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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Horror

중독과 선택 _ 어딕션, 아벨 페라라 감독

그냥_ 2021. 12. 1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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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문과를 가까이하는 게 이렇게나 위험합니다.

대학원생은 더더욱 위험합니다.

 

 

 

 

 

 

 

 

'아벨 페라라' 감독,

『어딕션 :: The Addiction』입니다.

 

 

 

 

 

# 1.

 

강의실에 전쟁 범죄와 관련된 슬라이드가 펼쳐집니다. 국가의 악행에 가담한 개인의 책임을 두고 두 대학원생이 논쟁을 벌입니다. 벌써부터 피곤하죠. 뱀파이어 영화인 줄 알았는데요. 공포 영화라 그러셨잖아요.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생의 값진 교훈 하나를 안겨줍니다. 이 영화는 수면 부족으로 다크서클이 가득한 굳은 표정의 대학원생이 다가오면 단호하게 꺼져라 말해야 한다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명심하세요. 자칫 방심하다간 교수들이 득실득실한 파티장에 납치당해 피를 쪽 빨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 2.

 

칸트에 헤겔에 샤르트르까지. 오냐오냐 하니까 끝이 없습니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정언명령이니 가언명령이니 하는 게 얼핏 기억나는 듯도 합니다만 누구신데 자꾸 명령질이세요.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대체 무신 소린지 모르겠구요. 자유의지는 창조경제나 혁신성장처럼 좋은 거 두 개 붙여둔 거니까 아무튼 좋은 걸 겁니다.

 

몇 년 후면 대부분 치킨집 사장님으로 최종 진화할 철학과 친구들이 쏟아내는 설명적 수사에 현혹되기 시작하면 영화는 한도 끝도 없이 어려워집니다. 물론. 영화가 제안하는 그 어려운 논쟁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뿐더러, 척하면 척하고 알아들으실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세상엔 저 같은 무식한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러니 속 시원하게 수사들은 싸그리 걷어내 봅시다.

 

 

 

 

 

 

# 3.

 

결국엔 '중독'과 '선택'입니다. 피에 중독되어버린 자의 선택과 고뇌를 교차적으로 나열하는 서사죠. 주인공이 내뱉는 대사 대부분은 중독이(피뿐 아니라 마약이든 섹스든 폭력이든) 자유의지를 침범하지 못하리라는 선언과 자위로 귀결됩니다.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행동 대부분은 자유의지가 중독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주인공의 주장에 대한 반례로 귀결됩니다. 한 개인이 동시에 보이는 논리와 행동의 이율배반적 격차가 만드는 위화감은 이 영화의 장르적 정체성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작품의 독특함은 뱀파이어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에서 비롯됩니다. 일반적인 뱀파이어물에서 '흡혈'은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됨을 의미합니다. 이전까지 쌓아왔던 시간과 관계와 사고방식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인간성의 죽음이라 합의하죠. 반면, <어딕션>에서는 보다 노골적인 인간이 되는 폭력적 계기라 해석합니다. 영화를 가득 메운 노이즈처럼 뱀파이어에 다가갈수록 보다 본질적인 인간, 더 정확히는 보다 '본능'적인 인간에 다가갑니다. 자연스럽게 영화의 전개라는 것 역시 '더 깊은 층의 인간다움'에 대한 탐구로 귀결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피곤한 철학 영화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 4.

 

조금 더 살펴봅시다. 주인공 '캐슬린'이 뱀파이어가 된 계기는 우연입니다. 우연히 발생한 사고에서 당당히 꺼지라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대답은 뱀파이어가 되어버린 캐슬린 역시 타인에게 반복적으로 강요합니다. "꺼져라"라고 말하는 행동의 함의가 그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거겠죠.

 

당당히 꺼지라 말해야 할 대상은 폭력을 강요하는 외부의 압력일 수도, 내재된 폭력적 본성이 만들어낸 압박감일 수도 있습니다만 굳이 둘 중 어느 한 쪽을 택일하는 건 무의미할 겁니다. 주인공을 비롯한 대부분의 피해자, 아니 '공모자'들이 꺼지라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가 '공포심'이라는 것이 훨씬 중요하죠.

 

영화가 주장하는 공포심이란 대상에 대한 상대적인 격차로 인한 리액션이라기보다는, 대상을 불문하고 폭력 앞에 무기력하게 발현되는 능동적인 액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캐슬린에 의해 물리게 되는 사람들의 스팩트럼을 최대한 넓게 설정한 것은, 이 공포심이라는 것이 개인의 육체적, 경제적, 지적 능력과 무관하게 작동함을 의미합니다. 중독된 폭력을 뿌리치지 못하는 만드는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이란 없으니까요.

 

 

 

 

 

 

# 5.

 

"너도 공모자야"

 

집단의 폭력에 공모한 개인이 되도록 만드는 공포심과, 폭력을 가속케 하는 중독입니다. 그 일체를 자유의지라는 명분으로 개인에게 전가해도 되는 것인가? 라는 문제의식을 길~게 늘어놓은 듯한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이성의 구심력을 압도하는 본능의 원심력입니다. 힘겨루기 한가운데 놓인 인격의 고뇌와 갈등을 다룬 작품이기에 개인의 다각적 정체성, 이를테면 이성적 판단, 본능적 욕망, 규범적 행동, 존재적 공포 따위를 각각 대변하는 본래의 얼굴과, 그늘진 얼굴과, 거울에 비친 얼굴과, 거울을 가리는 선택 따위가 적재적소에 나열됩니다. 개인을 고뇌케 하는 양 극단의 인력을 대표하는 '철학하는 학교'와 '뱀파이어의 성'을 물리적으로 구축한 후, 그 교집합으로서 뱀파이어가 되어버린 철학자의 방이라는 특별한 공간을 세심히 연출했던 거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복잡하게 들리는 수사들과는 대조적이게도 암부 표현을 모조리 날려버린 특이한 화면 연출처럼, 상당히 이분법적인 영화라 할 수 있겠죠.

 

 

 

 

 

 

# 6.

 

그런 인간에게 있어 '철학의 역할'이란 무엇일까. 주인공은 피에 중독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 반동으로 자기 합리화에 중독되어 있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선 영화에서의 철학이란, 본성을 압도하는 인간다움을 추종케 하는 '목적'이 아니라, 본능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명제는 곧 '나는 포기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지나 '나는 중독된다. 고로 존재한다.'까지 나아갑니다. 중독이 곧 존재라는 선언보다 중요한 것은 짧은 시간만에 뻗어나가는 논리의 비약과, 비약을 압박하는 에너지입니다. '현실과 자신의 욕구 앞에서 어찌할 수 없을 때 엄청난 압박감이 몰려온다'라거나, '죄를 지어 죄인인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는 말 모두 중독 그 자체를 합리화합니다. 영화 내내 캐슬린의 말들에서 딱히 알맹이가 느껴지지 않는 건. 그의 철학이 담긴 논문을 심사하고 축하하는 철학자들이 모조리 뱀파이어의 한 끼 식사로 전락하는 건. 모두 철학에 대한 냉소적 시선을 엿보게 하죠. 

 

충분히 도덕적인 인간, 충분히 사유하는 인간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간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학살당한 철학쟁이들의 시체 위에서 고상한 인간의 고상한 학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되묻는 도발입니다.

 

 

 

 

 

 

# 7.

 

결말은 다소 비겁하다는 생각입니다. 인간이란 폭력에 중독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고 이 불완전한 존재들의 근원적 문제를 방기한 상태에서 개인의 선량함과 자유의지에만 의존하는 것은 거대한 악의 연쇄를 끊을 수 없다 말하면서 내놓는 대답이라는 것이 고작 '신성'이라는 건 비아냥을 사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대사들에 크게 집착하지 말자 말씀드리긴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현학적 대사들은 어쨌든 단점이라 해야 할 겁니다. 내용을 일일이 독백으로 풀어내는 방식은 그보다 더 별로였구요. 영화는 논리를 '이야기의 형식'으로 풀어내는 장르일 텐데요. 다른 감독이 바보라거나 생각이 짧아서 가벼운 사고 실험 하나를 위해 캐릭터를 배치하고 배를 띄우고 비행기를 폭파시키는 게 아니죠. '아벨 페라라' 감독, <어딕션>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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