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이유 없이 우뚝 선 희망의 탄생
매트 리브스 감독,
『더 배트맨 :: The Batman』입니다.
# 1.
어둠 속의 히어로는 세 가지 의미다. 스스로 복수(분노의 어둠)의 화신을 자처한다는 것, 자경단이 아닌 범죄자(윤리의 어둠)로 받아들여진다는 것, 가문과 고담의 진실을 모른다(무지의 어둠)는 것이다. 그는 범죄자에겐 공포의 존재일지언정 경찰에겐 핼러윈 코스튬의 또 다른 범법자에 불과하다. 배트맨은 자신을 Vengeance(복수)라 선언하지만 정작 무엇에 대한 복수인지, 누구를 향한 복수인지조차 모른다. 이전의 그 누구보다 초췌하고 미성숙한 로버트 패틴슨의 배트맨은 어둠 속에 갇혀버린 무지의 존재다.
배트맨은 복수자로서 고담의 진실을 갈구한다. 캣우먼이 건네받은 카메라의 붉은 화면은 브루스의 눈에 비친 분노와 복수의 고담이고, 그것을 굳이 렌즈의 형태로 연출한 것은 자기 눈으로 확인한 명징한 진실에 대한 갈증을 의미한다. 리들러도 다르지 않다. 그에게도 위선과 부패의 고담은 거대한 거짓말로서 복수의 대상이다. 영화 내내 리들러가 낸 수수께끼를 배트맨이 맞추는데, 그 과정에서 리들러는 불쾌해하기는커녕 희열을 느낀다. 자신과 같이 고담의 진실에 다가가고 있는 '동지'임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배트맨은 추종자들과 마찬가지로 리들러에 협조하는 듯한 모양새다. 마스크가 벗겨진 추종자가 자신을 Vengeance라 소개하는 대목은, 두 캐릭터 간의 강한 연결이다.
하지만 사실 둘은 끝까지 모른다. 진실을 안다 자부하는 리들러는 브루스 웨인 앞에서 브루스 웨인을 모른다. 리들러를 잡아내는 데 성공한 배트맨은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 배트맨과 리들러가 알고 있는 것은 붉은 눈에 왜곡된 고담의 파편에 불과하다. 리들러는 배트맨과 자신이 '아는 사람'으로서의 동지적 관계라 생각하지만 오해다. 오히려 둘은 모른다는 면에서 동지적 관계다.
# 2.
그럼에도 배트맨과 리들러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배트맨은 알면 알수록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배트맨은 문자 그대로 발로 뛰어 모른다는 것을 경험한다. 아버지 토마스 웨인과 어머니 마사 웨인을 모른다. 거액의 재개발 사업과 선거를 둘러싼 고담의 진실을 모른다. 팔코네와 알프레도의 엇갈린 증언에 토마스 웨인 살인 용의자는 알 수 없다. 펭귄의 트렁크에 실린 가방 중 어디에 돈이, 어디에 시체가 들어있는지 모른다. 셀리나의 아버지가 팔코네였다는 것도 전혀 몰랐다. 아캄에 갇힌 리들러에게 소리치는 장면은 바깥에 있는 배트맨이 좁은 감옥에 갇혀 꺼내달라 절규하는 것처럼 연출된다. 오히려 감옥에 갇힌 리들러는 여유롭고 말이다.
리들러는 알면 알수록 안다고 착각한다. 고담의 거짓말을 파헤쳐 진실에 도달했다 자신하고 있고, 이는 집안에 도배된 편집증적인 자료의 물량이 증언한다. 마지막 수수께끼에서 리들러는 배트맨에게 "생각보다 똑똑하지 않구나?" 도발하는 데, 그것은 오만의 상징이다. 클라이맥스 계획의 실패는 고담 시민을 몰살시키지 못한 것으로 인한 좌절이 아닌, 배트맨이라는 존재와 고담의 저력을 안다는 착각이 폭로됨으로 인한 좌절이다. 리들러의 사고는 미로 속에 숨은 쥐인 팔코네를 가로등 아래 세워둔 모습으로 은유된다. 밝고 하얀 가로등불 아래 선 죄인의 처단은 리들러가 생각하는 고담의 진실이다. 리들러의 완전하고 이분법적인 가로등 아래 폭력은, 배트맨의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붉은색 구명탄의 구원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 3.
배트맨은 이유를 찾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알프레도에게 웨인가 사람이냐 힐난하는 것은 주제넘게 나설 '이유'가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실제 토마스의 죽음 이후 알프레도가 모멸을 견뎌가며 웨인가에 헌신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그가 남았던 것은 웨인가엔 알프레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캣우먼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캣우먼을 걱정할 이유도 없고, 팔코네의 딸이라는 배경은 더욱 멀어지게 만든다. 하지만 배트맨은 캣우먼을 구원하고 캣우먼은 배트맨을 구원한다. 서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셀리나가 친구 아니카를 찾는 것도, 고든이 고담을 위해 헌신하는 것도 이유는 없다. 이유를 찾아 어둠을 헤매던 배트맨은 이유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존재를 서서히 깨닫는다. 희망의 이유도, 희망이 될 이유도 없었던 배트맨은 스스로 고담의 희망이 되기로 한다. 이유를 찾아서가 아니다. 자신의 팔을 간절히 붙잡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거짓된 이유 속에서 진실을 찾아 헤매던 그는 비로소 이유 없이 스스로 우뚝 선다. 진정한 배트맨의 탄생이다. 위험천만한 고압 전선에 대롱대롱 매달린 모습은 복수자로서의 브루스 웨인이다. 그는 시민들을 위협하던 복수를 가슴팍의 배터랭(배트맨으로서의 사명감)으로 끊어내고 어둠 속에서 아우성치는 시민들의 품에 몸을 던진다. 추락이라는 형식의 성장이고, 감독은 이를 마치 상승하는 듯 연출해 숭고함을 강조한다.
앤딩에서 캣우먼은 고담을 떠난다. 고담이 나아질 것이라는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배트맨은 그 보편타당한 사고를 뛰어넘음으로써 육체적으로만 뛰어난 존재가 아닌 정신적으로도 초월한 히어로가 된다. 앤딩의 배트맨은 어떤 합리적 근거에 입각해 고담이 나아질 것이라 예측하고 그 예측을 실현하는 존재가 아니다. 나아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중요하지 않다.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과 희망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 희망은 행해져야 한다.
# 4.
영화의 주제의식은 '선거'라는 환경과도 다시 밀접하게 이어진다. 선거는 어떤 이유에서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좋은 결과가 담보되어 있기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함도 아니고, 선거가 벌어지는 사회가 특별히 깨끗해서도 아니다. 그 자체로 희망이기 때문이다. 고담의 당선자는 자신에게 총알이 날아올지도 모른 채 연단에 오르지만, 총알이 날아온다 하더라도 연단에 오른다는 것이 중요하다. 테러리즘을 이겨낸 민주주의는 황폐화된 도시에서 희망을 연설한다. 당선자 벨라의 캐치프라이즈는 A Real Change, 진정한 변화다. 현실에 배트맨은 없지만 필요한 희망에 응답하는 진정한 변화는 스크린 밖의 현실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사족을 달자면 속편의 메인 빌런이 될 조커의 방향을 어느 정도 예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커는 어떤 식으로든 '희망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보다 고차원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괜히 조커가 내내 질문하던 리들러에게 역으로 수수께끼를 내는 것이 아니다. 배리 키오건의 탁월한 연기로 풀어낼 조커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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