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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한 낙원은 없다 _ 존 윅 4,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

그냥_ 2023. 6. 1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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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

『존 윅 4 :: John Wick Chapter 4』입니다.

 

 

 

 

 

# 1.

 

부제를 떼고 마침내 완성된 존 윅입니다. 분노라는 핵심 정서와 이를 작동시키기 위한 특유의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는 앞선 글에서 했으니 링크로 대신하도록 하구요. 마트 마감할인 같은 넉넉한 인심의 액션들과 수많은 오마주에 대해 이야기드리려면 스틸 컷을 따야 할 텐데, 역시 귀찮으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쯤 되면 그럼 넌 무슨 이야기를 할 건데? 싶으실 텐데요. 영화의 핵심을 관통하는 대사 한 줄로부터 파생된 이야기를 가볍게 나눠볼까 합니다. 그것은 바로 Without Rules, We live with the Animals. 우리말로,

"규율이 없다면 우리는 동물에 불과하니까."

 

 

닌쟈리 방방 _ 존 윅 시리즈,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

# 0. 연작의 신작이 나올 때면 기계적으로 예전 영화들을 몰아보게 되는데요. 이번엔 존 윅이군요. 최근 들어 매트릭스도 그렇고 백 투 더 퓨쳐도 그렇고 오래전 시리즈를 하나의 글로 뭉개서 수

morgosound.tistory.com

 

 

 

 

 

# 2.

 

키아누 리부스의 발연기도 가릴 겸 대사가 거의 없는 작품입니다만, 동시에 마초의 심장을 건드리는 명대사가 많은 시리즈이기도 합니다. 당장 본 편만 하더라도 그라몽 후작의 '한 가지 일을 대하는 방식이 모든 일을 대하는 방식이다.'라는 대사도 느낌 있었구요. 시마즈 코지의 '좋은 죽음은 좋은 삶 뒤에 온다.'와 같은 대사도 괜찮았죠. 극한의 명언충인 윈스턴은 말하는 족족 명대사라 일일이 꼽는 게 버거울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관통하는 한 문장을 꼽으라 한다면 역시나 위의 대사를 골라야 하겠죠.

 

킬러의 세계에서 규율은 절대적입니다. 파라벨룸 후반부 제로와의 오토바이 추격전에서 절체절명의 순간 콘티넨탈의 계단에 존이 손을 얹자 싸움이 중단되는 장면은, 그들의 세계에서 규율이라는 것의 권위가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테구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본 편의 결착 역시 규율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최고회의 결투'라는 점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죠. 영화가 규율에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에는 최고회의의 위력도 있습니다만, 일부는 윤리나 당위의 레벨에 닿아 있는 것처럼 묘사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특성을 상징하는 대사가 바로 "규율이 없다면 우리는 동물에 불과하니까"라는 한 마디인 것이죠. 말인즉, 킬러들은 스스로 짐승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규율을 지킨다는 건데요.

 

그런데 규율만 지킨다고 해서 이들을 짐승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요?

 

 

 

 

 

 

# 3.

 

생각해 보면 규율을 지킨다고 해서 짐승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짐승에게도 규율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거든요. 오히려 반려견에게 보호자의 규율은 절대적인 경우가 일반적이죠. 반려견이 충실하게 '앉아'와 '엎드려'를 지킨다고 해서 그들이 짐승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습이야 말로 짐승다움을 가장 잘 증명하고 있는 순간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존 윅의 세계는 짐짓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인간들의 세계인 듯 보이지만, 실상은 '야생의 짐승'들이 '길들여진 애완견'이 되기 위해 분투하는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구성원들 스스로 그것이 인간답다 착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죠.

 

매편의 클라이맥스마다 존의 현상금을 브리핑하는 장면들은, 마치 스포츠카의 엑셀레이터를 밟기라도 하듯 흥미진진하게 연출되는데요. 본질적으로 개껌 두 개 줄게. 싫어? 그럼 세 개 줄게. 옳지. 가서 물어와. 라며 놀리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액션이 벌어지는 환경들이 가면 갈수록 화려해지는 것도 마찬가지. 장르적인 효과도 물론 있겠습니다만, 스크린이라는 투견장을 내려다보는 관객 앞에 펼쳐진 짐승들의 싸움이라는 일종의 유희에 불과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놀림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충성스러운 킬러들은 자신이 죽을 곳을 향해 영화 네 편 내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것으로 세계의 모순을 성실히, 몸소 증명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정작 영화 속 '개'는 야생성을 대변하지 않습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신뢰나 위안 따위의 인간성과 관계성의 표상으로 쓰이고 있죠. 위상의 역전이라는 건데요. 개를 끌고 다니는 킬러들의 세계가 아니라, 개만도 못한 킬러들의 세계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바바 야가든 케인이든 사람들의 이름과 별명이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작품에서 정작 개들은 아무런 이름이 없습니다. 개만도 못한 킬러들은 감히 개에게 이름을 붙일 수가 없기 때문이죠.

 

 

 

 

 

 

# 4.

 

짐승만도 못한 킬러 일반을 대변하는 캐릭터는 바로, 미스터 노바디입니다. 이름은 특히 흥미로운데요. Nobody라는 말은 곧 Anybody라는 말과도 다를 바 없기 때문이죠. 실제 그는 나름의 특색과 사연을 가진 여타 캐릭터들과는 달리 영화 내내 일반의 액스트라 킬러들과 같은 행동 양식을 조금 더 유능한 모습으로 수행할 뿐입니다. 로비에서 전화를 받아 들고 수첩에 현상금을 끄적이는 모습은 여느 킬러들과 다를 바 없는 등장이죠.

 

후작과 노바디가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은 구체적 개인 간의 만남뿐 아니라 최고회의와 킬러 간의 관계를 대변합니다. 킬러들은 최고회의가 결정한 규율에 따르는 애완견에 불과하고, 이 같은 수직적 관계는 스스로 손을 찢는 장면으로 상징되는데요. 해당 장면은 후작이 케인을 휘파람으로 부르는 모습이라거나, 전편에서 장로를 찾아간 존 윅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바치는 장면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할 수 있겠죠.

 

노바디 역시 처음엔 여타 킬러들과 마찬가지로 아무 관계없는 존을 '규율'과 '현상금'만을 이유로 살해하려 합니다. 그러던 중 존에 의해 자신의 개를 구하게 되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는 데요. 개가 죽는 줄도 모르고 존을 노리는 자신과, 자신에게 노려진 존이 역으로 개를 살리는 아이러니에서 규율을 지키는 것과 무관하게 자신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후 존의 뒤를 따르던 노바디는 결말에 이르러 후작의 뚝배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정신적 각성에 도달합니다. 이를 테면, 개를 잃어버리며 이 모든 사단을 치르게 된 존 윅과 달리, 개를 잃지 않은 또 다른 존 윅이 탄생하는 순간인 것이죠.

 

 

 

 

 

 

# 5.

 

규율만 지킨다면 당신들은 짐승이 아니라는 최고회의의 말은 달콤한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세계의 가장 밑바닥을 떠받치는 원리가, 구성원에게 짐승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달콤한 낙원을 제공하는 거짓말이라는 면에서 일종의 매트릭스라 할 수 있을 텐데요. 그런 영화에 키아누 리부스와 로렌스 피시번을 캐스팅했다는 점은 재미 요소임과 동시에 매우 중요한 포인트라 할 수 있겠죠.

 

노바디의 각성이라는 결말은 존 윅이라는 개념을 죽이고자 했던 후작의 계획을 존 윅의 죽음과 무관하게 철저히 부정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최고회의의 지상 목표는 존 윅이라는 개인의 죽음이 아닌 거짓말에 속아 규율에 맞춰 움직이는 킬러들의 세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었고, 그의 존재가 단순히 패악질을 부리는 골칫거리가 아니라 구성원들로 하여금 시스템에 의심을 품게 만드는, 일종의 바이러스라 여겼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최고회의는 집요할 정도로 존 윅과 접촉한 모든 '오염된' 집단을 '청소'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트릭스의 목표가 네오가 아닌, 매트릭스의 결함을 의미하는 'ONE이라는 개념'의 제거였던 것과 같은 것이죠.

 

혹시나 1편에서 존의 차를 훔치는 요제프가 아버지에게 바바 예가에 대해 들은 후 그를 "Nobody"라 부르는 대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신다면, 그 순간 두 캐릭터 간의 연결성을 발견하며 전율이 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존 윅이라는 시리즈는 개의 죽음이라는 빨간 약을 먹고 노바디에서 존 윅으로 각성한 네오와, 그의 최후를 지켜보며 또다른 노바디가 존 윅으로 각성하며 끝나는 이야기인 셈입니다.

 

 

 

 

 

# 6.

 

시리즈의 서사는 결국 짐승들의 세계에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존재들의 처절한 발버둥이라 할 수 있고,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했던 이들의 염원은 '친구'라는 말로 상징됩니다. 일반적인 작품들이라면 돈에 휘둘리는 사람들이 우정에 기반한 관계에 폐퇴하는 이야기로 흘러가기 마련일 텐데요. 작품에선 존과 친구 관계를 지켰던 존재들 모두 강박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번 짐승의 길에 들어선 사람에겐 짐승으로 사느냐, 사람으로서 죽느냐 라는 두 갈래 길 뿐입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면서도 친구끼리 행복하게 우정을 나누는 편리한 낙원은 없습니다. 설사 손가락을 자르고, 두 눈을 포기하고, 명령에 굴종한다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죠. 이는 드라몽 후작이 카론을 죽이면서도 윈스턴은 살려둔 이유이기도 합니다. 윈스턴을 죽인다면 조나단과의 신의를 지킨 인간으로서 죽는 것이지만 살려둔다면 짐승으로서 살아있게 되고, 후자가 윈스턴에게 있어 더욱 고통스러운 결말이기 때문이죠. 주제의식의 측면에서 윈스턴을 살려두는 해당 장면은 결말에서 존 윅이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대칭적으로 암시하는 느슨한 복선이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 7.

 

그럼 일련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아뇨, 있습니다. 애초에 나쁜 짓은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죠.

 

그러니까 십여 년에 걸쳐 끝내주는 먼치킨 킬러가 수백 명을 죽여나가는 시리즈의 주제의식이란 결국 권선징악, 착하게 살자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메시지는 '영화 내에서만 300명 이상을 죽인 살인청부업자에게 행복한 결말은 없다'던 감독의 인터뷰에서도 재차 확인할 수 있구요. 온 세상을 누비며 수백 명이 죽어나가는 개싸움을 벌이는 동안에도 무고한 사람이 죽는 장면은 단 하나도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8.

 

여담으로 다소 모호한 결말 탓에 존 윅의 생사로 설왕설래가 있는 것 같은데요.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든지와 무관하게 검증은 불가능하긴 합니다. 감독이 갑자기 인터뷰에서 존 윅은 죽은 게 맞다고 하는 순간 죽은 것이고, 5편 들고 나오면 산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다만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이라면 제가 어느 쪽의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묘비명과 같은 소소한 힌트 때문이 아니라, 작품의 메시지가 존 윅의 죽음이라는 단일한 방향으로 소집되고 있기 때문이죠.

 

장르적 재미가 알파이자 오메가인 작품임엔 분명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다소 염세적인 메시지의 교훈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비슷한 주제의식을 다룬 망작들과의 가장 뚜렷한 차별점이라 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분투를 조롱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화의 톤은 주인공의 감정과 치열함을 최대한 정중하게 대우하면서도,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라는 것을 담담히 이야기합니다.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 <존 윅 4>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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