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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간절히 평범하려는 자의 쓸쓸함 _ 시스터스 브라더스, 자크 오디아르 감독

그냥_ 2025. 4. 3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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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청산되지 않는 폭력과 부정되지 않는 희망 사이에서

 

 

 

 

 

 

 

 

자크 오디아르 감독,

『시스터스 브라더스 :: The Sisters Brothers』입니다.

 

 

 

 

 

# 1.

 

오랜 시간 서부극은 자신의 신화를 반복해 왔다. 광활하고 황량한 대지와 피도 눈물도 없는 무법의 시대, 이를 개척하거나 지배하려는 마초 영웅의 신화다. 시스터스 브라더스 역시 표면적으로는 익숙한 서부극의 신화를 계승하는 듯 보인다. 1850년대 오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청부 살인업자 형제의 폭력과 파멸을 정직하게 따라간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는 덴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균열의 징후는 제목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Sisters'라는 형제의 성(姓)은 영화의 방향을 조용히 비튼 과정에서 생긴 흉터다.

 

전통적 서부극이 이상화해 온 거칠고 확고한 남성성을 감독은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야기는 겉으로 드러난 폭력보다 그들이 껴안고 있는 내면의 공허와 미세한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자크 오디아르는 서부극의 외피 아래로 존재의 불안과 애정을 끈질기게 탐색한다. 형제는 영화 내내 총 쏘는 기술보다 서로를 지탱하는 것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이들 곁에서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감독이 논하고자 하는 것은 더 이상 서부극 특유의 스펙터클이 아니다. 생존에 대한 피로감, 과거로부터 영원히 도망치는 존재들의 쓸쓸함이다.

 

 

 

 

 

 

# 2.

 

존 C. 라일리의 엘라이는 영화가 제안하는 새로운 인물상이다. 직업과 별개로 그는 총을 다루는 기술이나 냉혹한 폭력성 따위로 정의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투른 말투, 타인에 대한 조심스러운 관심, 평범한 삶에 대한 어설픈 갈망이 두텁게 쌓여 인물의 본질을 이룬다. 엘라이에게 폭력은 숙명이 아닌 짐이다. 총을 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총을 쏘는 운명에 억지로 끌려온 인간으로, 감독은 이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손짓, 표정, 선택 등을 통해 점진적으로 밝혀내 인물의 고뇌를 설득한다. 엘라이를 담을 때면 광활한 배경보다는 얼굴 가까이 클로즈업하길 유독 즐기는 이유다.

 

어두운 모닥불 곁, 새벽녘의 흐릿한 하늘 아래마다 엘라이는 반복적으로 세상을 조심스럽게 응시한다. 폭력의 세계에서 소외된 자의 서정적인 시선과, 그런 인간의 눈에 비친 잔인한 세계를 겹쳐 비춰냄이다. 손을 씻고 이를 닦는 장면 모두 내면을 은유하는 친절한 연출이다. 평범한 삶을 방해하는 오염을 제거하려는 무의식적 몸짓으로, 피로 얼룩진 거친 외부와 별개로 그는 자신의 내부를 지키기 위해 정화의 제스처를 반복한다. 엘라이가 누군가와 부드러운 관계를 맺으려 할 때면 영화는 그 시선을 더욱 섬세하게 조율한다. 살인 후의 쓸쓸한 밤, 술자리에서 조심스레 호의를 내미는 장면 같은 세세한 디테일은 그가 폭력이 아닌 다른 삶을 꿈꾸고 있음을 두텁게 암시한다.

 

그러나 잔인한 현실은 피할 수 없다. 엘라이가 꿈꾸는 삶은 끊임없이 좌절되고 그 결과 매번 다시 총을 쥔다. 따라서 총격전은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무겁고 고통스럽다. 방아쇠를 당길 때면 카메라는 쾌감 대신 피로와 체념을 기록하는 것에 전념한다. 전통적 서부극과의 단호한 결별이다. 승리도, 영광도, 환희도 존재하지 않는 총격 속에서 엘라이는 겨우 살아남을 뿐이다. 그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희망'이 가능한가를 가장 진지하게 질문한다. 미력하나마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소한 인간은 마초적 영웅상을 해체한 자리에 피어난 인간성이다. 그렇기에 오디아르의 인간성은 거창한 선언이나 극적인 구원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끝없는 반복과 지루한 일상 속에서 미약하지만 지속적으로 깃드는 것이고, 이는 평범해서 엄숙한 결말의 함의다.

 

 

 

 

 

 

# 3.

 

찰리는 엘라이와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 대비를 선명하게 하는 인물이다. 그는 폭력을 운명으로 체화한 사람처럼 보인다. 거칠고 충동적인 성격, 절제되지 않은 언행, 술에 대한 탐닉은 모두 불안정한 내면으로 소집된다. 그러나 감독은 그를 단순히 폭력적인 인물로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고통과 나약함을 은폐하기 위해 폭력에 의존하는 인간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소진시키는 존재로서 그려진다.

 

폭력을 행사할 때면 카메라는 이전까지의 안정감을 포기하고 뒤따르며 흔들리고, 때로는 급격히 줌인하거나 역으로 멀리 무심하게 방치한다. 찰리가 술을 마시고, 폭행하고, 실수할 때마다 쾌감을 허락하는 대신 뒤에 남겨진 공허를 응시하는 것에 집중한다. 총성의 순간에조차 호아킨 피닉스의 얼굴에는 승리 대신 짧은 혼란과 지친 비애가 스쳤다 가려지길 반복할 뿐이다. 특히 동생의 내러티브는 과거로부터의 도피라는 테마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형이 그러한 것처럼 폭력은 찰리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세계의 유산이다. 감독은 이 역시 노골적인 회상 장면 따위로 설명하지 않고 형제간의 사소한 관계 속에 조심스레 녹여낸다.

 

엘라이가 평범한 삶을 희망한다면 찰리는 그 가능성 자체를 조소한다. 세계는 이미 망가진 것이고, 자신 또한 그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이 절망감이야말로 찰리를 더욱 파괴적이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그럼에도 형제의 곁에 의존하게 만든다. 폭력과 애정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찰리는 종종 엘라이를 공격하지만 엘라이 없이는 자신도 버틸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일련의 복합적 감정은 영화를 지배하고 있는 잔혹한 대립과 쓸쓸한 연대라는 이중적 풍경의 정체다. 절정에 이르러 찰리가 붕괴될 때 영화는 그를 비난하지도 구제하지도 않는다. 담담하게 기록할 뿐이다. 찰리의 몰락이란 마치 예정된 자연법칙인 것처럼 말이다.

 

 

 

 

 

 

# 4.

 

영화는 시스터스 형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그 경로에는 두 개의 조용한 대안이 병행한다. 존 모리스와 허먼 커밋 웜이다. 이들 역시 폭력과 탐욕에 얼룩진 세계 속에서 다른 삶을 모색하려는 인물로, 형제와 대조됨으로써 영화의 주제의식을 더욱 확장시킨다.

 

제이크 질렌할이 연기한 존 모리스는 세련된 중재자다. 깔끔한 차림과, 절제된 언행, 신사적인 예의는 짐짓 그가 살고 있는 세계의 잔혹성과 유리된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 역시 청부업자이긴 마찬가지고 폭력의 구조를 떠받치는 부품에 불과하다. 파트너를 구하려는 시도조차 완벽히 성공하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못한 채 파멸한다. 따라서 모리스의 세련됨은 철학적 신념이 아닌 생존의 방식일 뿐이다. 폭력에 순응하면서 그것을 미화하려는 또 다른 얼굴에 불과하다.

 

허먼 커밋 웜은 급진적인 가능성을 상징하는 혁명가다. 서부의 약탈과 사적 이익을 공동체의 협력으로 바꾸려는 이상을 품고 있는 인물이다. 미지의 화학 공식을 통해 약탈 경제를 뒤흔들 힘을 손에 넣고 그것을 공동체를 위해 쓰려한다는 점에서 비범하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 이상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를 숨기지 않는다. 금광을 얻기 위해서 강을 오염시키고 이는 곧 자신과 컴퍼니의 공멸로 이어진다. 그의 죽음은 서부 개척 역사의 새로운 변주가 아닌 대안적 삶을 꿈꾼 자가 현실에 의해 압사당한 것과 같다. 엘라이와 찰리는 존 모리스와 허먼 커밋 웜과 함께 하며 대안적 가능성을 마주하지만 평화는 찰나일 뿐이다. 결국 가능성이 허물어진 곳에서 살아남은 것은 폭력뿐이다.

 

영화는 부서진 꿈과 실패한 시도의 잔해를 담담히 응시하되 함부로 구원이나 이상을 제시하지 않는다. 세계는 변하지 않고 어쩌면 변할 수 없다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세계를 바꾸려는 시도가 고작 단 한 번의 충동과 실수로 허망하게 좌절되는 모습 뒤로, 그럼에도 희망을 꿈꿀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순을 비장하게 대비시킬 뿐이다.

 

 

 

 

 

 

# 5.

 

감독은 엘라이와 찰리를 각자의 철학을 대변하는 인물로서 전시하는 것을 넘어, 관계에 주목한다. 형제는 종종 투박하고 공격적이나 삐걱거리는 대화 속에서조차 어긋난 애정을 반복적으로 포착한다. 전통적 서부극에서 형제는 외부의 적과 싸우기 위해 결속하는 전우인 것과 달리, 시스터스 브라더스에서 형제는 서로가 가장 큰 상처를 입히는 존재다. 이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보호하면서 동시에 파괴한다. 폭력은 세계를 지탱하는 언어이자 저주이며, 동시에 그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갈망 역시 함께 뒤엉킨다. 영화가 끈질기게 응시하려는 인간의 본성이다.

 

결말에서 형제는 폭력의 세계로부터 이탈한다. 이전의 과정이 허망할 만큼 조용한 귀향이다. 결과적으로 모험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고 세계를 변혁시키지도 않았다. 단지 지친 몸과 원점으로의 회귀뿐이다. 그러나 이 회귀는 단순한 패배나 순환 또한 아니다. 감독은 집으로 돌아간 형제의 몸짓과 표정 속에 이전과는 다른 뉘앙스를 심는다. 폭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간신히 희망을 붙드는 손길이다. 찰리와 엘라이는 여전히 같은 공간 안에 있지만, 더 이상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 엘라이의 얼굴에는 조심스러운 희망이 스치고, 찰리의 얼굴에는 피로와 체념이 드리운다. 둘은 어쩔 수 없이 함께 있으면서도 이미 서로 다른 세계에 발을 디딘 셈이다. 영화는 이 어긋남을 끝까지 애써 봉합하지 않는다. 그저 긴 침묵과 느린 리듬을 통해 화해하지 않는 세계를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

 

감독은 끝까지 인간에 대한 비관과 신뢰 사이에서의 균형을 유지한다. 폭력의 유산은 쉽게 청산되지 않지만 변화의 희망이 완전히 부정되지도 않는다. 시스터스 브라더스는 이 불안정한 경계 위에서 끝내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만을 아슬아슬하게 남긴다. 영화는 조용히 제안한다. 세계는 여전히 폭력적이고, 구원은 거의 불가능하며, 희망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미약하다. 그러나 그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 이 미세하고 흔들리는 믿음이야말로, 시스터스 브라더스가 최종적으로 남기는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의미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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