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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SF & Fantasy

통제와 오차 _ 듀얼 : 나를 죽여라, 라일리 스턴즈 감독

그냥_ 2022. 9. 2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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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통제의 교차로에 갇혀버린 삶

오차를 누린 자의 풍요로운 죽음

 

 

 

 

 

 

 

 

라일리 스턴즈 감독,

듀얼 : 나를 죽여라 :: Dual』입니다.

 

 

 

 

 

# 1.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 자신과 같은 유전자의 클론을 만드는 SF적 세계관입니다. 작품은 클론을 '더블'이라 부르죠.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된 주인공 '세라'는 자신을 대신할 더블을 구매하기로 결정합니다. 남은 시간 동안 '세라 더블'에게 자신의 습관과 취향과 성향,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따위를 전달하며 대체를 준비합니다.

 

그런데 10달이 지나도 죽지를 않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세라는 병원을 찾아가는데 의사로부터 불치병이 나았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자신의 삶을 되찾아야겠다 생각한 세라는 더블을 폐기하기로 하는데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 더블도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게 되고 말았다 합니다. 이럴 경우 원본과 더블은 '듀얼'이라는 이름의 결투를 벌이게 되는데요. 자신과 똑 닮은 상대를 죽이고 살아남은 존재가 삶을 차지하게 됩니다. 죽거나 죽이거나의 이지선다 앞에 놓인 세라는 결투를 준비하기 위해 1년 간 특훈에 들어가는 이야기죠.

 

 

 

 

 

 

# 2.

 

세라의 삶은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한 [통제]로 설명됩니다.

 

그녀는 도입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모습과 자위하는 모습으로 소개됩니다. 식욕과 성욕이라는 기본 욕구가 그녀를 설명하는 전부일뿐 이를 제외한 주변의 삶은 어둡습니다. 심지어 tv도 꺼져있죠. 타지 근무 중인 남자 친구와의 화상 대화에서 인터넷이 끊기자 불쾌해하는 것은 상황을 온전히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불만을 의미합니다. 엄마는 대결적인 존재, 압박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먹는 것(식욕)을 뱉어내게 강요하는 사람이죠. 엄마는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냐" 묻습니다. 불쾌해진 딸은 자신의 행복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10살 때부터 모았다는 동전을 우악스럽게 집어삼키다 토해냅니다. 세라는 충족될 수 없는 통제욕에 갇혀 있는 인격인 것이죠.

 

일련의 성격은 이후 이별을 고하는 남자 친구와의 대화, "너는 모든 상황을 다 통제하려 한다"는 말로 구체화됩니다. 의사를 비롯한 주변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이질적일 정도로 공격적으로 대하는 것 역시 각각 주인공의 통제력을 위협하는 스트레스의 의인화와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 3.

 

[통제]적인 세라가 불치병으로 말미암아

[오차]를 직면하는 서사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중반 즈음 건너 뛰게 되는 10달 후라는 시간은 쓸데없이 구체적인데요. 통상 아이가 자라 출산되는 시간으로 이해하면 무난할 겁니다. 세라의 인생이 새롭게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요. 병원을 나서 처음 맞닥뜨린 현실은 집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라의 삶은 당연하게도 통제력의 상실로부터 시작됩니다.

 

트레이너 '트렌트'를 찾아가는 순간은 [오차]를 수용한 두 번째 삶입니다. 특훈이란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변수에 대응하고 적응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죠. 꺼져있던 tv에서 드디어 무언가가 흘러나옵니다. 관계가 형성되고 학습이 발생합니다. 춤까지 추죠. 트레이닝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이전까지 보다 훨씬 인간적인 삶, 풍요롭고 역동적인 삶을 사는 순간들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 영화의 이야기란 무수히 많은 오차의 반복이라 정의해도 무리는 없습니다. 병원 데스크의 간호사에게 응급 상황은 아니라 말하자마자 피를 쏟아냅니다. 별일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죽을병이었고 죽을 거라 체념하자 회복됩니다. 살 확률은 0%. 병에 굴복할 확률 98%. 2%는 오차라는 황당한 말을 의사가 뻔뻔하게 내뱉고 오차는 여지없이 적중합니다.

 

구매한 더블도 다른 눈동자 색이라는 오차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1년 내내 결투를 준비하지만 뜻밖의 폭우 탓에 1달 미뤄집니다. 노견을 죽이지 않으려 했지만 빗나간 석궁은 길가의 강아지를 관통하구요, 온갖 무기를 연습했지만 정작 지루하고 오랜 시간이 걸린단 이유로 무시했던 독에 살해당하고 말았죠.

 

 

 

 

 

 

# 4.

 

부검을 참관하는 장면은 특별히 흥미롭습니다. 죽은 여자는 부검의에 의해 세라와 똑 닮은 존재로 정의됩니다. 눈동자 색이 같다 짚는 것은 시신이 더블보다도 더 세라에 가까운 존재라는 함의라 할 수 있겠죠. 그녀는 오토바이를 타다 죽었다는데요. 운전은 조심히 했고 헬맷까지 썼지만 운이 없게도 다른 차의 신호 위반에 변을 당했다 합니다. 유언은 차를 살걸 그랬다는 후회였다 하죠. 통제할 수 없는 문제에 의해 죽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자는 불치병에 걸려 죽은 가상의 세라입니다.

 

영화에는 [비용]에 대한 코드가 반복되는데요. 통제와 오차에 대한 인식을 엿보게 하는 아이템이라는 생각입니다. 통제를 벗어난다는 것은 불필요한 비용이 발생했음을 의미합니다. 죽은 여자가 자동차가 아닌 오토바이를 선택한 것은 역시나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였을 테지만, 죽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죽는 순간에서야 차를 살 걸이라며 후회할 뿐이죠. 비용을 두려워하며 오차를 통제하려던 삶의 끝은 후회뿐입니다. 이후 결투를 앞둔 세라가 돈을 탈탈 털어 마지막으로 입을 가장 멋진 옷을 쇼핑하는 장면은 앞서의 부검 장면과 미학적으로 대응된다 할 수 있겠죠.

 

간단한 대화를 마친 후 의사가 부검을 시작하자 세라의 눈은 더욱 단호해집니다. 통제적인 삶을 살던 자신의 죽음을 목격하고 오차를 받아들인 세라. 이전의 삶을 살해한다는 의미에서 더블을 죽이겠다는 의지가 보다 확고해졌기 때문입니다.

 

 

 

 

 

 

# 5.

 

세라를 더블이 염탐합니다. 꼬마가 세라와 더블을 쌍둥이라 말하는 것은 주객 관계가 고정된 존재들이 아니라 각각 주체로서의 인격임을 의미합니다. 짧은 추격전 끝에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가까이하게 되는데요. 시간이 흘러 만나게 된 더블은 엄마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통제하던 과거의 세라가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엔 더블이 통제하는 대로 원래의 세라를 독살하는 데 성공하게 되죠.

 

작품의 끝은 각기 다른 두 결말의 나열입니다. 살아남은 '세라 더블'은 그냥 '세라 더블'로서 살아가도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구태여 소송을 치러서 까지 원본인 '세라'의 정체성을 가지려 합니다. 영화의 결말이란 것은 '세라 더블의 최후'와 '세라의 최후'가 아닌 통제하는 세라와 오차를 받아들인 세라라는 두 개로 분화되어버린 쌍둥이 세라'들'의 최후인 것이죠.

 

교차로의 세라는 불치병 이전부터 이어진 [통제의 세라]입니다. 살아남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세라다움을 연기하고 연출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여전히 통제되고 있고, 그 고통은 쳇바퀴 돌듯 제자리를 맴도는 교차로와 절규로 상징됩니다. 반면 숲의 세라는 마지막까지 [오차의 세라]입니다. 비록 죽었지만 죽는 순간까지 예기치 못한 변수와 오차를 오롯이 누린 삶, 정적인 더블과도 진심을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의 삶이었던 것이죠. 교차로의 오열과 대비되는 고요의 숲은 어떤 면에선 편안하고 풍요로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먹고 자위하며 생명을 연장하기만 하는 통제의 삶은 춤추고 소통하고 지불하는 오차의 죽음만 못하다는 결말은, 앤딩 크레디트가 오르는 동안의 긴 정적으로 완성됩니다.

 

 

 

 

 

 

# 6.

 

과감한 상상력으로 풀어낸 끔찍한 농담을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계속 날리는 맛이 묘한 코미디입니다. 작품을 지배하는 오차라는 코드와 맞물려 끊임없이 예측을 한 끗발 엇나가는 재미, 그 속에서 성장하는 주인공의 정서를 따라가는 감각은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테마는 확실한데 반해 테마를 전달하고 작동시키기 위한 연출이 친절하다거나 시나리오가 치밀하다 말하기에는 다소 무리라는 생각입니다. 세라와 더블의 대비가 다소 희미하고, 쌍둥이를 비롯한 몇몇 코드는 너무 기능적이라 겉도는 감각도 없잖아 있습니다.

 

다소 덜컥거리는 난해한 이야기를 관객 스스로 적극적으로 탐미하려는 노력이 강요되는 작품이라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듯 하나 그럼에도 그 정도 노력을 들일만한 고유의 매력은 확보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마치 상상력과 밀도가 조금 많이 너프 된 대신 장난기는 버프 된 란티모스 같달까요. 라일리 스턴즈 감독, <듀얼 : 나를 죽여라>였습니다.

 

# +7. 나를 죽여라? 부제 만들어 붙인 놈부터 진짜 죽이고 싶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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