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모든 작위에 대해 크기는 같고 방향은 반대인 부작위가 존재한다.
정수진 감독,
『바질과 데이지 :: Basil and Daisy』입니다.
# 1.
성당 문을 빼꼼 들여다보는 오프닝은 안정적이다. 어색한 소녀는 이내 인자한 인상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풀어놓는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겪은 화자의 내적 성찰임을 표현하는 작품들의 익숙한 플롯이다.
'오이를 붙이고 있었어요, 오이를.'
작품의 인상을 결정하게 될 첫 대사는 힘준 티가 너무 나서 어색하다. '아, 그전에 말씀을 드리면 저는 엄마랑 단 둘이 살아요, 3년 전부터. 아빠는 돌아가셨구요, 되게 오래 아프셨거든요. 그래서 준비를 했었어요, 예상했던 이별이었으니까.' 로 이어지는 도치 4연타가 어색함을 한껏 증폭한다. 반면 마지막 대사는 나쁘지 않다. '저는 오늘 엄마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왔어요.' 엄마의 죄라는 건 무엇일까, 그것을 왜 딸이 대신 용서받으려 하는 걸까는 영화의 핵심으로, 이후의 이야기에 대한 관객의 호기심을 잡아채기에 나쁘지 않은 스타트다.
애교쟁이 엄마의 연애와, 능청스러운 엄마 애인의 캐릭터, 녹록잖은 운전면허 연습 등이 조급하지 않아 편안하게 묘사된다. 특히 딸 노해 역의 심해인은 마치 자기 이야기인 듯 연기가 좋다. 퉁명스러움으로 밖엔 표현하지 못하는 질투심과, 당혹스럽지 않은 척 애쓰는 사람의 어색한 여유, 놀리는 어른들의 장난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리액션 모두 특별히 유치하지도 특별히 엄숙하지도 않아 무리 없이 드라마에 안착하게 한다. 접촉사고는 살짝 억지스러운 감이 없잖아 있지만, 주차를 보여주는 장면은 현학적인 표현을 빌리지 않으면서 말하고 싶은 뉘앙스를 전달하기에 훌륭하다. 장면을 마무리하며 감독 본인의 감성에 취하는 대신 의뭉스러운 능청을 뽐내는 것도 능숙하고 말이다. 다만 시퀀스의 성격을 관객에 앞서 미리 결정해 손에 쥐어주는 듯한 사운드 활용은 작위적인 감이 있다. 두어 차례 등장하는 노해의 친구는 독백을 시킬 수 없었던 주인공의 대사를 받아주는 등 기능적이기만 한 캐릭터라는 게 너무 티가나 위화감이 크다.
# 2.
'교통사고가 났는데 갑자기 맹장이 터졌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억지스러운 전개다. 애인을 원망하면서 보호자 동의도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조작하기 위해 덧붙였다는 게 너무 노골적이다. 교통사고 없이 엄마의 맹장만 터지면 연락을 못 받은 노해의 탓이라 자책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교통사고로 인해 위험해진 상황이면 응급 치료에 보호자 동의가 필요치 않았을 테니까.
상황 자체가 억지스럽다 보니 뒤늦게 수술실로 달려온 노해의 분노도 설득될 수 없다. 보호자가 되어줄 수 없지 않냐는 비난인데, 이 감정이 설득되려면 두 사람이 최소한 사실혼 관계여야 옳다. 반면 영화 속 상황은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커플일 뿐이다. 두 사람이 동성이 아니라 이성이었다 하더라도 보호자 노릇은 딸이 했어야 한다는 사실이 달라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시야를 보고 행동하는 것도 보험을 믿고 하는 건데 이건 없는 보험이잖아요.' 같은 은유는 수술 중인 엄마를 기다리는 딸이 하기엔 어색한 말이다. 뒤로 주인공의 고해성사가 들린다. '그렇게 끊겼어요, 저 때문에. 제가 그냥 밟아버렸거든요, 액셀' 이 정도면 주인공은 말을 뒤집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린 게 틀림없다.
병실에서의 장면은 또 좋다. 노해와 엄마 모두 특별히 격앙되거나 특별히 모지지 않게 대화하는 모습이다. 노해는 스스로 엑셀을 밟았다 말하듯 자신의 성급함을 생각하며 엄마의 감정에 서서히 다가가고, 감독은 그것에 충분한 시간과 거리를 투자한다. 이를 은유하는 옆자리에 누워 쓴 선글라스 역시 썩 낭만적이다.
# 3.
다시 오프닝의 고해성사가 이어진다. 성녀의 이름이자 세례명은 마르가리타. 마르게리타는 바질 올린 피자의 이름이라는 위트를 제외하면 사실 내용이 없다. 막연한 사랑에 대한 예찬이 전부다. 이렇게 끝나버리면 관객은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엄마의 죄라는 건 무엇인가. 이 고해성사를 통해 노해가 얻은 변화란 무엇인가. 질문에 확신을 주지 못하면 결국 관객은 마르게리타를 활용한 말놀이 밖엔 의미를 찾지 못한다.
결국 화자의 독백을 전재하기 위해 고해성사라는 상황을 덧붙이고, 고해성사에서 세례명을 가져오고, 그 세례명으로 마리게리타 말놀이를 한 다음, 다시 바질과 데이지라는 제목을 추출하는 식의 사고패턴은 너무 작위적이다. 실제 영화는 자신이 왜 바질과 데이지이며, 바질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데이지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명징하게 답하지 못한다. 정말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바질이 데이지 모양으로 핀 마르게리따를 연상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 걸까.
전반적으로 작위적인 덜컥거리는 순간들과 자연스럽고 풍부한 순간들이 계속해서 충돌한다. 어색하고 문어체적인 대사들과 감성적이고 일상적인 대사들이 뒤섞여 있다. 자연스러운 상황 연출과 작위적인 사운드가 접붙여져 있고, 편안한 전개들이 억지스러운 설정에 반복적으로 끊겨 나간다. 볼륨에 비해 양적으로는 풍부하지만 정작 화자의 존재감을 부각한 것치곤 주인공의 내적 성찰 과정이 부실하다. 작품에게 필요한 것은 피자보다는 다이어트로 보인다. 작위적인 장면들을 걷어내고 이야기가 가진 본연의 매력이 더욱 살아날 수 있도록 하는 다이어트 말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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