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Film/Comedy

독일의 용기, 독일의 자신감 _ 그가 돌아왔다, 데이비드 우넨트 감독

그냥_ 2019. 4. 10. 23:30
728x90

 

 

# 0.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지만 시종일관 진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언변에 감화되기도 하고 심지어 사랑한다 소리치기도 합니다. 독일 영화에서, 그것도 군복을 입고 나치식 경례를 하는 모습의 히틀러에게 말이죠.

 

아시다시피 독일을 비롯한 다수의 유럽 국가에선 나치식 경례 자체가 법적으로 문제가 됩니다만, 히틀러에겐 알 바가 아닙니다. 경례를 하지 않는 2014년의 요즘 사람들을 예의 없다고 불평하는 히틀러의 모습을 담은 간결한 오프닝으로 감독은 사람들이 외면하고 있는 금기에 거침없이 도전하겠노라 선언합니다. 영화 속 히틀러는 원래 자신의 모습 그대로 행동하지만 사람들은 알아서 최대한 선의로 해석합니다. 과격한 표현은 메서드 연기로 시대착오적 언동은 풍자로 받아들여집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팔자에도 없던 유튜브 스타가 되어버린 히틀러를 함께 따라가 보죠.

 

 

 

 

 

 

 

 

'데이비드 우넨트' 감독,

『그가 돌아왔다 :: Er ist wieder da』입니다.

 

 

 

 

 

# 1.

 

전반부는 뜻하지 않게 미래로 와버린 인간,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도 독보적이라고 밖엔 달리 말할 수 없는 악당 아돌프 히틀러가 겪는 우여곡절을 다룬 코미디로 이루어집니다. 아직도 자신을 1930~40년대 나치 독일의 총통이라 생각하는 주인공과 너무도 달라져버린 현대 독일 간의 괴리가 관전 포인트죠.

 

현대로 워프 된 히틀러의 모습을 사람들은 흥미로운 듯 카메라에 담습니다. 감히 하기 힘든 과격한 연기를 거리낌 없이 선보이는 아티스트(처럼 보이는 인물)의 등장에 호기심을 보이는군요. 브란덴부르크 광장 한가운데 나부끼는 소련의 깃발과, 감히 총동에게 욕지거리를 내뱉는 광대, 듣도 보도 못한 세그웨이의 행렬과, 막타를 날리는 페퍼 스프레이가 통렬한 웃음을 자아냅니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가판대에 걸린 신문 속에 적힌 날짜를 보며 쓰러지는 히틀러의 모습은 우스꽝스럽습니다.

 

 

 

 

 

 

# 2.

 

가판대의 주인이 건네는 견과류 스낵을 보며 빵을 지급하지 못해서 곡물을 이런 식으로 배급하는 거냐며 묻는 비통한 표정이나, 때 묻은 팬티를 들고 멀뚱멀뚱 서 있는 모습이 역설적입니다. 기자 '자바스키'와 나눈 절절한 대화의 끝이 '전격 세탁소'로 끝나는 대목이나, 자신의 군복이 어딨는지 알고 있냐는 단호한 일갈의 끝이 동네 세탁소로 점철된다는 코미디 역시 관객의 커피를 뿜어내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분홍빛 꽃무늬 차량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올라타는 히틀러의 모습이 이색적입니다. 비 오는 바닷가를 볼품없이 나부끼는 남루한 모습은 시대가 더 이상 그를 위한 것이 아님을 상징합니다. 화가였던 히틀러가 돈을 벌기 위해 초상화를 그린다는 대목에선 뼈가 느껴집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국가주의를 역설하던 히틀러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일회용 컵을 버리는 대목도 재미있습니다. 그의 국가주의란 결국 그의 '국가'주의가 아닌 '그'의 국가주의였던 셈이죠.

 

 

 

 

 

 

# 3.

 

생각할 거리가 많은 섬뜩한 블랙코미디가 이어집니다. 가판대를 채운 터키어로 쓰인 신문을 멍청히 바라보는 히틀러의 모습은 노골적입니다. 극단적인 순혈주의에 근거한 전쟁 이후, 독일의 젊은 남성이 깡그리 사라지며 생긴 노동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적극적 이민정책을 펴야 했던 독일의 모순을 간결하게 묘사합니다.

 

히틀러 앞에 현 독일의 정치집단은 가루가 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앙겔라 메르켈'은 어벙한 눈빛의 카리스마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어설픈 여자가 됩니다. 그녀가 이끄는 기민당과 기사당의 대연정은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를 어설프게 따라 하는 것으로 폄하되죠. 히틀러와 대척점에 있었던 사민당의 대표 역시 위엄 없는 추악한 뚱보와 뜨개질 타령이나 하는 유순한 암탉으로 조롱받습니다. 그나마 녹색당은 우호적인 듯 보이지만 그마저도 자연주의를 제 입맛에 맞게 제한적으로 곡해한 것일 뿐입니다.

 

 

 

 

 

 

# 4.

 

사람들의 인터뷰는 다소 충격적입니다. 동서독 통일이 1990년인데요. 24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분단의 상흔은 아직도 깊게 남아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신뢰하지 못해 투표를 하지 않는다 말하는 동독 출신의 여성. 그녀는 여전히 투표는 조작된다 믿으며 투표행위가 자신을 포함한 민의를 충분히 대변해주지 못한다 생각합니다. 정치 효능감의 상실이 정치 무관심으로 이어지고, 그 가운데 누적된 스트레스를 품어줄 수 있는 카리스마 있는 리더가 이들을 동력으로 급격히 성장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이야기죠.

 

이민자 문제에 대한 갈등은 더욱 심각합니다. 이민자와의 실존하는 갈등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던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되려 외국인 혐오자로 몰리게 된다'라 말하는 지점은 유아적인 박애주의가 얼마나 길바닥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죠. 물론 인터뷰의 말미에 '내가 없는 동안 민주주의는 별 효과가 없었다'라는 히틀러의 내레이션을 통해 배타적 국가주의 역시 문제가 많다는 사실 또한 놓치지 않습니다. 역시 이민자 문제는 웬 연예인이 감성팔이나 하며 떠들어 대도 될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억눌린 스트레스는 폭력으로 분출됩니다. 강제 노동 수용소가 필요하다 말하는 노인의 눈빛은 섬뜩합니다. 아프리카에서 독일로 넘어온 사람들은 지능이 낮다는 경악할만한 인종차별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말하는 남자의 얼굴은 진심으로 가득합니다. 필요하다면 조국을 위해 자살도 할 수 있다는 미친 소리를 마초적인 멋으로 이해하는 멍청이도 등장합니다. 폭력적 방식으로의 스트레스 분출의 상징과도 같은 히틀러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감독은 역사는 언제고 반복될 수 있다 말합니다. '국민의 소리 없는 분노와 불만은 마치 1930년을 떠올리게 한다'라는 히틀러의 독백은 섬뜩하죠.

 

 

 

 

 

 

# 5.

 

1/3 지점 즈음 애완견 사육사와의 인종주의와 관련된 인터뷰는, 이 우스꽝스러운 인물이 결코 우스꽝스럽지만은 않은 인물이란 당연한 사실을 환기하게 합니다. '혼혈 정책은 답이 되지 못한다. 셰퍼드와 닥스훈트를 섞으면 셰퍼드는 영원히 사라지는 셈이다. 지금의 독일이 그렇다. 독일인을 지키지 않으면 독일인이 사라질 것이다'라 말하는 히틀러의 궤변에 사육사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감독은 이 씬을 통해 지금 이 괴물을 가지고 놀고는 있지만 그렇다 해서 이 괴물이 사람이 되는 건 아니라는 단호한 견해를 한번 못 박고 지나가는군요. 자신의 손가락을 문 강아지에게 거리낌 없이 총구를 당기며 히틀러는 말합니다. '개에게 먹히는 건 폭력뿐이다.' 히틀러의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은 그의 눈엔 그저 개였던 걸까요.

 

 

 

 

 

 

# 6.

 

여기까지만 보면 '욕해도 문제가 없는 악당'들만 골라다 욕하고 비웃는 유병재식 블랙코미디처럼 보입니다만, 다행히도 감독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들어갑니다. 후반부는 히틀러의 눈으로 본 현대 독일의 풍자를 넘어 '지금도 히틀러가 통용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민감한 질문을 지나 '히틀러의 광기가 언제고 돌아올 수도 있다.'라는 불편한 경고를 향해 나아갑니다.

 

myTV의 <세상에, 이 친구야!>라는 이름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히틀러의 연설은 총통 자리를 고스톱 쳐서 딴 게 아님을 묘사합니다. 수분 여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그저 관중을 지긋이 바라보는 히틀러. 특유의 카리스마로 관객을 휘어잡습니다. 적절한 위트를 곁들인 사이다 발언들로 웃음과 박수를 이끌어냅니다.

 

괴벨스의 그것과 같이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때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때론 카리스마 있는 리더의 모습으로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나갑니다. 강아지를 총으로 쏴 죽인 문제로 곤욕을 겪기도 하지만 그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의 광기는 강아지의 처참한 죽음도 막지 못하죠. 히틀러는 자서전 <나의 투쟁>을 집필하듯 동명의 소설 <Er Ist Wieder Da>를 집필합니다. 소설을 영화로까지 만듭니다. 원작 소설의 영화화 속에 등장하는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화인 거군요. 흥미로운 구성입니다.

 

 

 

 

 

 

# 7.

 

히틀러는 의심의 여지없는 독재자였습니다만, 적어도 겉보기에 독일인들에게까지 지배자는 아녔습니다. 최악의 학살자였지만 적어도 당시 독일인들에겐 스스로 뽑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고 열광적인 리더였죠. 이 지점은 독일에겐 숨기고 싶은 부끄러움이자 치부입니다만 그렇다고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영화의 가치는 이 '치부'를 건드린다는 데 있습니다. 현대로 돌아온 히틀러는 결국 독일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데 성공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히틀러에게 금기시된 경례를 건네고 그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며 그의 말을 담은 영상을 클릭합니다. 그와 논쟁을 벌이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설득하거나 논박하는 데 실패하다 못해 감화되기까지 하죠. 그는 스타가 되고 정치적 발언력을 확보합니다. '유명해져 봤자 거기서 더 뭘 하겠어?'라는 나태한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영화 내내 히틀러는 낡은 군복 한벌로 거기까지 올라간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지 말란 법도 없단 소리죠.

 

독일의 스타가 된 히틀러라는 어이없는 양상의 근거가 작가가 임의로 설정한 히틀러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독일에 산재해 있는 사회분열의 단초, 이를 테면 동서독 갈등의 잔재라던지, 국가주의에 대한 환상이라던지, 반 이민 정서라던지, 반 이슬람-반 아프리카 정서라던지, 경제 불황에 대한 불만 따위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독은 히틀러를 빌어 묻습니다.

 

"그래. 히틀러의 등장은 막을 수 있겠지. 하지만 콧수염도 달지 않고 한 손을 멀리 뻗지도 않는 또 다른 누군가가 등장한다면 독일은 그걸 막을 수 있을까? 사회에 산적해 있는 갈등과 스트레스의 씨앗들을 진짜 이대로 둬도 괜찮은 거야?"

 

 

 

 

 

 

# 8.

 

어느 정도의 배경지식을 강요합니다. 역사적 인물과 그 인물을 둘러싼 서사와 그 인물에 대한 평가를 일정한 정도는 알고 있어야 영화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페이크 다큐 특유의 투박한 질감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픽션과 실제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드는 장면들이 군데군데 등장합니다. 교묘한 풍자와 신랄한 통찰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해줄 스스로의 주관이 있어야 합니다. 지들끼리 웃고 넘기는 독일어 언어유희와 독일 문화의 묘사들을 슬그머니 넘기며 수용할 수 있는 관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영미권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유럽식 유머 코드가 이질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난점들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문학적 상상력을 멋들어지게 영상으로 옮긴 예 중 하나라 할 법합니다. 실존했던 악당을 이렇게까지나 입체적으로 다루어내는 작가의 용기와 이 정도 화두는 얼마든지 소화할 수 있다는 독일인들의 자신감이 시나리오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만큼이나 선명합니다.

 

 

 

 

 

 

# 9.

 

2013년 양우석 감독의 <변호인>이 개봉합니다. 2017년엔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와 장준환 감독의 <1987>이 개봉했죠. 위와 같은 근현대사, 그것도 독재를 다루는 영화가 개봉하고 흥행하는 걸 보며 중국 같이 아직 독재 국가의 국민들이 부러움을 표한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위와 같은 한국의 근현대사 영화들은 모두 아픔의 역사일지언정 '승리'의 역사입니다. 독재를 넘어 지금과 같은 자유로운 나라를 만들었다는 시민들의 고양감을 자극하는 자축의 영화죠. 위와 같은 영화를 보며 시민들은 분노할지언정 부채감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전두환의 광주학살이나 독재정권에 부역하던 사법권력에는 시민들의 책임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래서 궁금합니다. 우리는 과연 시민들의 '치부'가 담긴 역사를 영화로 만들 수 있을까. 우리의 히틀러를 영화로 만들 수 있을까. 그런 영화를 만든다한들 관객들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글쎄요.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네요.

 

그래서 내심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독일이 부럽습니다. 마치 <변호인>과 <택시운전사>와 <1987>을 부러워하던 중국인들처럼 말이죠. 뭐,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아직 할 수 없다'는 건 '할 수 있는 영역이 많이 남아있다'는 말도 되는 셈이니까요. 방구석에서 영화나 보는 주제에 구태여 한국 영화를 싸잡아 비겁하다 욕하기보단 우리에게도 이런 자유와 이런 시민의식과 이런 용기와 이런 자신감의 영화가 얼른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응원하고 싶습니다. 기대해도... 되는 거겠죠? '데이비드 우넨트' 감독, <그가 돌아왔다>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 본 블로그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글에서 다루는 작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댓글", "포스트를 자신의 블로그로 유인하는 데 이용하려는 댓글", "무분별한 맞팔로우 신청 댓글" 등은 삭제 후 IP 차단될 수 있습니다.

 

 

"좋아요", "댓글""구독"

 

은 블로거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