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을씨년스러운 11월이면 포근한 이불속에서 귤 까먹으면서 보는 고전 액션 활극이 땡길 때가 있죠.
마틴 캠벨 감독,
『마스크 오브 조로 :: The Mask of Zorro』입니다.
# 1.
낭만에서 시작해 낭만으로 끝납니다. 낭만이 뛰어다니고, 낭만이 칼질하고, 낭만이 키스하고, 낭만이 폭발하는 영화죠. 어떤 것들은 원툴이라 폄하당하고 어떤 것들은 스페셜리스트라 칭송받기도 하는데요. 사실 원툴과 스페셜리스트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잘해서 설득이 되면 스페셜리스트고 안되면 원툴인 것이죠. 그 기준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분명 낭만 밖에 없지만 스페셜리스트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그래서 특별할 건 없습니다. 배경만 피식민 계급 캘리포니아인과 식민 지배계급 스페인인의 갈등일 뿐, 실상은 총 대신 펜싱으로 갈아 끼운 서부극에다 홍콩 영화스러운 무협물의 플롯을 적당히 버무려낸 작품일 뿐이죠. 좋게 말하면 오마주, 박하게 말하면 클리셰 덩어리라 실제 개봉 시기는 98년임에도 80년대 이전 영화의 갬성이 진~하게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했더랬습니다.
# 2.
주제의식은 제목에서부터 엿볼 수 있습니다. 마스크 오브 조로.
'조로'가 아니라 '마스크'가 주인공이라는 것이죠.
정체성에 대한 영화라 이해하셔도 무방합니다. 애초에 캘리포니아인과 스페인인이라는 두 정체성 집단의 갈등이 기본 골자이기도 하구요. 조로라는 캐릭터 역시 마스크를 쓰는 동안엔 서민을 위하는 히어로지만 벗고 나면 호화 저택에 거주하는 식민지 지배계급이라는 모순된 캐릭터이기도 하니까요. 영화는 알레한드로가 마스크의 의미를 깨닫는 여정이자, 돈 디에고가 평생을 짓눌러온 마스크를 벗는 여정이며, 엘레나가 거짓 마스크 아래 진짜 얼굴을 찾는 여정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마스크를 거짓된 정체성 혹은 숨겨진 정체성의 표상으로 정의한 후 그 아래 짙은 고독감과 고통의 이미지를 부여해 히어로로 만든 것이 조로의 세계관인 것이죠.
메인 빌런 돈 라파엘이 돈 디에고에게 복수하기 위해 엘레나를 죽이거나 팔거나 납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딸로 만든 이유입니다. 돈 라파엘은 단순한 지배계급 악당뿐 아니라, 알레한드로와 돈 디에고와 엘레나라는 세 주인공에게 정체성 분리와 갈등의 이유를 제공하는 역할이기 때문이죠.
돈 라파엘의 안티테제라 한다면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한 조연 세 손가락 잭을 곱을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자신이 언제 어디에 누구와 함께 잊든 정체성을 잊지 않는 사람이자, 죽기 직전 알레한드로의 얼굴을 보고 그의 정체를 한눈에 꿰뚫어 보는 사람이죠. 잭을 죽인 러브 대위는 영화 속 주제의식의 화신을 죽인 셈이기에 씻을 수 없는 업보를 짊어진 것과 같고. 그래서 수십 년간 악행을 쌓아온 돈 라파엘과 같은 정도의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 3.
일련의 분화된 정체성은 각각 [불]과 [금]의 양극단으로 상징됩니다. 도둑이었던 알레한드로가 조로가 되었다는 설정은 금을 탐하던 사람이 불에 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테구요. 스승의 인정을 받아 진정한 조로가 된 알레한드로의 첫 등장 씬에서 들판에 새겨진 거대한 Z가 다름 아닌 불로 그려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금(호화 저택) 안에 살던 엘레나는 반복적으로 내면에 내재된 불을 발견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구요. 돈 디에고의 결말에서 폭발하는 광산과 절벽 아래 쏟아져 내리는 금괴는, 돈 디에고가 자신을 지탱하던 금과 불이라는 두 정체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결말의 은유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게 금과 불 사이에 놓인 인물들의 정체성 갈등을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석양과 모래 먼지의 노란색 이미지에 감싸 안습니다. 일련의 정체성 갈등이란 세 주인공뿐 아니라 모래 먼지에 파묻혀 살아가던 당대 캘리포니아 사람들 모두의 이야기였으며, 그 모래먼지를 단칼에 가르며 선명한 눈빛으로 등장하는 금과 불의 화신 조로는 민중의 희망으로 승화된다는 내용의 영웅 서사라 할 수 있겠죠.
# 4.
다만 이런 미학적 성취는 원작의 공이 크구요. 영화 자체는 상당히 편의적이라는 감상입니다. 당장 영화의 전개란 편하게 말씀드리자면,
액션 나간다 먹어라!! 멜로다!! 뽀뽀한다!! 이건 코미디다!!
부성애 파트다!! 폭발 뽕 먹어라!! 권선징악 발사!!!!
라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죠. 장면 마다마다 이야기보다 장르적 기능이 먼저 읽히는 황당한 영화랄까요. 평이한 이야기까지야 '그래, 원작이 워낙 고전이기도 하고 배트맨까지 이어지는 무수히 많은 캐릭터들의 조상 격이니 그럴 수 있지' 한다지만 그걸 감안한다 하더라도 더 좋은 연출자가 메가폰을 잡았더라면 훨씬 근사한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은 어쩔 수가 없을 겁니다.
앞서 정체성에 관련된 캐릭터 해석에 대한 이야기를 드렸습니다만, 영화가 풀어내는 인물의 표현들이 너무 평이하다는 것 역시 큰 단점입니다. 주인공 알레한드로를 중심에 놓고 이 인물을 위한 기능 조각들로 주변 인물을 배치할 뿐 각 인물들이 느끼는 정체성 갈등에 대한 충실한 해석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경우 지금 쫄리는 순간이니까 얘 불쌍해해라! 라는 용도 딱 하나만 보고 따박따박 소비되는 식이라 불쾌하기까지 하죠.
# 5.
일련의 장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감독도 각본도 아닌 배우에 대한 영화임에 분명합니다. 입체적 히어로로서의 조로라는 브랜드 위로 앤서니 홉킨스의 깊은 연기력,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매력 이상의 마력, 캐서린 제타 존스의 생동감과 존재감은 배우 셋만 잘 캐스팅해도 영화가 미친 듯이 잘 굴러갈 수 있음을 넉넉하게 증명합니다.
여담으로 미술적 성취는 짚어 칭찬할만합니다. 오락 영화로서의 물량 공세뿐 아니라 훈련장이나 광산 등 기분 좋게 기억에 남을 좋은 공간들과 액션은 겸비되어 있습니다. 참, ost도 이만하면 준수하다는 생각입니다. Zorro Theme 같은 트랙은 언제 들어도 가슴이 웅장해지죠.
... 개인적으로 크게 애정 하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잘 만든 명작이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냉정하게 보자면 수작의 커트라인조차 버거울 작품이죠. 다만 살다 보면 가~끔 이런 느낌적인 느낌의 영화가 땡길 때가 있고, 그럴 때 흑발의 미녀와 검은 마스크의 조로만큼 소년의 호승심을 충전시켜주는 데 최적화된 작품을 찾기 힘들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마틴 캠벨 감독, <마스크 오브 조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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