텀>(2007)은 물론, <007 카지노 로얄>(2006),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2008),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2011), <아토믹 블론드>(2017) 등 수많은 영화에서 영향력을 두텁게 확인할 수 있다. 간혹 영향을 받아들인 후속작들의 출현에 원작의 감동이 폄하되는 경우도 있으나 지금 봐도 여전히 탁월하다는 것이 놀라운 작품이기도 하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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