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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Thriller

교환살인은 거들 뿐 _ 열차 안의 낯선 자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그냥_ 2022. 8. 3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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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누구나 없애고 싶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죠.

설마 없애고 싶은 사람이 한 명도 없으셨어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열차 안의 낯선 자들 :: Strangers On A Train입니다.

 

 

 

 

 

# 1.

 

교환 살인 [交換殺人]

알리바이를 만들고 동기를 숨기기 위해 둘 이상의 사람들이 서로의 상대를 교환해 대신 죽이는 행위.

 

고전 명화 <열차 안의 낯선 자들>하면 가장 먼저 따라붙는 말은 역시나 '교환 살인'일 텐데요. 그렇다고 메인 테마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기껏해야 모티브 정도에 불과하죠. 교환 살인이 메인 테마가 되려면 알리바이가 완벽한 듯한 몇몇의 별건들 사이 인과를 파훼하는 '추리극'이라는 식으로 가는 것이 합당합니다만, 이 작품은 애초에 교환 살인이 완성되지도 않을뿐더러, 사건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전개의 방식 모두 너무 느슨하거든요. 추리극이었다면 이야기를 리드했어야 할 경찰의 역할부터가 매우 제한적이거니와, 해결 역시 이니셜 새겨진 라이터 하나로 대충 때우고 있습니다.

 

 

 

 

 

 

# 2.

 

영화의 발단이자 배경이 되는 [미리엄 살인 사건]은 주인공 '가이 헤인즈'의 심리와, 가이를 관찰하는 관객의 심리를 엿보기 위한 맥거핀에 불과합니다. 범죄 스릴러라기보다는 심리극에 훨씬 가까운 작품인 것이죠. 이미 저질러진 교환 살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안에 내재된 교환 살인을 저지르고 싶은 충동에 대한 이야기랄까요.

 

서두에 옮겨둔 파티장의 두 부인에게 건네는 브루노의 대사는 브루노라는 인물을 메이킹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책임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은 욕구가 숨어 있음을 추궁하는 장면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 또한 <열차 안의 낯선 자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불규칙하게 이용하는 공간에 있는 그저 처음 보는 낯선 누군가입니다.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은 곧 '모든 사람들'인 것이죠.

 

영화의 묘미는 살인을 추적하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살인이 일어났으면 싶은 기대감을 적극적으로 불러일으킨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가이로 하여금 관객의 기대를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가게끔 조율하고 있죠. 가이가 브루노의 아버지를 찾아가는 장면은 대표적입니다. 관객은 직관적으로 '결국 교환 살인 제안을 받아들이는구나!'라고 생각하기 마련일 텐데요. 그 속에는 '진작 교환 살인을 받아들이지 그랬어!'라거나 심지어 '과연 가이가 완벽하게 살인을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기대감도 일정 부분 녹아 있는 것이 사실이죠.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의 침대 속에 숨어 기다리고 있었던 브루노를 맞닥뜨리는 순간, 자신의 내재된 폭력성을 자백하게 되며 장르가 작동합니다. 근사하죠.

 

스릴러치고는 이례적일 정도로 폭력 묘사가 생략되어 있는 작품인데요. 관객이 보다 편안하게 자신의 폭력성을 자백하도록 배려하기 위함이라 이해합니다. 살해 장면이 자극적으로 연출되어 버리면 '난 저런 것까지 원하지는 않았어'라며 거리를 두고 말 테니까요.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남편을 죽일 수 있을까 흥미진진한 얼굴로 이야기하던 여사들이 실제 자신의 목이 졸리자 공포에 떠는 장면이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영화 내내 어떻게 하면 브루노의 아버지를 성공적으로 죽일 수 있을까 흥미진진한 얼굴로 기대하던 관객의 목이 졸린 것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 3.

 

여기까지는 주인공 가이를 중심으로 따라간, 어떤 면에선 정석적인 감상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을 텐데요. 사실 이 영화는 압도적인 악역, '브루노 안토니'의 영화라 하는 것이 더 정당할지도 모를 작품이죠. 그만큼 가이의 불안을 집어삼키는 브루노의 광기는 무시무시합니다. 배우 '로버트 워커'는 70년의 세월을 가뿐히 뛰어넘는 대단한 에너지의 연기를 선보입니다.

 

브루노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악역이기도 합니다만, 동시에 교차 살인으로 상징되는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살인, 혹은 폭력을 저지르고 싶은 본성의 의인화 같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폭력성은 쾌감이자 해방이기도 하지만 수치이자 치부이기도 할 텐데요. 히치콕은 그를 상대적으로 높은 곳 혹은 뒤에서 먼저 시선을 잡고 있는 식으로 배치시켜 일련의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입체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연출합니다.

 

# 4.

 

주인공 가이를 압박하는 빌런이 아니라, 브루노의 시선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것도 썩 흥미롭습니다. 가이는 사회적으로 성공했으며 대인 관계도 원만하고 사랑하는 연인도 있는데 반해, 브루노는 거의 모든 대인 관계가 망가져 있는 문제적 인물인데요. 기차에서의 대화를 통해 각자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한 후 무턱대고 투정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브루노는 표면적으로는 [살인자]이지만 행실만 놓고 보자면 [스토커]에 훨씬 가깝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가 가이를 사랑하고 있다 생각하며 영화를 점검해도 자연스럽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지점이라 할 수 있겠죠. 서스팬스의 거장은 이런 식으로 멜로를 만들기도 하는 걸까 싶달까요. 아버지에게 자신을 고발하려는 가이를 제거하는 것이 '살인자 브루노'로서는 훨씬 합리적일 테지만 그는 결코 가이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등 뒤를 따라붙는 움직임과 가이를 겨냥하는 총구보다 흥미로운 것은 자신을 배신하고 돌아서는 가이를 지켜보는 브루노의 미묘한 표정이죠.

 

실제 브루노의 최후 역시 주인공 품에서 죽는 비련의 여주인공을 묘사할 때 쓰이는 구도라 할 수 있습니다.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 꼭 쥐고 있던 연인의 물건이 흘러내리는 건 매우 친숙한 멜로의 클리셰죠. 마무리 역시 정석적이라 한다면 누명에서 벗어난 가이가 원래의 연인 '앤 모튼'을 끌어안으며 끝나야 할 테지만, 정작 앤 에겐 가이의 품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가이에겐 그의 품에서 숨을 거둔 훌륭한 히로인이 따로 있기 때문인 것이죠.

 

 

 

 

 

 

# 5.

 

혹시 '사이코드라마'라는 식으로 볼 수도 있을까요. 고속으로 회전하는 회전목마는 [평온한 외부]와 [휘몰아치는 내부]를 강제적으로 분리한다는 점에 주목해 가이와 브루노의 인격 경계를 허물어트려 보자는 것이죠. 가이는 부모가 등장하지 않고 브루노는 부모만 있다는 점 등 두 주인공은 여러모로 대칭적이기도 하고 상보적이기도 한 설정을 가지는데요. 회전목마는 통상 유년기에 형성되는 내면을 상징한다 이해할 때 어린아이를 집어던지는 브루노와 아슬아슬하게 구하는 가이의 대칭은 두 인물이 자신의 유년기를 어떻게 기억하는가를 상징한다 해석할 수도 있을 테죠.

 

내친김에 더 과격하게 확장해 볼 수도 있을까요. 아치 에너미의 관계를 넘어 이중인격자의 1인극이라고 말이죠. 브루노는 가이의 내면에 숨겨진 유년기에 만들어진 또 다른 인격이라구요. 가이는 스스로 자신의 아내를 목 졸라 죽였고, 자신의 아버지 역시 죽이러 갔으나 아버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실망한 채 엄마가 깨기 전에 몰래 집을 나왔다 상상하면 재미있습니다. 때마침 가이가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브루노가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기에도 훨씬 수월하죠. 영화 내내 부르노가 주변을 배회하는 것은 연쇄 살인을 추궁하는 내적 갈등쯤 될 테구요. 결말의 회전목마의 사투 모두 혼자 멍청하게 서 있는 가이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그 끝에 라이터를 손에 든 가이가 경찰에 붙잡혀 끝났다고 말이죠. 두 인격 사이 힘겨루기 끝에 가이의 인격이 브루노의 인격을 극복하는 이야기라 생각하면 흥미롭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뜨뜻미지근한 마무리도 이 같은 상상을 보다 그럴싸하게 합니다.

 

만, 사실 이렇게 보면 설명되지 않는 장면 또한 너무 많긴 합니다. 그냥 저렇게 독특하게 영화를 보는 사람도 있구나 하시면 좋겠네요. :)

 

# 6.

 

가이가 테니스를 치는 장면과 브루노가 하수구에 빠진 라이터를 꺼내는 장면의 편집은 놀랍습니다. 하수구에 빠진 라이터를 집어내는 집착을 마지막 손에 들린 라이터를 통해 받아내는 연출을 통해 악역을 대우하는 것도 인상적이죠. 특히 마지막 회전목마가 무너져 내리는 장면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력한 장르적 재미를 선사합니다. 선입견이 확증 편향으로 작동한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감독의 외동딸 '페트리샤 히치콕'을 촬영하는 동안 카메라 너머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는 것도 소소한 재미라 할 수 있겠죠.

 

기본적으로 범죄 스릴러라 해야겠습니다만, 멜로로서도 사이코드라마로서도 볼 여지가 충분한 두터운 이야기를 이 정도의 완성도로 1951년에 만들었다는 것은 황당할 정도의 업적이라 해야 할 겁니다. 지배적인 장르에 다른 장르의 본질을 응용해 녹여낸 걸작이라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군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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