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콤플렉스의 교도소. 트라우마의 지하실. 성탄절의 카타르시스
윌리엄 올드로이드 감독,
『아일린 :: Eileen』입니다.
# 1.
<레이디 맥베스>(2017)를 통해 억눌린 욕망과 반동을 서슬 푸른 광기로 그려낸 감독은, 차기작에서도 음습하고 내밀한 욕구를 억누르며 사는 여인 아일린에게 주목한다. 주인공 역은 세상의 모든 불안을 담고 있는 듯한 눈망울의 토마신 맥킨지가 맡았다. 레베카 역은 매 순간 관객의 시선을 장악하는 앤 해서웨이가 연기한다. 오테사 모시페그의 원작 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윌리엄 올드로이드는 뛰어난 두 배우와의 협업을 통해 엄격하고 배타적인 환경과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내면 사이 유리된 자아의 혼란을, 급작스러운 범죄 사건에 얹어 탐구한다.
아일린은 보수적인 1960년대 미국 매사추세츠, 작은 시골마을 교도소 직원이다. 전직 경찰서장 출신인 문제적이고 통제적인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는 그녀는 냉소적인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으로 소개된다. 반면, 순수한 표정을 가진 그녀의 내면은 성욕과 폭력에 대한 은밀한 관심으로 가득하다. 잘못은 아니지만 굳이 알고 싶지 않은 너저분한 망상과 손짓과 냄새는 서서히 스크린 위로 스며들어 인물의 콤플렉스를 탐닉하게 한다.
교도소라는 특수한 배경과 알코올중독자 아버지라는 가정환경의 이유다. 좁고 차가운 복도, 회색빛 조명, 닫힌 문의 교도소는 캐릭터의 디테일을 공간으로 확장한 것이다. 크리스마스 연극은 대표적이다. 엄격한 규율로 통제되는 듯 하지만 작은 계기로 말미암아 걷잡을 수 없는 폭력으로 번지는 몇몇의 상황들은 내면에서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인물의 욕구를 은유한다. 감독은 대부분의 분량을 본격적인 사건 대신 인물을 세공하는 데 투자한다. 이후에 어떤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는 지와 무관하게, 영화는 아일린의, 아일린에 의한, 아일린을 위한 것이다.
# 2.
끔찍하게 지루한 교도소에 하버드 출신의 새로운 교정 상담사가 부임한다. 아름다운 금발과 당당한 걸음걸이의 상담사 레베카는 유리창 너머 훔쳐보며 자위하던 아일린에겐 눈 내리는 겨울의 밤공기처럼 상쾌하다. 마치 아일린의 갈망을 고스란히 옮겨 실현한 것만 같은 그녀는, 숫기 없는 소녀의 욕망을 해방시키는 강력한 촉매제다. 몇 번의 데이트를 지나 아일린은 점차 레베카를 동경하게 되고, 우상으로서의 레베카는 소녀로 하여금 자신의 욕구를 직시하게 한다.
한편, 조금 과격한 해석을 상상할 수는 없을까. 아일린은 영화 내내 겁탈당하고 자살하고 살인하는 등 망상을 즐기는 데, 레베카의 존재까지 그녀가 만들어낸 망상이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세상과 따로 놀듯 유리된 모습의 레베카는 욕망을 이룬 가상의 자아를 타자화한 또 다른 아일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 인간에게서 분리된 두 인격이라는 면에서 <라스트 나잇 인 소호>(2021)가 연상되는 해석이다. 겸사겸사 두 작품 모두 토마신 맥킨지가 주인공이기도 하고, 그녀의 다른 인격이었던 안야 테일러조이가 확신의 눈빛을 가진 금발미녀이기도 하다. 하필 교정사의 이름이 레베카인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소설 <레베카>(1939)를 연상시키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후반부 지하실에서의 사건은 상쾌한 추락이다. <조커>(2019)에서 아서가 계단을 내려오며 조커에게로 자아의 주도권이 넘어갔던 것처럼, 지하실로 내려간 아일린은 짙은 화장과 코트의 레베카가 된다. 아버지를 죽이고 교도소에 수감된 소년 리 포크 사건의 전말이 펼쳐지는 지하실은 구체적인 사건 이상의 공간처럼 연출되어 있다. 유독 실험적이고 연극적인 형태로 미술 된 새하얀 지하실은 망상을 걷어 낸 아일린의 트라우마가 투사된 정신적 공간이다.
# 3.
리 포크 사건은 다음과 같다. 부인의 성기에 염증이 생겨 더 이상 관계하지 못함에 따라 남편이 아들을 겁탈했다는 것이다. 아들을 겁탈하고 돌아온 남편은 이전처럼 자신에게 다정했기에 부인은 이를 묵인했고, 견디다 못한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사건은 놀라울 정도로 아일린의 내면과 구조적으로 연관된다. 부인은 성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면에서 욕구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아일린의 상황과 닮았다. 남편은 아내의 역할을 대신해 아들을 겁탈하는 데, 이는 아일린이 스스로 생각하는 아버지에 철저히 복무하고 있다는 인식과 닮았다. 자신은 하지 못한 아버지를 살해한 소년 리는 반복적인 아일린의 망상과 연결된다. 그런 망상에 안주하는 자신은 아들이 겁탈당한 대가로 얻은 일시적인 다정함에 안주하는 부인과 같은 것이다.
아일린이 부인에게 총을 쏘는 것은 용기 없는 자신보다 안주하는 자신을 더욱 증오함이다. 명백히 실존적이고 자해적임에도 그 고통을 외면하는 것에 안주하는 자아에 대한 충동적인 살해다. 총을 쏜 직후. 묵은 무언가가 씻겨 내려가기라도 한 듯 고양감에 한껏 충전된 아일린의 얼굴엔 급격히 생기가 돈다.
하지만 오르가슴이 한순간이듯 추락이 상쾌한 것 또한 한순간이다. 계단을 미끄러져 내려온 아서가 이후 <폴리 아 되>에서 짊어져야 했던 고통처럼 말이다. 레베카가 돌아오지 않는 건 망상은 대신 책임져주지 않음이다. 아버지가 자신의 외출을 걱정하는 장면은 자신을 정신적으로 겁탈한다고만 생각했던 아버지가 사실 그런 납작한 인물만은 아님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아일린은 죽은 부인을 숲에 버린다. 살해된 상처의 찌꺼기는 내면 깊숙한 어딘가에 묻힌다.
숲에서 나와 히치하이킹을 한 아일린은 어디로 가는 걸까. 알 수 없다.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도 그대로 달아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전의 그녀와는 다른 아일린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아일린은 포크 가족의 비극으로부터 자신의 상처를 직면함으로써 정화하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만약 어떤 관객이 아일린의 비극을 통해 비슷한 자신의 상처를 직시할 수 있다면. 그때의 카타르시스 또한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end.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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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타르시스, catharsis [문학] 비극(悲劇) 속의 연민과 공포(恐怖)를 통해서 마음이 정화되고 쾌감을 느끼는 일. [심리학] 자기가 직면한 고뇌(苦惱) 따위를 밖으로 표출함으로써 강박 관념을 해소시키는 일. Oxford Languages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