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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Thriller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_ 레드 닷, 알라인 다르보리 감독

그냥_ 2021. 2. 2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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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오로라 보러 하이킹 떠난 부부가 저격당하는 영화입니다. 장르적 재미는 사냥당하는 사람의 살 떨리는 긴장감과, 중후반 공개되는 소소한 반전잼, 갈등이 정리되는 결말의 카타르시스가 전담합니다. 주제의식은 '업보 청산'이라는 한마디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겠죠.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가 여기서 발생합니다. 서사와 장르와 주제가 제각기 따로 놀거나 충돌한다는 점이죠. 복수극, 그거 그렇게 적당히 만들어지는 게 아닐텐데요.

 

 

 

 

 

 

 

 

'알라인 다르보리' 감독,

『레드 닷 :: Red Dot』입니다.

 

 

 

 

 

# 1.

 

모르긴 몰라도 영화를 보신 분들 중 상당수가 제법 답답해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사냥하는 쪽이든 당하는 쪽이든 어느 편으로도 감정 이입이 어렵구요. 카메라가 따라붙는 여주는 영화 내내 찐따같이 갑갑하기만 한 밉상이거든요. 전개가 시원하다거나 서사가 참신한 것도 아니고, 결말의 복수마저 썩 개운하지 않습니다. 사이사이 겉도는 코드들이 감상을 지저분하게 만들기도 하구요.

 

일련의 단점들은 서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개별적인 연출 기법이나 배우의 연기력, 제작 여건 등의 탓이 아니라 모두 시나리오의 실책 때문입니다. 어디 한번 살펴볼까요.

 

 

 

 

 

 

# 2.

 

영화의 첫 번째 실책은 '토마스'가 엄한 사람을 죽인다는 점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건 나쁘다'는 식의 유치한 이야기를 만들라는 건 아닙니다. 총알 빗발치는 과격한 19금 스릴러물에서 사람 몇 명 갈려 나가는 게 뭔 대수라구요. 만약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설원에 갇힌 부부를 심심풀이로 사냥하는 영화였다면, 주변에 걸리적거리는 인물들 갈아버리는 식으로 전개한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겁니다.

 

 

 

 

 

 

# 3.

 

문제는 이 작품이 무고한 사람을 죽인 업보에 관한 영화라는 점입니다. '나디아' 부부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다가 결국 그 업보가 차곡차곡 쌓인 결과 통렬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라는 쪽으로 흘러가는 거야 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적어도 복수의 주인공인 '토마스'만큼은 절대 애먼 사람을 죽게 만들어선 안됩니다. 아들을 잃은 '토마스'는 복수해 마땅하고 '나디아' 부부는 죽어 마땅하다. 라는 당위 위에서 성립하는 영화의 특성상 주인공의 도덕적 우위와 폭력의 설득력은 필연적으로 비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 4.

 

사람을 트럭 단위로 갈아 마시는 영화, <킬빌>의 주인공 '키도'를 살펴봅시다. 그녀는 복수를 방해하는 모든 이들을 가차 없이 썰어버립니다만 적어도 복수의 동기가 되는 핵심적 정서 중 하나인 '모성'이라는 도덕적 우위만큼은 철저히 지켜나갑니다. '버니타'의 딸 '니키' 앞에서 칼을 숨긴다거나, 크레이지 88인을 도륙 내는 동안에도 어린 소년만큼은 궁디 팡팡으로 쫓아낸다거나, 교복을 입은 '고고 유바리'와는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거나, 딸 'B.B'에게 보이는 친절한 모습 등은 '키도'의 복수의 근거가 일련의 정서에 닿아 있으며, 이는 관객이 작품을 편안하게 즐기는 데 있어 절대 훼손되어선 안될 부분이기 때문이죠.

 

 

 

 

 

 

# 5.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사람을 억울하게 잃은 슬픔이라는 정서에 기반하고 있는 '토마스'는 복수의 대상인 '나디아' 부부 이외에는 그 어떤 인물들도 희생당하지 않게끔 최대한 노력했어야 합니다. 불의의 사고로 다른 사람이 희생되었다면 당황해하고 미안해라도 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가진 슬픔과 분노에 관객이 안착할 수 있기 때문이죠.

 

백번 양보해 복수에 눈먼 '토마스'가 엄한 사람들을 죽이고 말았다. 라는 서사를 전개하고자 했다면 적어도 복수가 끝난 후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과 업보로부터 '토마스' 역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암시 정도는 준비해 뒀어야 합니다. 물론 그랬다면 애초부터 카메라가 '나디아' 부부를 따라다니는 반전 스릴러가 아니라 '토마스'에 정서적으로 밀착해 있는 드라마 여야 했겠지만요. 

 

 

 

 

 

 

# 6.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나면 '토마스'의 복수로 인한 시원한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억울하게 희생당한 불쌍한 산악 구조대 형제와, '토마스'의 가족, 특히 '나디아'와 함께 희생된 뱃속 아기의 죽음이 찝찝한 뒷맛으로 남게 됩니다. 내 자식의 교통사고는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복수의 과정에서 남들이 죽어 나가는 건 내 알바 아님! 이라는 나이브한 도덕관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식 잃은 부모로서의 '토마스'에게 감정 이입하는 데 치명적인 방해 요소가 되고 말죠.

 

 

 

 

 

 

#7.

 

두 번째 실책은 서사의 배경이 되는 뺑소니 사건의 설계 오류입니다.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남의 희생을 합리화하는 '나디아' 부부의 이기심을 만들어내야 하는 대목이죠. 문제는 이 이기심을 만들어내기 위한 상황 설정이 너무 조악하다는 점입니다. 찬찬히 짚어볼까요.

 

 

 

 

 

 

# 8.

 

교통사고가 발생합니다. 서사가 전개되려면 일단 '토마스'의 아들은 어떻게든 사망해야 되겠군요. 주인공이 개인적인 복수를 하려면 일단 경찰을 따돌려야 합니다. 경찰이 범인을 잡지 못하게 해야 하니 사고는 산골짜기에서 벌어져야 될 테구요. 그럼에도 '토마스'는 범인이 누군지 알아야 하니까 드론이라는 뜬금없는 소재가 등장하게 됩니다.

 

드론이 있으려면 '토마스'가 아들의 근처에 있었어야 할 테구요. 가까이 있었음에도 아들을 살릴 수 없으려면 교통사고가 발생함과 동시에 아이는 죽어야만 했을 겁니다. 뺑소니 사고를 활용하는 경우, 대부분 교통사고가 난 직후 뺑소니만 치지 않았으면 아이를 살릴 수도 있었다. 라는 쪽으로 가닥이 잡히는 것과 달리 이 영화에서 아이가 차에 치이자마자 숨지게 만든 건 그 때문이죠.

 

 

 

 

 

 

# 9.

 

자, 뭔가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주먹구구식으로 설정을 틀어막은 데 대한 결과가 뺑소니와 무관하게 아들이 죽었다가 되었습니다. 즉,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토마스'의 아들을 죽게 내버려 둔 악당 부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저 고라니처럼 갑툭튀한 어린 아이를 보지 못한, 전방주시 태만에 따른 과실치사 용의자 정도로 격하되고 말았다는 의미죠.

 

심지어 자기 아들 드론에 정신 팔리게 만들어 차도 한복판으로 밀어 넣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드론을 조종하고 있었던 아빠 '토마스'가 되고 맙니다. 적어도 이 설정 하에서라면 아들의 죽음에 있어 '토마스'가 '나디아' 부부의 탓만 하는 건 설득력이 떨어지는 뻔뻔한 일이죠.

 

 

 

 

 

 

# 10.

 

복수극의 쾌감은 당연하게도 복수를 행하는 사람의 압도적인 정당성에서 출발합니다. 이해하고 이해하고 또 이해하려 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극단적인 피해를 일방적으로 입었다. 그러니 나는 어쩔 수 없이 모든 초법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너에게 복수를 해야겠다. 라는 데 대한 관객과의 합의는 복수극이 성립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죠. <친절한 금자씨>의 '백 선생'이 눈곱만큼도 이해할 가치가 없는 쓰레기로 그려진다거나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무려 15년간 군만두만 먹어야 했던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혹자는 <존 윅>을 예로 들어 별 볼일 없는 이유로도 복수를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하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존 윅>은 처절한 복수를 다룬 스릴러 드라마라기보다는 호쾌하고 역동적인 연출을 즐기는 액션물에 가까운 작품이죠. 높은 수위의 폭력만 동일할 뿐 장르의 결이 전혀 다른 작품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 11.

 

앞선 두 실책은 '토마스'의 복수를 공감할 수 없게 한다면 말씀드릴 세 번째 실책은 또 다른 주인공 '나디아'에 대한 이해를 어지럽게 합니다. 바로 반전과 복수의 충돌이죠.

 

감독은 중반부 영화의 동력으로 '나디아' 부부를 사냥하는 살인마의 정체를 반전카드로 활용합니다. 쉽게 말해 살인마가 산악 구조대 형제인 척 한다는 거죠. 이 반전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선, '나디아' 부부가 최대한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선의의 피해자 같아 보여야 합니다. 인종차별을 당했다거나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부부라거나 키우던 강아지를 처참하게 잃는다거나 얼음물에 빠지고 총에 맞는 등의 상황 설정은 모두 부부를 최대한 불쌍해 보이게끔 만드는 장치들이죠.

 

 

 

 

 

 

# 12.

 

하지만 아시다시피 결말에서 '나디아' 부부는 모든 사단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가해자였음이 밝혀지게 되고 그에 대한 책임으로 단죄됩니다. 즉, '토마스'의 복수를 마음 편히 즐기기 위해서라면 영화 전반부는 '나디아' 부부의 도덕성을 떨어트리는 데 투자되었어야 하는데, 되려 감독 스스로 가해자들을 불쌍하게 만들고 말았다는 것이죠.

 

결과적으로 전반부 반전을 위해 '나디아' 부부를 최대한 변호하는 데다 회상씬까지 동원되어 부부가 자수를 갈등하는 장면까지 보노라면, 이 사람들이 정말 이런 처절한 복수를 당할 정도로 그렇게까지 잘못한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생기고 맙니다.

 

 

 

 

 

 

# 13.

 

심지어 부부를 분리해 개개인으로 바라보면 복수는 더욱 설득력을 잃습니다. 어쨋든 '나디아'는 운전도 하지 않았고, 사고가 발생하자 희생자에게 가장 먼저 달려 나가 상태를 살핀 사람이며, 남편에게 자수도 권했고, 실제 자수하기 위해 경찰에 전화를 걸기까지 한 사람이 되거든요. 차마 선한 사람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남편 '다비드'보다는 책임이 훨씬 덜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가장 큰 책임을 진 사람이 되고 맙니다.

 

물론 감독 나름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걸 '다비드'에게 주려했다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상식적으로 그건 어디까지나 그만큼 큰 고통이라는 수사적 표현에 불과할 뿐, 죽음보다 더 큰 책임이라는 건 설득력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스웨덴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류의 비슷한 속담이 없었던 걸까요.

 

 

 

 

 

 

# 14.

 

제목은 표적을 정확하게 조준하는 <레드 닷>입니다만 정작 영화는 여기저기 난사된 것만 같습니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를 말하는 사람은 또 다른 억울한 죽음들을 양산하고. 죄책감을 가장 크게 느끼는 사람과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동안, 가장 큰 책임을 진 사람은 멀쩡히 살아남게 됩니다. 죽은 사람들이 죽어 마땅한 인물인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려고 억지로 답답함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욕은 욕대로 먹게 된 것은 덤이구요. 글쎄요. 이런 조악한 복수를 통쾌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알라인 다르보리' 감독, <레드 닷>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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