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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Comedy

HOMAGE _ 카우보이의 노래, 코엔 형제 감독

그냥_ 2019. 9. 2.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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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지금 어딘가에 또 한 명의 아이가 있다.

노래와 총질을 배우며 전설이 되길 꿈꾸는 아이

언제가 그는 그 아이를 만날 테고

다르고도 같은 이야기가 또 생겨날 것이다.

 

 

 

 

 

 

 

 

코엔 형제 감독,

『카우보이의 노래 :: The Ballad of Buster Scruggs』입니다.

 

 

 

 

 

# 1.

 

죽음의 춤판이 벌어집니다. 한껏 멋 부린 총잡이들이 낡은 기타를 둘러메고 흥겨운 노래를 부릅니다. 어차피 한번 살다 가는 인생. 죽기밖에 더하겠냐는 식의 능동적 허무주의가 6개의 옴니버스를 관통합니다.

 

부유하는 정체성입니다. 대부분의 인물들에겐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 있는 몇몇 카우보이들은 이름으로 불리기보단 어떤 캐릭터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 <카우보이의 노래> 속 '버스트 스크럭스'는 '샌사바의 노래하는 새'로 불리길 원하지만 그의 바람대로 되지 않습니다. '리아타패스의 쥐새끼'는 그가 원하는 별칭이 아니었죠. <알고도네스 인근>에서 은행을 털던 한 사내 역시 그가 누구인지는 중요시되지 않습니다. 그저 그와 같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뿐이고 심지어 그런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마저 건조하게 휘발됩니다. 자신을 증명해 줄 것은 낡은 현상 수배지와 모래바람에 실려 떠도는 소문뿐입니다. 그럼에도 특정할 수 없는 불안한 정체성이 담긴 별칭들이 허세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존재들의 공허한 발버둥이 짙게 묻어나고 있죠.

 

 

 

 

 

 

# 2.

 

서부개척시대는 골드 러시로 대변되는 물질과 욕망의 시대입니다만 역설적으로 원하는 것은 누구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허상을 쫓던 바보들의 시대죠.

 

<알고도네스 인근>의 사내는 은행을 털러 가지만 그에게 허락된 돈은 없습니다. 보안관 무리에 의해 나무에 목이 매여 죽음을 직감한 순간 죽음 역시 마음대로 가질 수 없죠. 인디언 무리는 찰나의 희망을 눈앞에 보여준 후 조소와 함께 가져가 버립니다.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한 카우보이에 의해 목숨을 건지지만 결국 또다시 소도둑으로 몰려 교수대에 매달리게 됩니다. 교수대에 매달려 파란 옷 아가씨의 아름다움을 보자 그제야 시대는 그 아름다움을 볼 목숨을 앗아갑니다.

 

<금빛 협곡> 속 금광 찾는 노인 역시 금덩어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배에 구멍이 나는 걸 감수합니다. <낭패한 처자> 앨리스 역시 오빠의 확신에서 벗어나 멋진 남자와 함께 주도적인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 합니다만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첫 번째 행동은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일이었죠. 풍요를 꿈꾸는 영광의 시대입니다만 사실은 영광스러워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야만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라는 대목으로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을 인용하는 연사에겐 팔다리가 없습니다. 적어도 서부에선 돈벌이가 되지 못하는 민주주의는 셈을 할 줄 아는 닭 한 마리보다도 가치가 없죠.

 

 

 

 

 

 

# 3.

 

하지만 총알이 빗발치고 죽음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시대에도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작품은 미국인들에게 기독교가 종교 이상의 무언가가 된 이유 중 하나를 성실히 묘사합니다. 불안정한 시대 안에서도 사랑은 움튼다는 걸 확인합니다. '샌사바의 노래하는 새'는 그의 발이 되어주는 말에게 '댄'이라는 친절한 이름을 선물합니다. 금광을 찾던 노인에게 금광과 그 금광을 숨기고 있는 세상은 의인화된 친구입니다. 빌리와의 결혼을 승낙한 '앨리스'는 오빠의 강아지와 귀여운 프레리도그를 보며 맑은 웃음을 띄우고, 저승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탄 아내는 가족의 사랑을 추억하며 남편을 맞으러 가죠.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인물들의 삶은 정확히 그러합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처절한 비극의 공백을 낭만으로 빈틈없이 메우는 감각이랄까요. 되는대로 사는 듯한 인물들의 삶에서 강인하고 끈질긴 생명력이 엿보입니다. 처절함과 낭만이 공존하면서도 이 정도의 설득력을 갖는 장르는 서부극 외엔 찾기 힘들다는 걸 증명합니다. 크게 보면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모든 것에 초연한 듯 능청스러운 인물들과 공포에 찌든 인물들로 분류할 수 있을 텐데요. 둘의 태도는 극단적으로 대조됩니다만 동시에 내면엔 뚜렷한 공통점 역시 읽힙니다.

 

감독은 시대를 관통하는 몰인간성과 낭만주의와 허무주의와 이 모든 것들을 무의미하다 비웃는 염세주의적 분위기를 멋들어진 연출과 함께 선보입니다. 단순히 황량한 사막에서 말을 타거나 총을 쏘는 게 서부극이 아니라 말합니다. 일련의 정서와 시대정신이 그 시대와 그 시대를 다루었던 서부극이란 장르의 본질이라는 걸 포착합니다. 에피소드들의 서사와 주제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과 배우들의 대사 한마디와 표정 한 순간 모두에 깊은 향수와 존중이 묻어납니다.

 

 

 

 

 

 

# 4.

 

액자를 거듭 파고드는 구조는 인상적입니다. 관객이 앉아 있는 극장에서 스크린으로 한걸음 들어갑니다. 그 스크린에서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갑니다. 책은 다시 분절된 옴니버스로 세분화되고, 분절된 옴니버스들은 접점 없이 독립되어 있습니다. 장인이 만든 초콜릿의 겹겹이 쌓인 포장지를 한 겹 한 겹 벗겨내 조심스레 한입 맛보는 느낌이랄까요. 소중하게 보관된 무언가를 조심스레 엿보는 느낌은 에피소드에 완결성을 부여합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읽어 주시던 동화집을 나이 들어 다시 읽어보는 기분입니다. 감독이 이 장르를 대하는 진중한 태도와, 관객들 역시 이 장르를 소중하게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함께 전달됩니다.

 

 

 

 

 

 

# 5.

 

감독에게 서부극은 멈추지 않는 마차이자 세울 수 없는 시간과 같나 봅니다.

 

마지막 에피소드 <시체>는 나름의 이유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신을 만나러 가는 마차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영적인 분위기의 배경과 색감이나, 마지막 미지의 호텔과 2층 계단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빛은 신을 만나러 간다는 것 외의 다른 해석이 불가능하게 하죠. 이 에피소드는 구체적인 자기 서사 외에도 짧게는 자기 영화에 대한 종언이자 크게는 서부극이라는 장르에 대한 종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흘러가버린 시간에 대한 회한과, 서부극이란 장르가 할 만큼 했다는 존중과, 장르의 누적된 성취에 대한 존경심이 함께 엿보인달까요.

 

여담으로 인디언에 얽힌 역사에 있어 비겁함이 없다는 것 역시 감독이 얼마나 사려 깊게 이 영화를 다루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당시를 살아가던 이민자들이 바라보는 원주민에 대한 시각을 과장되게 표현하면 자칫 인디언을 악당으로 그릴 소지가 다분합니다만, 이 영화는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존중과, 일방적으로 희생되어 나간 원주민에 대한 존중과, 당시 서부를 '개척'이란 이름으로 침략하던 미국인에 대한 책임을 균형감 있게 묘사합니다.

 

 

 

 

 

 

# 6.

 

수다스러운 코미디임에도 묘한 처연함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게 영화의 가장 두드러진 매력일 겁니다. 무수히 많은 인물들이 쏟아내는 더 무수히 많은 수다스러움이 되려 흘러가버린 무언가에 대한 외로움처럼 들리는 건 저뿐만은 아니겠죠.

 

아마도 이 영화가 최고의 서부극 영화가 될 수는 없을 겁니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석양의 무법자>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조지 로이 힐 감독의 <내일을 향해 쏴라>나 존 포드 감독의 <역마차> 같은 불멸의 명작들이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으니까요.

 

다만 아무래도 상관없을 겁니다. 애초에 최고의 서부극이 되어 보겠다고 만든 영화가 아니니까요. 확실한 건 여기가 끝이구나라는 생각은 하게 됩니다. 생명력이 다한 장르에 대한 추모 연설로 이 정도면 차고 넘칠 만큼 훌륭합니다. 앞으로 어떤 눈치 없는 감독들은 분명 서부극에 또 기웃거리겠지만, 글쎄요. 이 이상은 사족 같군요. 때론 마음을 담아 헌화를 올렸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오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코엔 형제 감독, <카우보이의 노래>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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