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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Mystery & Thriller

신의 주사위 놀이 _ 똑똑똑, M. 나이트 샤말란 감독

그냥_ 2024. 8. 14.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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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뭐시 중헌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

『똑똑똑 :: Knock at the Cabin』입니다.

 

 

 

 

 

# 1.

 

언제 봐도 놀라울 정도로 거대한 바티스타와 그의 팔뚝만 한 귀여운 소녀의 만남으로 시작되는 영화, <똑똑똑>이다. 영화는 원천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떡밥과, 사실상 떡밥의 의인화나 다를 바 없는 인물들을 쉴 새 없이 던진다. 그렇다면 그렇구나 하는 수밖에 없는 일방적인 세계관과, 늘 관객보다 두어 발짝 앞질러가는 불친절한 전개는 언제나와 같은 샤말란이다.

 

인류의 운명을 거론하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침입자 무리, 단란한 가족 중 한 명이 희생해야 70억 인류를 살릴 수 있다는 우악스러운 설정, 피해자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 스스로 자해하는 아이러니, 작지만 구체적인 스릴러와 세계의 종말을 표현하는 지구적 스케일의 코스믹 호러의 대조는 영화의 큰 틀이다. 그 위로 오프닝의 곤충 채집과 뇌진탕, 입양 딸 웬의 구순구개열, 문제 될 것은 없지만 평범하지도 않은 동성애 부부, 각각의 인물을 짚어 구분하는 포커스 전환 따위가 더해지면 영화 절반이 지나도록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

 

 

 

 

 

 

# 2.

 

다소 복잡한 떡밥들을 한 꺼풀 걷어내고 나면 결국 세계의 원리란 이해할 수도 신용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풀숲에 살던 곤충이 웬의 손에 붙들려 유리병에 갇힌 것은 그 곤충이 잘못해서도 특별해서도 아니다. 우연히 그곳에 인지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가 강림했을 뿐이고, 그 존재가 우연히 그런 선택을 했을 뿐이다. 세 가족은 왜 하필 자신들이냐며 이유를 동성애에서 찾으려 하지만 이유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개인의 발악에 불과하다. 이후로도 엔드루는 어떻게든 논리적으로 상황을 설명하려 하지만 부질없고, 그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부부의 비극으로 귀결된다.

 

웬이 구순구개열을 가지고 태어난 것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 우연은 중국의 어느 병원에 버려지는 우연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어느 백인 동성애자 부부에게 입양되는 우연으로 이어진다. 에릭과 앤드루가 동성애자로 태어난 것 역시 이유는 없다. 부모는 아들의 남자친구를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그 둘이 그냥 그런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두 사람은 결혼을 앞두고 서로의 단점을 이야기하는 데,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이유 없이 사랑한다.

 

세 가족이 선택받은 것에 이유가 없듯, 레너드와 에드리안과 사브리나와 레드몬드가 예지를 듣게 된 것에도 이유는 없다. 다른 세 사람과는 초면이지만 레드몬드와 악연이 있었던 것 역시 우연일 뿐이다. 질문의 시간이 될 때마다 네 명의 침입자는 질문자로서 희생하는 데 희생의 이유도, 순서의 이유도 알 길은 없다. 영화의 제목은 노크다. 신의 주사위 놀이는 특별히 파괴적이지도 특별히 과시적이지도 특별히 무례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담담하고 단호하게, 무엇보다 잔인하게 찾아온다.

 

 

 

 

 

 

# 3.

 

영화는 세계의 원리를 이해할 수 없는 개인의 무력함이다. 피해자들은 순식간에 제압되어 손발이 결박되지만, 가해자 역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눈앞에 재난을 맞닥뜨린 tv 속 사람들 역시 그러하다. 집채만 한 해일 앞에서, 퍼져가는 바이러스 앞에서, 추락하는 비행기 앞에서 미미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악의 없이 순수한 웬의 손에 붙들린 곤충처럼, 초월적인 세계의 작동 앞에 인간은 더없이 초라하다.

 

세계의 원리를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인간이 기댈 것은 결국 관계뿐이다. 레너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임에도 돌보는 학생들을 위해 희생을 선택한다. 에드리안은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사브리나는 간호사로서의 소임으로 희생을 선택한다. 전과자 레드몬드조차 큰 틀에서의 인류애의 실천으로서 희생을 회피하지 않는다. 결말에서 에릭은 희생을 선택하는 데 그 장면에서 엔드루는 세계의 원리에 대한 믿음이 아닌, 에릭에 대한 믿음으로서 그의 희생을 지지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 속에서 침입자가 노크하는 오두막은 새장을, 마지막 웬과 엔드루의 나무 위 별장은 새집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종말에 벗어났음을 상징적으로 대비한다. 라디오 음악을 끄고 켜는 두 부녀의 앤딩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관계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 앞에 무기력한 개인을 다룬다는 면에서도, 어린 소녀가 맹활약한다는 면에서도 <곡성>이 연상되는 맛이 있는 데, 차별점을 짚자면 곡성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똑똑똑은 믿기지 않는 것을 다룬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 4.

 

그리고 이 모든 작동은 코로나 팬더믹과 시의적으로 연관된다. 과학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코로나가 생겨난 이유도, 막을 방법도, 하필 나와 내 가족이 걸려야 했던 이유도,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알지 못한 우리다. 해변 나들이를 떠날 수 없고,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하늘을 날아야 할 비행기가 뜨지 못했음에도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사소한 개인들의 관계에 대한 믿음, 그 믿음에 근거한 선택이라는 것이 샤말란의 진단이다.

 

완성도의 측면에서 보자면 장단이 있다 하겠으나, 이쯤 되면 샤말란의 영화를 장단이라 해야 할지 스타일이라 해야 할지 모호한 것도 사실이다. 특히 특유의 떡밥질은 언제나처럼 피곤함과 혼란스러움을 유발하지만, 이번 작품의 경우 그 '이해할 수 없음으로 인한 혼란스러움'이 주제이니만큼 설득되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메시지를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다소 앙상하다는 것, 영화 내내 저항하던 가족의 마지막 희생에 대한 설득이 빈곤하기에 감독의 메시지는 주장될 뿐 감각되지 않는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몇몇의 액션 씬들은 억지로 분량을 늘리기 위한 것인 양 겉도는 느낌도 있다.

 

그나마 이견이 없는 것은 연기다. 전반적으로 좋은 연기를 하는 와중에 레너드 역의 데이브 바티스타는 입체적인 드라마적 배역도 충분히 소화가능한 배우임을 증명한다. 웬 역의 소녀 크리스틴 쿠이 또한 폭력의 한가운데 놓인 쉽지 않은 배역을 훌륭히 소화한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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