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주제의식만 가지고 영화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일관된 주제의식 하나 없이 영화를 만들 수도 없는 법이죠.
로아 우다우그 감독,
『트롤의 역습 :: Troll』입니다.
# 1.
클리셰가 많다? 그 수준이 아닙니다.
이 정도면 괴수물 클리셰를 일부러 모아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초반엔 무슨 영화를 이렇게 만들었지 싶어 짜증스럽기도 했습니다만 어느 순간부터 그래 어디까지 가나 보자 싶은 생각에 되려 흥미진진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캐릭터, 서사, 플롯, 설정, 공간, 코미디, 액션, 구도, 묘사, 편집 등등등. 거의 모든 부분들이 30년 지기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반가워 영화 내내 감동의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물론 타겟층이 명확한 작품이라는 걸 감안하긴 해야 합니다. 등산 마니아 아빠가 귀여운 딸과 극한 클라이밍 하는 오프닝에서 유추할 수 있다시피 가족영화라는 것만큼은 분명하니까요. 따라서 유독 어린아이들이 중요한 순간 정서적인 장치로 등장한다거나, 작품 전반에 걸쳐 소년성을 강조하고 있다거나, 고증보다는 과시적 표현에 집중하고 있다거나, 혈흔 등 고어한 묘사가 최대한 생략되어 있다거나 하는 식의 12세 등급에 걸맞은 표현들까지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야기까지 이렇게나 대충 만들 이유는 없잖아요. 어린아이들도 볼 수 있는 영화라는 것이, 어린아이들만 속여 넘길 수 있을 정도로 대충 만들어도 되는 유치한 영화라는 뜻은 아니잖아요.
제목에 민감한 편이라 이번 영화 역시 어지간하면 배급사의 폐급 번역을 깠을 겁니다. 영화 속 트롤은 '습격'의 ㅅ조차 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이번에는 지적하지 않으려 합니다. 영화가 태만한데 수입사는 좀 태만하면 안 될 거 있냐? 라는 빈정거림에 딱히 할 말이 없기 때문이죠.
# 2.
작품을 관통하는 구조는 [대립과 화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 과학과 동화, 기독교 문화와 북유럽 신화, 아빠와 딸 등이 대립하는 가운데, 각자의 위상에 따라 대가를 치르기도 하고 반성하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하는 식의 구조라 할 수 있죠.
문제는 정작 대립 주체들의 문제 해결 방식이 대부분 [일방적인 폭력]으로 귀결된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원인을 제공하거나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쪽이, 피해를 당하거나 겸손한 쪽을 일방적으로 가해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기까지 하죠. 위대한 과학의 직사광선 빔은 미개하게 힘만 센 동화 속 빌런을 성공적으로 공략하며 위엄을 증명합니다. 기독교 종소리 실드는 트롤이 상징하는 북유럽 신화 주변을 돌며 능욕하구요. 터널 뚫기 위해 대자연에 폭약을 설치한 인간들, 과거 트롤을 학살한 후 그들의 집을 빼앗은 오만한 인간들의 장엄한 승리라는 결말은 황당합니다. 유일하게 트롤의 존재를 믿던 아빠는 주요 인물 중 유일하게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데, 심지어 그의 딸내미는 아빠 뚝배기 깬 트롤이랑 교감하고 자빠져 있죠.
아무 잘못 없이 불쌍하기만 한 트롤. 온갖 화기에 개같이 처맞다가 동족 해골 트렁크에 실은 인간들에게 시체 능욕까지 당합니다. 죽기 10초 전에 살려준다는 기만질을 지나 아직 채 식지도 않은 트롤의 시신을 앞에 두고 주인공과 썸남이랑 말장난하는 티베깅까지 도달하면, 영화는 목적을 잃고 굳이 잊힌 노르웨이 신화를 소환해 모욕하는 능욕물이 되고 말죠.
# 3.
눈치채셨겠지만 이쯤 되면 다른 부분들도 정상일 리 없습니다. 현대 중화기로도 씨알도 안 먹히는 트롤을 냉병기 시대에 무슨 수로 뼈 무덤을 만든 건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포탄도 통하지 않는 트롤에게 총을 쏴대는 바보짓을 왜 하고 자빠진 건지도 알 수 없습니다. 증언이나 발자국만 있을 때야 그렇다 치더라도 K-9 자주포를 처먹고도 상처하나 나지 않는 나무 풀뿌리 턱수염 40m짜리 돌덩이를 4k 영상으로 단체 관람하고도 트롤은 아닐 거라 아득바득 우기는 총리와 장관 등도 뭐하는 인간들인지 알 수 없습니다.
새로 태어난 존재들도 아니고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진 존재라면 대체 왜 하필 지금 깨어난거야? 라는 쉬운 질문조차 영화는 극복하지 못합니다. 터널 공사가 잠자던 트롤을 깨웠다면 트롤은 산을 지키는 정령이었어야 하고 그렇다면 오슬로로 냅다 돌격을 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만약 오슬로의 왕궁으로 트롤을 끌고가고 싶었다면 왜 하필 지금에서야 집으로 돌아가는가를 성실하게 설득했어야 합니다.
인물들도 엉망이긴 매한가지. 총리 비서는 직분 내팽개치고 제멋대로 싸돌아다니며 전 직장 라이선스를 사칭합니다. 군인은 친한 척 이름만 불러주면 허가 없이 제 멋대로 군을 운용하는 장군놀이에 빠진 머저리죠. 작전본부의 군무원은 미쳐서 총리가 허가한 군사작전을 꾸러기 표정으로 해킹합니다. 개같이 심각한 중범죄지만 누구도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고, 심지어 밉상 장관의 죽빵을 날리기까지 하는 데 그게 통쾌하기라도 하다는 듯 연출되는 대목은 유치해 손발이 오그라 들죠.
# 4.
분명 재료의 맛은 있습니다. <경계선>에서도 봤던 북유럽 신화와 트롤은 그 자체로 신선합니다. 바위가 쩍 하고 열리며 나오는 눈깔, 통상의 과시적이고 위협적인 괴수물의 디자인과 달리 괴기한 수염과 불쾌한 꼬리의 분위기는 굉장하죠. 노르웨이의 풍광도 훌륭합니다. 영화 내내 눈이 시원하고 상쾌합니다. 부감으로 배경만 쭉쭉 긁어도 개 같은 내용을 따라가며 생긴 내상이 조금은 치유되는 느낌이죠.
하지만 딱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재료 맛'만' 있습니다. 영화를 보며 느끼는 긍정적 경험은 노르웨이의 산악과 해변의 전경,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는 오슬로의 야경, 정령과 괴물과 자연 중간 어딘가라는 트롤의 디자인에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그냥 <동화를 믿던 샷건 든 미친 노파가 우연히 트롤을 만나는 이야기>라는 식으로 30~40분짜리 단편 하나 딱 찍었으면 훨씬 깔끔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통제 불가능한 장편으로 늘리며 폭망 한 꼴이라는 생각입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주인공이 트롤을 해치워서 다행이라는 생각보다, 트롤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면 괴수물로서는 낙제점이라 해야겠죠. 로아 우다우그 감독, <트롤의 역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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