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연작의 신작이 나올 때면 기계적으로 예전 영화들을 몰아보게 되는데요. 이번엔 존 윅이군요. 최근 들어 매트릭스도 그렇고 백 투 더 퓨쳐도 그렇고 오래전 시리즈를 하나의 글로 뭉개서 수다를 떠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는데요. 이런 것도 썩 나쁘지 않다 싶기도 합니다. 보고 싶은 신작의 리스트가 밀린다는 점만 빼면 말이죠.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
『존 윅 :: John Wick』입니다.
# 1.
이러나저러나 존 윅의 핵심 키워드는 분노입니다. 존나 센 주인공이 빡쳐서 모조리 죽여버리는 액션 영화라는 정의에 이렇게나 무식하게 들어맞는 작품도 또 없죠.
비슷한 감정선을 가지는 대부분의 영화들은 빈 컵을 준비한 후 물을 담는 과정을 성실하게 묘사하는 방식으로 풀어갑니다. 담기는 물(스트레스)의 양으로 분노의 크기를 증명하는 동안, 주인공과 동화된 관객의 스트레스 역시 비례해 쌓아 나가는 방식이죠. 쉽게 말해 주인공을 못 살게 구는 저 놈들을 나(관객)도 죽여버리고 싶네?라는 생각이 들 때쯤 분노에 찬 주인공의 호쾌한 액션으로 업보를 청산케 하는 영화들이랄까요. 일련의 방법론은 액션의 파괴력뿐 아니라 관객의 갈증까지 함께 동원한다는 측면에서 몰입감이 뛰어난, 정석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은퇴를 선언한 타란티노는 아주 좋은 예라 할 수 있겠죠. <저수지의 개들>부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까지. 빈 물통에서 시작한 인물들의 마음에 분노라는 물을 차곡차곡 채우다 임계를 넘는 순간 쏟아내는 영화의 진수를 볼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 2.
반면 존 윅은 '채워지는 물' 대신 '쏟아내는 물'을 증명하는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비유에서 벗어나 보다 쉽게 말씀드린다면, '이렇게 죽일만해서 저렇게 죽였다'가 일반적인 영화들의 방법론이라 한다면, 존 윅은 '저렇게나 죽인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되돌리는 작품인 것이죠. 따라서 감독이 힘을 주게 될 영역 역시 죽일만한 이유가 아니라 죽이는 모습에 치중하게 됩니다. 첫 번째 편은 적당한 클리셰 비틀기를 통해 방향성을 정립한 영화였고, 속편인 리로드는 전작을 뛰어넘어 눈부시다 못해 황홀한 액션의 세계를 창조하는 데 성공했었더랬죠.
어차피 흘러넘치는 물의 양이 중요하다면 마중물은 사소할수록 되려 극적일 겁니다. 이를테면 이미 가득 찬 물 잔의 물이 넘치게 하는 데에는 단 한 방울이면 충분하다. 랄까요. 많은 영화 팬들이 우스갯소리로 존 윅의 개에 대해 농담하곤 하지만 당연하게도 본질적이진 않은 이유입니다. 개는 그저 물 잔을 넘치게 할 '한 방울'이었을 뿐이니까요. 개가 그렇게 중요했다면 1편의 마지막에 아무 개나 데려가진 않았을 겁니다.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지는 않았을 테죠. 애마 '머스탱 보스 429'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차가 그렇게 소중했다면 2편의 도입에서처럼 망가질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진 않았을 겁니다. 사업장의 갱들을 싸그리 도륙 내놓고 유유히 차를 몰고 나가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죠. 영화가 묘사하는 존 윅이 그 정도 방법을 찾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지도 않구요.
# 3.
이처럼 <존 윅>만의 차별화된 접근법은 관객에게 불필요한 감정 소모가 발생하지 않도록 한다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존은 영화 내내 마누라 사진과 동영상을 보며 가슴 아파하지만 관객 누구도 헬렌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않았을 겁니다. 헬렌을 모르니까요. 마찬가지로 존이 어쩌다 칼에 찔리거나 심지어 건물 옥상에서 떨어진다 하더라도 딱히 긴장되지 않았을 겁니다. 애초에 시리즈 특성상 존이 위험할 일이 거의 없기도 하거니와, 존 윅은 간지 나는 세계관 최강자일 뿐이지 관객인 나랑 정서적으로 교류하는 지점은 거의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죠. 액션 영화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구경'에 최적화된 방법론이랄까요.
물론 이것이 무조건적인 장점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원탑 주인공으로 밀고 나가는 영화에서 주인공과의 정서적 교감을 거부한다는 것은 내러티브가 부실하다는 말과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라는 구심력이 없는 상황에서 드라마의 공백이 느껴지는 순간마다 관객의 집중력은 자연발생적인 원심력에 밀려 이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감독의 선택은 바로, 그냥 영화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존나 멋있고 존나 리얼하고 존나 참신하게 사람을 계속 무한히 죽이자 라는 것이었죠. 만세.
# 4.
본편과 속편의 호평에 반해 3편은 (흥행과 별개로) 다소 박한 평가를 받았더랬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상당 부분 동의하고 있죠. 가장 큰 이유라면 3편에 접어들며 고유의 접근법을 버리고 '죽일 이유'를 찾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새로운 설정이 등장하고 주인공의 과거와 관계가 소개될 때마다, 연약한 개연성이라는 시리즈의 태생적 단점이 자꾸만 부각되고 말았던 것이죠.
추가된 설정들이 세계관의 권위를 공격하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존 윅이 제시하는 킬러의 세계가 매력적이었던 것은 몇몇의 규칙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설정이 원칙의 영역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윈스턴이 이야기하는 규칙이란 일종의 순리처럼 느껴지는 맛이 있었던 것이죠. 규칙이 순리라면 법칙이 깨어지는 순간 윤리적으로 타격을 받는 것처럼 묘사되는 편이 차라리 나았을 겁니다. 그랬더라면 최소한 절대성을 보장할 수 있었을 테죠.
반면, 파라벨룸에서의 규칙은 힘의 결과물로 추락합니다. 존나 무서운 최고 회의와 장로의 강력함이 규칙에 권위를 보장한다는 설정이 공개되었죠. 규칙이 힘의 결과물이라면 '강력'할 수는 있겠지만 '절대'적일 수는 없습니다. 규칙이 힘의 영역으로 추락하는 순간 마찬가지 힘의 상징인 존 윅의 권위까지 함께 추락함은 당연합니다. 원펀맨식 세게관 최강자의 살육 액션이라는 작품의 기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다만 굳이 변호하자면 일련의 패착은 필연적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물을 쏟아내는 영화에서 두 편에 걸쳐 모든 물을 쏟아내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새로 영화를 찍으려면 물을 다시 채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고, 어쨌든 파라벨룸의 마지막 모피어스와의 장면에서 보이듯 3편의 희생으로 분노라는 물은 새로 가득 채웠습니다. 결국 4편의 내용이란 내가 무릎을 꿇은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일 수밖에 없을 텐데요. 예매를 해 둔 상황에서 4편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궁금하긴 합니다. 세간의 평이 괜찮아 보여 더욱 기대가 크군요.
# 5.
여담으로 동양적 세계관이 상당히 녹아있는 시리즈이기도 한데요. 사실 스턴트맨 출신의 영화감독이 B급 영화를 찍으면서 홍콩 영화와 일본 영화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 거겠죠. 투박하게 말한다면 정파 사파 개방 찾는 홍콩의 무협 세계관과, 날붙이 휘두르는 일본식 암살 닌자 문화와, 양복핏으로 승부 보는 서구식 건짓수 액션을 비벼낸 영화라 해도 무방하고, 이는 다름 아닌 영화를 가득 메운 무수히 많은 오마주들이 성실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 동양적 색채를 들어 3편에 불만을 표하기도 하는 듯 보이는데요. 개인적으론 나쁘지 않았더랬습니다. 되려 뜬금없이 유럽을 벗어나 사막으로 날아간 것이 별로라면 별로였죠. 특히 비 오는 늦은 밤 심판관이 제로의 일식집으로 찾아가는 동안 울려 퍼지는 닌쟈리방방(にんじゃりばんばん)의 사이버펑크 한 분위기 하나를 건지는 것만으로도 3편의 티켓값은 넉넉합니다.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 <존 윅>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 본 블로그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글에서 다루는 작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댓글", "포스트를 자신의 블로그로 유인하는 데 이용하려는 댓글", "무분별한 맞팔로우 신청 댓글" 등은 삭제 후 IP 차단될 수 있습니다.
"좋아요", "댓글", "구독"
은 블로거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