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이야기가 이미지와 뉘앙스를 떠받치지 못한다.
에드워드 노튼 감독,
『머더리스 브루클린 :: Motherless Brooklyn』입니다.
# 1.
지금의 뉴욕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 시작을 탐구하려는 영화의 시선은 거침없는 제목처럼 서늘하다. 에드워드 노튼의 1950년 맨해튼은 대립하는 양면성과 그로 인한 고독감으로 요약된다. 풍요와 빈곤이 대립하고, 개발과 파괴가 충돌하는 뉴욕. 사랑과 죽음이 공존하고, 신용과 배신이 교차하는 브루클린. 낮은 자본과 다투고 밤은 낭만에 물드는 도시와, 이를 배회하는 외로운 개인들의 시대라고 말이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내외면이 유리된 모두는 영화 내내 고독하다. 이들은 빠짐없이 뉴욕을 모자이크 하는 조각이라는 면에서,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의 정체성이라는 것조차 결국 사람에 의한 것이다.
주인공은 지적이고 사려 깊지만 그것을 오해하게 만드는 투렛 증후군 환자다. 믿었던 동료는 부모와 다를 바 없는 멘토의 아내와 외도하고, 정의롭다 믿었던 멘토는 협박으로 돈이나 뜯는 협잡꾼이었음이 밝혀진다. 스스로 능숙함을 과시하던 기자는 자신의 신분이 팔려나가는 줄 모른다. 실패한 건축가는 형의 표독스러움을 저주하면서도 비전과 실행력을 동경하며 복종한다.
맹목적인 계획가 모세는 당대 뉴욕의 비전을 의인화한 캐릭터다. 동생이 증언하는 것처럼 자신의 비전이 실현될 수만 있다면 햄치즈샌드위치만 먹어도 만족할 이상주의자로, 그의 정체성은 화려한 사무실에 군림하는 것이 아닌 지하에 위치한 고독한 수영장이다. 개발론자들을 악당으로 활용하는 일반의 영화들과 다른 것은, 이후의 번영이 증명하듯 그의 비전은 폭력적일지언정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그가 꿈꾸는 뉴욕은 통상 자본과 탐욕을 상징하는 공장이나 쇼핑몰 따위가 아닌 공원과 해변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 유산 위에서 오늘도 도심 속 자연을 누리고 있을 현대의 뉴요커들은 되려 그를 비호해야 하는 수혜자에 가깝다.
# 2.
내외면의 괴리와 그로 인한 고독감은 존재하지 않는 엄마의 함의다. 고통에 대비되는 안정과, 고독에 대비되는 연원이 결핍된 브루클린은 에드워드 노튼이 발굴해 낸 대도시의 고고학이다. 그리고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아버지는 어디에 있는가.
추리극의 형식을 빌린 영화는 살인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는 듯 하지만 본질적이지 않다. 이는 대단히 소극적인 결말을 통해 확인된다. 결과적으로 직접 사람을 죽인 사람과 공동의 이익을 훔친 사람 정도만이 겨우 단죄될 뿐이다. 메인 빌런이라 할 수 있을 모세는 원하는 대로 도시를 개발한다. 관객과 함께 실체적 진실을 탐구한 주인공은 그를 단죄하지도 단죄당하지도 않은 채 타협하며 물러난다.
결착에서 라이오넬은 로라의 안위와 출생의 비밀을 거래한다. 비밀을 사회 정의가 아닌 거래의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면에서 도입의 프랭크와 같은 것이다. 즉, 마지막 수영장에서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모세와 라이오넬이 아니라, 모세와 프랭크다. 엄마 없는 브루클린의 아버지들이다. 아내를 겁탈한 남자(모세)와 아내를 기망한 남자(프랭크)는 나란히 앉아 서로의 치부를 덮는 평화를 거래한다. 지하 깊은 곳에 묻혀버린 부도덕한 거래의 유산 위에서 내일의 바다를 바라보는 모세의 딸 로라와 프랭크의 아들 라이오넬은 현대의 뉴욕에 자리잡은 원죄를 진 아담과 하와다.
# 3.
다만 그렇다 해서 마냥 과거를 비난할 수는 없다. 투렛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틱은 몇몇의 언어유희를 제외하면 if, 어쩌면이다. 매 순간마다 주인공은 if를 말하고 있고, 주인공을 지켜본 관객 역시 자연스럽게 매 순간 다른 선택을 탐구하게 되지만, 마땅한 답은 없다. 모두는 각자의 최선을 살아갔을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의 본질은 낡은 바에서 재즈를 듣는 것 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머더리스 브루클린을 욱신거리는 불안감으로 방황하는 것에 있다. 혹자는 박하게 평한다며 '도시를 걷는 것은 좋았다'라거나 '재즈를 듣는 것은 좋았다' 말하는 데, 그것에 본질이 있는 것으로 칭찬과 다르지 않다.
다만 이야기가 이미지와 뉘앙스를 충분히 떠받치지 못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관객인 내가 주인공과 함께 한다는 인상은 약하다. 파편적인 이미지가 감정의 고조로 연결되는 데 필요한 내러티브는 요소요소에서 덜컹거리거나 끊어져 나간다. 연출은 주제의식에 걸맞은 비장미를 선보이지도 자전적인 감상을 전달하지도 못한 채 나열되어 있으며, 특히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2시간 40분에 달하는 런타임 동안 템포는 지나치게 늘어진다. 주인공의 정신병은 작품의 강력한 개성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도구적으로만 활용된다는 것 역시 각본의 아쉬움이다. 출연진의 호연이 상당 부분 만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이유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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