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짐승으로 태어나 버린 외로운 존재들
박찬욱 감독,
『올드보이 :: Old Boy』입니다.
# 1.
박찬욱에게 인간은 이성과 본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외롭고 괴로운 존재다. 이때의 이성이란 논리나 도덕, 문화, 규칙, 격식, 교양 등 인간이 스스로 만든 온갖 규범을 통할한다. 본성은 사랑, 믿음, 증오, 폭력, 모멸, 질투 등 근원을 알 수 없는 마음의 변화를 모두 포괄한다.
인간은 이성을 활용해 본성을 통제함으로써 스스로 동물과 구분되는 특별한 존재라 주장하지만, 박찬욱에게 이는 스스로 고결하다 느끼기 위해 만든 허구적 신화에 불과하다. 팬들에게 흔히 복수 3부작이라 일컬어지는 <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 씨>(2005)는 물론 <박쥐>(2009)와 <아가씨>(2016), 최근의 <리틀 드러머 걸>(2018)과 <헤어질 결심>(2022)까지 모두 장르와 시대는 다를지언정 규범과 본성 사이에서의 갈등을 관찰한다는 면에서만큼은 일관된다. 자신을 등에 업은 개구리에게 독침을 찔러 넣을 수밖에 없었다던 전갈의 이야기처럼 감독이 만든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 끝이 아련하지만 단호한 비극으로 귀결되는 이유다.
올드보이는 오대수(최민식 분)와 이우진(유지태 분)이라는 압도적인 두 캐릭터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본질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는, 일반과 극단적으로 멀리 떨어진 이름 모를 자살남(오달수 분)을 상정한 후 그에게 다가가는 이야기다. 영화는 넥타이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자살남에게 오대수가 말을 거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굳이 손도, 다리도, 재킷도 아닌 넥타이인 것은 그것이 아무런 실용성 없는 지극히 규범적인 도구이기 때문이다. 자살남을 붙잡은 오대수는 말한다. "얘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올드보이는 자살남과 얘기를 하고 싶은 영화, 개를 품은 남자를 궁금해하는 자의 영화다.
# 2.
자살남을 이해하기 위해선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도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라는 대사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번득 눈에 띄는 것은 '짐승'과 '살 권리'라는 단어다.
짐승은 동물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그 낮잡음은 비교군으로서 내려다보는 인간의 존재를 요구한다. 인간은 인간과 짐승을 결정론적으로 구분한 후 이를 근거로 '인간은 짐승을 사랑해선 안된다'는 규범을 수립했다. 자살남은 그 이성적 규범으로 본능을 통제하는 데 실패한 인물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스스로를 '짐승 같은 놈'이 아니라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 부른다는 점이다. 이성적 규범이 없어서 실천하지 못하는 존재는 그저 짐승에 불과하다. 이성적 규범이 존재함에도 실천하지 않는 존재야 말로 짐승만도 못한 놈이다. 반면, 살 권리라는 말은 모든 생명에 적용되는 훨씬 보편적인 개념으로 인간과 동물을 불문한다. 즉,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도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라는 말은 곧 "'짐승만도 못한 놈'이 아니라 '짐승 같은 놈' 아닌가요?"라는 말과 다름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만약 인간이 이성적 규범으로 본성을 통제해 마땅한 존재라면, 그는 짐승만도 못한 놈인 것이 옳다. 반면 인간이란 원래부터 이성적 규범으로 본성을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라면? 그는 그저 짐승 같은 놈일 뿐이다. 영화는 인간이란 짐승보다 우월하다 자위하기 위해 짐승만도 못한 존재가 되지 않도록 투쟁하는 것일 뿐, 본질은 그냥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라 주장한다. 이우진은 짐승만도 못한 놈(근친을 한 비윤리적인 존재)이 아니라 짐승 같은 놈(사랑에 어쩔 수 없는 본능적인 존재)이며, 오대수 역시 짐승만도 못한 놈이 아니라 그저 짐승 같은 놈일 뿐이다. 클라이맥스에서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오대수가 개처럼 짖는 장면이 문득 스치는가.
# 3.
오프닝을 지나 경찰에 붙잡힌 오대수는 술주정을 부린다. 관객의 눈에 그는 한심한데, 이때의 한심함이란 이성적인 도덕규범을 어기고 있는 '짐승만도 못한 자'의 한심함이다. 박찬욱은 관객들로 하여금 우리 주변의 흔히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들을 '짐승만도 못하다' 여기게 만드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곧이어 감옥에 갇힌 오대수는 감옥에 갇혔다는 것보다 감옥에 갇힌 이유와 그 기한을 모르는 것에 더욱 고통스러워한다. 나가고 싶다는 것은 본성이고 이유를 찾는 것은 이성으로, 오대수는 이성의 감옥에 갇힌 것이다. 중국집 군만두는 식(食), 수면가스와 이발은 의(衣), 타의적으로 안전한 감옥은 주(住)다. 의식주가 온전한 감옥은 짐승의 공간이고, 아직 자신이 짐승이라 생각지 않는 오대수에게 그곳은 작은 액자 속에 갇혀 웃을 수밖에 없는 사람처럼 절망적이다. 아내의 사망소식과 용의자로 자신이 지목되었다는 것에 스스로 짐승과 다른 인간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오대수의 내면은 처참하게 살해당한다. 그 유명한 개미씬이다.
한편, 감옥에서 오대수는 자신의 삶을 회고한 악행의 자서전을 통해 과거의 과오를 기록한다.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악행의 크기와 원한의 크기를 정량적으로 비교하게 되는데, 이때 느슨하게 암시된 '크기'라는 개념은 결말까지 이어진다. "모래알이든 바윗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라는 이우진의 대사다. 모래와 바위는 정량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돌이라는 정성적인 면에서는 동일하고, 여기서의 크기는 개성, 물질은 본성의 은유다. 돌멩이가 크든 작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이듯, 밑바닥의 오대수든 정상의 이우진이든 짐승으로서 본성에 자유롭지 못함은 마찬가지다. 감옥은 본성에 지배받으면서도 애써 외면한 채 이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처량한 운명이다. 상징적인 몇몇의 공간들, 오대수가 갇힌 사설 감옥과, 오대수가 들어있던 여행가방뿐 아니라, 거짓말처럼 변해버린 바깥세상도, 이우진의 팬트하우스도, 엔딩의 숲에 은유된 온 세계도 점층적으로 확대되지만 모조리 감옥이다.
15년이 지나 풀려난 오대수는 우연히 들린 일식집에서 미도(강혜정 분)에게 살아있는 음식을 주문한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낙지는 짐승이고 오대수는 이를 우악스럽게 집어삼킴으로써, 복수를 위해 규범 따위 집어던진 짐승이 될 것임을 각오한다. 미도가 들고 있는 회칼은 본성으로서의 낙지를 죽이고 통제하는 물건으로 이성과 윤리를 상징한다. 직후 오대수가 미도를 덮치는 장면에서 호신용으로 굳이 회칼을 들고 있었던 이유다. 미도는 회칼(윤리)을 동원해 대수(본성)를 밀어내지만 차마 단호하게 칼날을 들이밀지는 못한다. 미도 역시 본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짐승이긴 매한가지기 때문이다. 겁탈에 실패한 오대수는 말한다. "죽을죄를 지었다." 여기서의 '죽을죄'란 자살남의 '살 권리'를 뒤집은 것으로 짐승으로서의 본능적인 행동을 했다는 친절한 자백이다.
# 4.
이어지는 분량은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방법적 회의와 그동안의 고단함으로 점철된다. 왜 가두었는가를 묻고, 누가 가두었는가를 묻고, 왜 풀어줬는가를 묻고,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를 묻다가, 마지막엔 남겨진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으며 존재의 밑바닥에 서서히 다가간다. 소위 장도리씬으로 유명한 18 대 1 격투장면이라거나, 짜장면집을 찾기 위해 내달리던 오르막길, 높은 이우진의 빌딩은 모두 여전히 이성에 얽매인 짐승만도 못한 존재의 처절한 분투로서 오대수의 치열함을 관객에게 설득한다.
이우진의 "있잖아, 사람은 말이야.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 거래. 그러니까, 상상을 하지 말아 봐. 존나 용감해질 수 있어."라는 대사 역시 흥미롭다. 올드보이는 두 주인공의 비겁함으로, 책임질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오대수의 비겁함과, 근친의 비난으로부터 도망친 이우진의 비겁함이 만든 비극이다. 이우진의 표현을 그대로 빌린다면 이우진의 자지는 본성을 스스로 거세한 이성을, 오대수의 혓바닥은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본성을 의미한다. 이수아를 임신시킨 것이 성기인 자지가 아니라 성과 무관한 혓바닥이라는 아이러니는 그것이 본성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 5.
"누나하고 난, 다 알면서도 사랑했어요...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
배우 송강호가 '이 대사야 말로 영화를 응축한 한마디'라 하자 감독이 '당신 참 똑똑한 배우'라며 감탄했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해당 대사를 조금 더 친절하게 풀어내자면 당신은 짐승만도 못한 존재가 아니라 짐승 같은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냐는 물음으로 이해된다. 결말은 그 이우진의 물음에 대한 오대수의 대답이다. 오대수는 최면술사를 찾아가 기억을 지우는 데, 미도에 대한 사랑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미도가 딸이라는 기억을 지워달라 요청한다. 본성(미도에 대한 사랑)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미도가 딸이라는 사실)만을 지운다는 것은, 짐승만도 못한 놈이 아닌 짐승 같은 놈으로서의 안식이고, 이는 곧 감독이 그토록 도달하고자 했던 도입의 자살남에 다가가는 수미상관적인 앤딩이다. 이후는 열린 결말로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론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으리라 추측한다. 박찬욱의 세계에서 본성과 이성의 괴리는 살아서 극복 가능한 것이 아니다.
본성을 이성으로 완벽히 통제한, 그래서 동물을 뛰어넘는 태양과도 같은 고귀한 인간은 어차피 불가능하다. 회개를 통해 내재된 폭력성을 억누르려던 소녀에겐(친절한 금자 씨) 칠흑같이 어두운 밤 아련한 눈발만이 허락된다. 시대와 계급의 규율로부터 달아난 레즈비언 커플에게(아가씨) 주어진 것은 연약한 달빛이다. 종교인으로서의 도리를 어기고 피를 탐한 성직자는(박쥐) 찰나의 태양빛과 함께 타들어 죽었다. 형사로서의 직업윤리를 거스르고 범죄자를 사랑한 남자의(헤어질 결심) 태양은 안갯속에 숨겨버린다.
다만,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본성을 통제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부질없는 것은 아니다. 그 노력을 폄훼하거나 부정할 정도로 오만하진 않다. 박찬욱의 필모그래피에서 모두는 손에 데일 것만 같은 뜨거움으로 투쟁하고, 그 치열함은 최대한의 아름다움으로 보상받는다. 앞서 말한 영화들의 끝은 대부분 비극적이지만, 본성과 이성 사이에서 외로운 인물들이 서로의 외로움을 아련하고 고귀하게 보듬어줄 상대와 함께 한다는 것을 잊어선 곤란하다. 박찬욱은 늘 일관되게 말해 왔다. (본성을 완벽히 통제한 이성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려. 그리고 (그럼에도 이성을 지켜보려고 노력하고) 힘내.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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