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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Thriller

흙을 먹일 수 있을까 ⅱ _ 스왈로우, 카를로 미라벨라 데이비스 감독

그냥_ 2021. 2. 1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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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인정합니다. 이 글은 다른 글에 비해 유독 공정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헤일리 베넷'의 열렬한 팬이거든요. 그녀가 조연으로 잠깐 출연했던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만 하더라도 몇 번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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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죠. 일련의 연출법은 난해한 아이템을 이해시키는 덴 성공합니다만, 안타깝게도 장르와 합치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맙니다. 압박감의 성격보다 더 우선시되는 압력의 크기. 인물을 포위하는 듯한 엄격한 연출의 통제. 주인공의 심리적 상황보다 심미성에 더 많이 할애되는 듯한 메타포. 사건이 고조되는 순간의 과격한 표현 따위 등은 전형적인 스릴러의 작법들인데 반해 이 영화의 메시지는 누가 뭐래도 드라마거든요.

 

# 13.

 

드라마는 정서를 다루는 장르입니다. '슬픔'이라는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슬픔을 진득하게 묘사하는 장르고 '즐거움'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즐거움을 착실하게 그려내는 장르죠. 그런 복잡 미묘한 회색지대의 정서를 보다 정교하게 포착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서사가 보조할 뿐, 어디까지나 핵심은 주인공의 심리 상태 변화와 고조에 맞춰져 있어야 합니다.

 

반면 이 영화는, 앞선 글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은 기계적 방법론으로 인해 주인공의 정서를 특정한 효과에 귀속되게 만들어 단정적으로 정의하게 합니다. 공허함, 외로움 등으로 말이죠. 영화 내내 단편적 정서가 반복적으로 확인되기만 할 뿐 충분한 깊이감이 없기에 그녀가 가진 '이식증'이라는 특이증상 역시 논리적으로 이해될 뿐 문학적으로 설득되지는 못합니다.

 

 

 

 

 

 

# 14.

 

남편 '리처드'가 좋아하니 머리를 길러보라 말하는 시어머니라던가. 은밀한 치부가 공개되었음을 확인한 순간의 실망감. 행복한 척하는 거냐는 질문과, 자기 개발서의 제목 따위는 모두 하나같이 공허함을 축적하는 사례에 불과합니다. 각 상황마다의 미세한 차이점을 포착해 유기적으로 조직하지 못하기에 각각의 건들 모두 바스러집니다. 뭐랄까요, 조금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헌터'가 이물질을 먹어야 하는 이유 1, 이유 2, 이유 3 이 전시되어 있는 걸 보는 것 같달까요.

 

"이렇게 다채롭게 공허한 인물이다. 그래서 삼키는 것이다. 적어도 무언가를 목구멍으로 넘기는 순간의 선택은 자신의 것이니까. 그 순간의 통증만큼은 자신의 것이니까. 허락된 새로운 시도의 떨림과 해방감을 충족하면서도 무의식에 침전해 있는 자기 비하 역시 만족시켜주니까." 라는 식의 논리적 이해만으로 쉽게 작동할 수 있을 만큼 드라마가 만만하지는 않습니다.

 

# 15.

 

'헌터'가 푸시 핀을 삼키는 전반부 클라이맥스에 도달해 버리고 난 이후에서부터 저택을 탈출하기까지의 런타임은 사실상 같은 정서에 대한 동어반복에 불과합니다. 상처 받고, 삼키고, 상처 받고, 삼키고. 지루하지 않을 도리가 없죠.

 

감독은 푸시핀을 삼킨 이후부터 호텔 침대에 쪼그려 앉아 흙을 먹기 전까지. 같은 말만을 반복할 것이 아니라 이식증이 없는 관객조차 스스로 흙을 집어삼키고 싶게 만들었어야 합니다. '헌터' 옆에 관객을 함께 앉혀 놓고 그녀와 함께 정서적인 흙을 집어삼키게 만들었어야 합니다. 그 정도의 정서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이식증을 가진 '헌터'의 내면을 깊이 더 깊이 파고들었어야 합니다. 그래야 드라마죠.

 

 

 

 

 

 

# 16.

 

호텔방에서의 하룻밤이라는 발판이 부실하기에 마지막 '어윈'의 집에서의 결말 또한 힘을 받지 못하고 맙니다. 영화 내내 무언가를 삼키기만 하던 그녀가 마지막으로 토해내기 위해 그녀와 관객은 이전까지 제대로 삼켰어야 합니다만 그러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결말 역시 그저 영화를 정리하기 위한 적당한 수습책으로 전락하고 말죠. 이전까지 온갖 종류의 미학적 은유로 일관하던 영화가 갑자기 '규칙은 자신이 결정한다'는 둥의 직접적인 대사로 정리되는 걸 보노라면 감독이 이 장면에 특별한 애착이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가지게 됩니다.

 

# 17.

 

에필로그 격의 공공화장실에서의 낙태 씬 역시 썩 조악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여기까지 영화를 끌고 온 감독이 스스로의 작가적 자의식에 한껏 취해 쓴 부분처럼 보인 달까요. 약간 '김윤석' 감독 作 <미성년>의 엔딩처럼 말이죠.

 

이 씬의 <낙태>라는 개념은 구체적 의미의 낙태가 아니라 자신의 자주성을 확보한다는 형이상학적 의미의 논리적 미장센일 가능성이 높을 텐데요. 그런 식으로 손쉽게 소비되기에 낙태는 훨씬 다층적이고 다각적 함의를 가지는 메시지입니다. 준비가 철저하지 못하면 메시지가 혼용되기 딱 좋다는 뜻이죠.

 

극단적으로 결말에 아이를 지우는 대신 낙태약을 버리는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메시지는 나름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영화 내내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고 삼키거나 삼켰던 무언가가 억지로 끄집어내어 지기만 했던 주인공이 비로소 가치 있는 무언가를 낳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이 시점에서 무책임한 엄마와 범죄자인 아빠와 가학적 소유욕의 남편으로부터 독립된 자신만의 선택과 인격을 찾아나가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도 전혀 문제가 없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결말은 대부분의 경우에서 아니함만 못합니다.

 

 

 

 

 

 

# 18.

 

물론 그럼에도 지난 글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드라마로서의 약점들은 배우 '헤일리 베넷'이 상당 부분 메워주고 있습니다. 맥락 다 치우고 그냥 호텔 침대에 기대앉아 아기 같은 눈망울로 흙 퍼먹는 거 보면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배우의 고군분투를 지렛대 삼아 자신과 비슷한 점을 발견할지도 모를 특정한 관객들이 몰입할 여지 역시 열려있기는 하구요.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보편적인 드라마로서 성공적이냐 묻는다면 차마 그렇다 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전, 끝내 흙을 삼키지 못했거든요. '카를로 미라벨라 데이비스' 감독, <스왈로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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