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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버려진 개의 희망이 움추러든다 _ 웬디와 루시, 켈리 라이카트 감독

그냥_ 2025. 5. 1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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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다정한 좌절 끝에 버려진 개의 희망이 움추러든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

『웬디와 루시 :: Wendy And Lucy』입니다.

 

 

 

 

 

# 1.

 

관객은 웬디를 모른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어떤 성격과 과거를 가진 인물인지, 어디서 출발해 어쩌다 그곳까지 흘러온 건지 알 수 없다. 알래스카에 있다는 통조림 공장은 어떤 곳인지 알 수 없고, 그곳에 찾아갈 수 있을지, 찾아간다 해서 미래를 꿈꿀 수 있을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웬디를 안다. 그녀는 여행이 시작된 곳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한적한 마을에 발이 묶였다. 숙식을 해결하던 낡은 차는 완전히 망가져버렸고, 수중에 500불 남짓이 전부라 파산할 위기에 놓였다. 그 어떤 자격도, 주소도, 전화도 없다. 유일한 혈육은 무슨 이유에선지 자매를 경계한다. 배가 고프지만 떨어진 사료가 더 고민스러운 그녀는, 손에 쥔 사과를 내려놓고 사료 통조림을 훔치려다 점원에게 붙잡힌다. 인계받은 경찰은 마트 앞에 메어둔 루시를 인지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 돌아온 웬디는 결국 루시를 잃어버린다.

 

영화에는 내내 별다른 사건이 없다. 언제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차가 우연히 여기서 망가졌을 뿐이다. 경찰서의 지문인식기가 우연히 말을 듣지 않았을 뿐이다. 루시는 악독한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사라졌던 것에 불과하다. 유기견 보호소는 버스를 타지 않고선 갈 수 없을 만큼 애매하게 멀었을 뿐이고, 닫힌 정비소는 견인하지 않고선 방문할 수 없을 만큼 애매하게 가까울 뿐이다. 감독은 잡화점에서 물건을 훔치려다 붙잡혔다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이고 건조한 묘사만으로 일관한다.

 

 

 

 

 

 

# 2.

 

심지어 누구도 가혹하지 않다. 차들이 자기 갈길을 달리고 기차가 정해진 노선을 달리듯 세상은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 아니, 굳이 구분하자면 오리건의 사람들은 친절하다. 마트의 직원조차 얄미울지언정 잘못이라 말할 수는 없다. 경찰도 그녀에게 특별히 무례하거나 고압적이지 않고, 청구되는 벌금에도 아무런 감정은 없다. 폐깡통을 주워 푼돈을 버는 다른 빈민들도 별다른 질투 없이 대부분 다정하다. 처음엔 주인공을 몰아내는 듯했던 고령의 경비원은 영화 내내 그녀의 곤란을 살피고 기꺼이 도움을 건넨다.

 

유기견 보호소의 직원도 친구를 잃은 웬디의 사정에 성실하다. 잃어버린 루시를 찾는 전단을 붙이는 동안 누구 하나 방해하지 않는다. 정비소의 사장은 손님의 반응을 살피더니 견인비를 깎아주고, 부탁하지 않은 부분까지 차를 들여다본 후 정직하게 조언한다. 공원에서 잠자는 웬디에게서 무언가를 훔치려던 부랑자는 분명 위협적이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불쌍한 웬디를 본 후 하는 것이라곤 현실을 토로하는 것이 전부다. 공용 화장실에서 씻고 갈아입고 우는 웬디를 누군가 나타나 쫓아내지도 않는다. 하물며 웬디는 잃어버린 루시를 찾는다. 루시를 보호하고 있던 사람은 그녀의 눈썰미에 따르면 좋은 사람처럼 보인다. 마당 딸린 집을 가진 그는 아마도 루시를 잘 돌봐줄 것이다.

 

 

 

 

 

 

# 3.

 

그럼에도 웬디는 처절하게 침몰한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고 나아가기엔 너무 까마득한 웬디는 내내 걸어 다니듯 분투하지만, 스스로 선택하며 저항하고 있다는 건 착각일 뿐이다. 다른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그녀는 홀로 멈춰 있고, 멈춰 선 차 안에서의 개인적인 좌절조차 밖을 지나는 아이들에게 훤히 들여다 보인다.

 

감독의 영화가 특별한 것은 웬디의 몰락에 그 어떤 불운한 사건도, 표독한 악당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추락한 것은 그저 세상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세상으로부터 부정당한다 느끼는 사람의 단절감. 건조한 철조망과, 빼곡한 나무들과, 거친 열차의 움직임으로 은유된 경계, 그 너머에 버려진 웬디라는 이름의 불쌍한 개 한 마리다. 그렇기에 마지막 장면은 웬디가 루시를 버리고 떠나는 씬이 아니다. 오히려 마당 딸린 집의 울타리 안에 들어간 루시는 웬디의 성공한 모습으로, 웬디가 버려진 것이다. 유기견 보호소의 웬디가 루시가 되는 것을 꿈꾸는 영화. 누구도 특별히 가혹하지 않고 누구도 특별히 부당하지 않았음에도 일관되게 소외되는 젊은이의 모습은 미국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잔인한 질문이다.

 

 

 

 

 

 

# 4.

 

내내 오리건의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에 마땅하다. 모두가 도리를 다했을 뿐이지만 시스템의 마땅함은 시스템 안에 있는 사람들, 차와 집을 가진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마땅한 시스템은 그 안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지 못한 몇몇의 사람들에게 그토록 가혹하다. 시스템 밖의 사람들에게 시스템의 합리성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저 멀리 기약 없는 알래스카의 일자리를 위해 눈앞의 루시를 포기해야 하는 사람의 아이러니다.

 

그럴듯한 시스템은 밖에서 봄으로써 그 모순이 폭로된다. 마트의 직원은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혹하다. 신선한 사과가 한가득 쌓여있는 마트 옆 교환소에는 폐품을 푼돈으로 교환하려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가난에 관심이 없던 공권력은 가난한 자를 추적하는 것에는 더없이 성실하다. 젊은이는 일자리가 없고, 은퇴 연령의 경비원은 비어있는 주차장을 하루 종일 멍하니 서서 바라보는 게 일이다. 텅 빈 주차장에 있던 차가 공용도로로 옮겨진다 해서 달라질 것은 없지만 규칙이 그러하니 그러해야 한다. 정비사는 고칠 수 없는 자동차를 끌고 오는 값을 받고, 고칠 수 없는 자동차를 버리는 값을 다시 받는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부조리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악당이 아니라는 것이다. 친절한 사람들이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루시를 찾았다는 전화, 내내 전화를 빌려주던 경비원은 귀중한 돈을 웬디의 손에 쥐어준다. 가계부를 정리한 웬디는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차를 고치고 루시를 찾으면 다시 길을 나설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희망은 찰나에 그친다. 차는 고칠 수 없고 그렇다면 루시와도 헤어져야 한다. 혼자 열차에 몸을 실은 웬디는 오프닝에서 들리던 콧노래를 부른다. 열화 된 희망이다. 언젠가 시스템 안에 편입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시스템 안에 편입될 수만 있다면 루시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하지만 영화를 지켜본 우리는 그 희망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 직감적으로 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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