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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Mystery & Thriller

비열한 망각에 복수하다 _ 복수는 나의 것,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그냥_ 2025. 1. 1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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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안식과 풍요에 숨은 비열한 망각에 복수하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복수는 나의 것 :: 復讐するは我にあり』입니다.

 

 

 

 

 

# 1.

 

박찬욱의 영화를 기대한 독자에겐 유감을 표한다. 이 글은 1979년작에 대한 이야기다. 송강호와 신하균이 열연한 박찬욱의 그것은 정직하게 복수에 대한 것이었던 반면,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복수와 무관한 연쇄 살인에 대한 것이다. 실제 주인공 에노키즈와 대부분의 희생자들 사이에는 뚜렷한 원한이 없고, 심지어 느슨하게나마 호의를 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희생자들은 하나같이 선량하고 무고한 사람들이며, 이는 경찰에 붙잡혀 스스로 말하듯 에노키즈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감독은 자신의 이야기를 '복수는 나의 것'이라 이름 붙인다. 이 이야기는 복수와, 복수의 주인에 관한 것이며, 그렇기에 영화를 본다는 것은 결국 누구에게 무엇을 복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명작이 그러하듯 모든 시퀀스가 빼어나지만 그럼에도 작품의 실마리는 과거의 전말이 연출된 시퀀스에 있다. 가톨릭 신자이자 어부였던 아버지 시즈오가 가톨릭 박해로 배를 빼앗겼던 기억이다. 해당 장면을 제외하면 다른 유년기가 특별히 묘사되지 않는다는 면에서, 감독이 스스로의 입으로 '이 사건이 이후의 모든 사단을 만든 것'이라 선언한 것과 같다. 따라서 영화에서 에노키즈가 '복수'하는 대상 역시 해당 시퀀스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 장면 속엔 총 네 종류의 인간이 존재한다. 부조리한 체제를 상징하는 천황을 등에 업은 순사, 체제의 폭정을 내 일이 아니라며 방관하는 주변인, 폭력 앞에 신념을 굽힌 나약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 형편없이 제압당하고 만 무능력한 에노키즈다. 이들 모두는 분기탱천해 몽둥이를 든 어린 에노키즈를 좌절하게 하는 존재로서, 뒤돌아서 모래를 걷어차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에노키즈가 이후 복수하게 될 사람들이다.

 

 

 

 

 

 

# 2.

 

시즈오는 배를 빼앗긴다. 배를 빼앗는 주체는 천황이고(스스로 천황에게 바쳤다 선언하라 강요하는 대목은 의식적이다.) 시대적 맥락을 감안하면 자연스럽게 제국주의와 연관된다. 몇 차례 반복되는 조선인과 관련된 코드 역시 제국주의적 뉘앙스를 보강한다. 첫 살인사건에서 조선인이 술 마시고 퍼질러 있는 것 아니냐는 퉁명으로 한번, 김장을 담그는 하루 모녀의 과거에서 또 한 번이다.

 

방관자들은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소극적으로 전쟁을 지지함으로써 평화를 얻은 사람들이다. 부당한 안식은 '결혼'으로 은유된다. 비정한 연쇄 살인마의 이야기 뒤로 혼인과 관련된 코드가 끊임없이 병렬적으로 흘러가는 이유다. 가정을 가지면 철이 들 것이라 생각해 맞선을 준비했다는 대목이라거나, 맞선 당일 임신한 카즈코가 찾아와 맞선을 가로막는 대목, 아내와 잠자리를 가진 역무원에게 돈을 받아내는 장면 따위는 감독이 결혼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추측케 한다. 반면 에노키즈는 성적인 인물로 매일같이 창녀를 불러 잠을 자는데, 이때의 성욕이란 결혼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내재된 폭력성으로서의 원죄와 같은 것이다.

 

카즈코는 아이들을 데리고 산으로 들어간다. 이후 시즈오는 며느리와 손주를 데려오는 데 이 시점에서 카즈코는 에노키즈가 아닌 시즈오의 안식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역할이 이전되고, 감독은 이를 연정을 품는 식으로 표현한다. 시즈오는 애써 카즈코를 거절한다. 수동적인 기여자로서 죄책감이 안식을 가로막기 때문이고 이때의 내적 갈등은 신앙적인 고독감으로 은유된다. 영화에서 가톨릭은 구체적인 종교라기보다는 인간다움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전쟁은 일본인으로 하여금 인간다움을 시험하는 것이었고 이를 저버렸다는 것이 감독의 지적이다. 결말에서 에노키즈는 파문되고 시즈오 역시 파문된다. 둘 모두 각자의 위계에서 결국 인간다움을 저버린 비겁자이기 때문이다.

 

 

 

 

 

 

# 3.

 

뱀장어 양식장에서 하루의 어머니는 "바깥세상이 변했다." 말한다. 에노키즈는 "그래요. 세상은 매일 점점 더 나빠지고 있죠."라 답한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다는 것일까. 무엇이 나빠졌다는 것일까.

 

영화의 전개에서 명확하게 점진적 변화를 보이는 것은 에노키즈를 포위하는 수배전단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자신이 체포될 가능성이 높아지니 나쁘다는 것일까 싶지만 부자연스럽다. '힘들다' 말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나쁘다' 말하는 것은 어색한 것이고, 에노키즈는 이기적인 인물일지언정 억지스러운 인물은 아니다. 살인마를 추적하는 수배전단이 늘어가는 것은 에노키즈의 악행에 대한 체제의 평가가 명확해지고 있고, 그것이 전쟁의 방관자들에게까지 확산되고 있다는 것과 같다. 이는 과거 박해하고 갈취하고 살인했던 일본과 이를 방조하던 일본의 위선이 증가하는 것으로 그것은 과연 '나쁜 것'이다. 일본이 나빠질 수 있었던 것은 망각했기 때문이다. 망각은 비겁함의 정수와 같은 것으로, 여기서의 망각이란 개념은 엔딩의 인상적인 연출로 이어진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시공간의 과격한 운동이다. 에노키즈가 올라탄 페리엔 수많은 여행객들이 올라타 있다. 중간중간 손쉽게 도쿄를 다녀왔다 말할 수 있는 건 신칸센이 깔렸기 때문이다. 요소요소마다 수많은 네온사인들과 풍부한 물자들과 화려한 극장이 등장하는 데 이들 모두 전후 고도성장기의 풍요를 표현한다. 플롯은 시간선을 과장한다. 에노키즈는 고작 78일을 도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복잡한 플롯으로 인해 훨씬 긴 시간을 이동한 것처럼 느낀다. 같은 시간(런타임) 동안 더 먼 거리를 이동한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은 그만큼 속도가 빠르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감독은 일련의 시공간적 변화를 통해 시대의 활력을 표현하고 있고 그것이야 말로 방관자들 역시 공범이라는 확실한 증거다. 평범한 희생자들은 모두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체제의 부조리에 방관한 대가로 물질적 풍요와 결혼이란 안식을 얻은 부역자로서 복수의 대상자다. 에노키즈의 살인이 '복수'인 이유다.

 

 

 

 

 

 

# 4.

 

살인을 통해 체제와 방관자에게 복수한 에노키즈는 시즈오와의 면회에서 아버지에 대한 깊은 원한을 내비친다. 무력하게 배를 빼앗기면서도 저항하는 자신을 오히려 혼낸 아버지에 대한 복수이자, 그런 아버지에게 대항하지 못한 자신을,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자신을 파괴함으로써의 복수다. 제목인 Vengeance Is Mine은 복수의 주체가 자신이라는 의미로도, 복수라는 것을 받아내는 것이 나라는 것으로도 이해된다. 죽은 변호사의 집에서 충동적으로 자신의 목을 조르는 장면은 에노키즈의 피학적 복수가 비장하게 삐져나온 순간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목 졸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없듯, 그조차 비겁한 것이다. 그는 자신을 증오함에도 공격하진 못한다. 시즈오가 이야기하듯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공격하지 못하는 비겁자이기 때문이다. 희생자가 하나같이 병약한 노인, 운전 중인 운전사, 연약한 부녀자인 것도, 먼저 상대를 기망해 방심하게 한 후 등 뒤에서 무기를 휘두르는 것도 그의 본질적인 비겁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대급부로 대학교수, 변호사 따위를 사칭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라거나, 살인 후 피를 소변으로 씻어내는 장면 역시 스스로의 남성성을 확인하고 싶은 미숙한 소년의 증거에 불과하다. 에노키즈의 모순은 불쌍한 하루를 해친 것은 다른 누구를 탓하더라도 본인이라는 것과, 끝내 자기 자신에 대한 복수를 자신이 가장 증오하는 체제의 손에 대신 맡긴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비열한가.

 

 

 

 

 

 

# 5.

 

결말에서 시즈오와 카즈코는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올라간다. 옆으로 수녀들이 교차해 내려온다. 비로소 인간다움을 외면하는 것으로,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망각의 상쾌함이다. 에노키즈가 죽고 시즈오의 아내가 죽은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기억의 풍화로서의 망각이다. 아래를 알 수 없는 곳으로 유골을 집어던지는 것은 망각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이전까지 대단히 현실적인 비장미로 일관하던 영화는 프리즈 프레임을 통해 떨어지는 유골을 허공에 붙잡는다.

 

빼놓을 수 없는 영화의 핵심 요소는 시선이다. 영화 내내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고 섹스할 때마다 누군가가 지켜본다. 관객의 시야 역시 계단 위에서든 창 넘어서든 훔쳐보는 식으로 자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역으로 훔쳐보는 사람을 발견하고 뜨끔하는 연출도 즐비하다. 지켜본다는 것은 망각과 대비되는 것으로 망각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작품의 엔딩은 표현은 상이할지언정 방향은 일관되는 것이다. 감독은 뼛조각을 붙잡음으로써 망각을 허락하지 않는다. 설령 에노키즈가 죽고 시즈오의 아내가 죽어 사라진다 하더라도 부도덕한 두 사람의 존재는 잊힐 수 없는 것으로, 감독이 인터뷰한 두 사람을 향한 '철퇴'의 실체다.

 

마찬가지로 설령 전쟁의 당사자가 죽고, 피해자가 죽고, 방관자가 죽어 사라진다 하더라도 부도덕한 일본의 역사 역시 잊힐 수 없다. 기념비적인 하드보일드는 비대한 자아가 자기 파괴적인 형태로 발현되어 버린 괴물의 폭주를 통해 무자비한 폭력과, 편리한 망각과, 역겨운 위선과, 초라한 비굴함에 복수하는 영화다. 영화를 즐기고 난 후 제목 속에서 복수를 소유한 '나'를 감독 자신이라 생각하면 그것대로 흥미롭다. 결과적으로 이마무라 쇼헤이는 스스로 에노키즈가 되어 자신이 속한 일본에게 반성이란 형태로 복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원히 망각되지 않을 완성도로 영원히 망각되지 않을 반성을 통해 자신의 모순에조차 가감하는 바 없이 지극히 예술가적인 방식으로 복수한 영화라고 말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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