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미리 말씀드리건대 공포물 아닙니다. 넷플릭스에서는 스스로 스릴러라 규정하고 있습니다만 개뿔. 웃기지도 않는 소리죠. 포스터 위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핏자국 글귀는 훼이크입니다. 예고편에서의 묘하게 섬뜩한 제이크 질렌할의 눈빛도 훼이크죠.
화가의 피에 대한 이야기도, 정신병원에 대한 썰도, 악령과 움직이는 그림에 대한 떡밥도 몽땅 훼이크입니다. 공포물이란 기준에서 이 영화가 만들어 내는 긴장감은 0에 수렴합니다. 차라리 신서유기 인물퀴즈가 더 쫄깃쫄깃할 정도죠. 뭔가 등골 서늘한 공포물을 기대하셨다면 이 영화는 어지간해선 당신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봐도 좋을까라 물으신다면 글쎄요. 일단 들어보고 판단하시죠.
댄 길로이 감독,
『벨벳 버즈소 :: Velvet Buzzsaw』입니다.
# 1.
물론 비운의 무명 화가 디즈의 죽음과, 오싹한 느낌을 주려 최선을 다한듯한 괴기한 유작들, 그리고 유작에 깃든 저주로 인해 하나하나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공포감을 중심으로 진행되긴 합니다. 주요 인물들이 하나하나 리타이어 할 때마다 각기 다른 참신한 최후를 맞이하는 가운데 나름의 설득력도 가지고 있죠.
문제는 시나리오는 혼자 용을 쓰는데 정작 관객은 무섭지가 않다는 점입니다. 관객을 무섭게 할 만한 연출은 끔찍할 정도로 빈약합니다. 무작정 갑자기 튀어나오는 괴팍한 귀신이나 귀를 뽑을 듯 큰 소리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영화를 만들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도 명색이 공포물이라면 적어도 구도와 분위기와 음향 따위를 통해 최소한의 의외성과 긴장감은 불러일으켜 줬어야죠.
작품을 견인하는 주요 서사와, 인물들이 죽어나가는 공포 서사가 교차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가운데 두 이야기 간의 화학적 결합이 거의 안되다 보니 '안전한 시간'과 '위험한 시간'을 직관적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인물이 위험에 빠지는 순간이 오면 지금 이 인물이 죽을 거라고 거의 광고를 하고 있죠.
# 2.
'벨벳'은 부드러운 비단의 일종이고 '버즈소'는 날카로운 회전 톱의 영어명이니까 '벨벳 버즈소'란 제목은 비단으로 만든 회전 톱 정도가 될 겁니다. 예술이란 비단처럼 보이지만 결국 무언가를 자르고 파괴하는 회전 톱이라는 걸 수도 있을 테구요. 날카롭게 관념을 관통하는 회전 톱처럼 보이지만 그래 봤자 비단으로 만든 톱으론 아무것도 잘라낼 수 없다는 걸 의미할 수도 있겠죠.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끄는 피에 젖은 톱날을 은유하는 것일 수도, 무언가 있어 보이는 제목을 던져놓으면 그걸 억지로라도 해석하려 드는 사람들을 비웃으려는 제목일 수도 있겠네요.
왜 때문에 제목을 그렇게 정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어느 쪽으로든 풍자적 성격이 뚝뚝 묻어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실제 공포물로서의 재미를 버린 게 아쉽긴 합니다만 대신 평일 오후 노래방 사장님 인심처럼 넘쳐흐르는 풍자가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 3.
오프닝을 살펴볼까요. 시작부터 감독은 어마어마하게 복잡하고 넓은 아트홀을 보여주더니 아무런 대사도 없이 다음 문구를 들이밉니다. There's no confusion in my house. 우리 집에는 혼란이 없다. 세상 복잡한 과잉된 이미지를 던져놓고선 그게 뻔뻔하게 할 소린가 싶죠. 감독은 간결한 도입을 통해 역설적이고 풍자적인 영화의 성격을 감각적으로 선언합니다.
예술가 연인이 바람났다는 걸 알게 되고서 울먹이는 조세피나. 그녀에게 반해 있던 비평가 모프는 썸녀를 위로하며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God, fucking people(조세피나), Who?(모프), Everyone(조세피나) 대놓고 욕을 하는군요. 영화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예술가, 비평가, 재력가, 중계자 할 것 없이 죄다 Fucking People입니다.
곧이어 작품 Sphere(구)가 등장합니다. 제이크 질렌할의 모프가 독특한 작품에 관심을 가지죠. 삶의 다양성을 은유한다는 작품에 대한 뭔 소린지는 잘 모르겠지만 듣다 보면 그럴싸한 이야기를 유려하고 장황하게 뱉어내고서 말합니다. I'm posting a review. How much is it? So much easier to talk about money than art. 네. 그럴싸하게 떠들어봐야 예술은 돈만 못합니다.
# 4.
느닷없이 존 말코비치가 지나갑니다. 예술작가 피어스 죠. 그 뒤로 붉은 입술 모양 소파에 앉은 모프는 조세피나에게 비평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만 바람난 연인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조세피나에게 모프의 말은 귓등으로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모프의 잘난 비평은 여자를 꼬시기 위한 작업에 불과하고 바람난 남자만도 못합니다.
모프가 조세피나에게 작업을 거는 동안 냉철한 갤러리의 운영자 로도라는 신인 예술가에게 접근합니다. 로도라는 예술을 했던 자신의 과거를 익숙한 솜씨로 쏟아냅니다. 하지만 직후 이어지는 로도라의 경쟁자 존 돈돈과 예술가 피어스의 대화에서 그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신인을 빨아먹어 돈을 버는 것뿐임을 여과 없이 보여주죠.
물론 존 돈돈과 피어스에게도 예술은 돈입니다. 피어스는 개똥철학을 열변하지만 자기 작품의 복제품과 프린트 등 자체 브랜드를 통해 판매하는 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사업가입니다. 로도라가 작품 Sphere를 700백만 달러에 팔았다 말하며 술을 괜히 끊었다는 말로 자신에게 더 큰돈을 벌어줄 로도라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을 아쉬워합니다.
# 5.
여기까지가 오프닝 10분입니다. 둔한 제눈에 걸린 것만 이 정도니 아마 더 많은 풍자가 숨어있을 수도 있겠죠. 이 정도 호흡과 밀도의 예술계에 대한 풍자가 영화 런타임 111분 내내 그야말로 쏟아집니다.
비평가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젊은 예술가를 서슴없이 글로 죽입니다. 야망을 가득 품은 갤러리 비서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기꺼이 다리를 벌립니다. 비서는 성공을 위해 비참히 죽은 화가의 작품을 훔치고, 부와 권력을 쥔 갤러리 운영인은 노련한 솜씨로 죽은 화가의 유작을 합법적으로 훔쳐냅니다. 자신이 죽거든 모든 작품을 없애달라던 죽은 화가의 유언은 돈에 미친 사람들의 무심한 거짓말에 무참히 짓이겨지죠.
모든 작품은 가격으로 평가됩니다. 모든 사람은 사업으로 인식됩니다. 모든 비평은 가격을 높이는 데 복무합니다. 비싼 가격으로 사들인 작품들은 다시 원금 회수를 위해 렌트됩니다. 모든 대사는 고매한 예술로 시작해 천박한 돈으로 마무리됩니다. 처참한 죽음이 뿌린 피 위엔 아이들이 뛰놀고, 아이폰의 시리는 팝 아트라는 말을 몇 번이고 알아듣지 못하죠. 고상하고 우아한 벨벳처럼 보이는 예술은 사람을 파멸로 몰가가는 잔인한 버즈소입니다.
<나이트 크롤러>를 통해 기레기들을 통렬하게 깠던 감독 앞에 현대미술은 그야말로 누더기가 되네요. 이미지가 쏟아져 내리는 동안 메시지는 휘발되고 없습니다. 돈을 벌고 싶은 사람과 돈을 벌게 해 줄 사람과 돈벌이에 이용될 사람과 그 사이에서 매매 가격으로 평가되는 예술품이란 노예만이 있을 뿐입니다.
# 6.
흥미로운 것은 영화 스스로가 그토록 비판하는 현대 예술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프닝부터 강렬한 이미지들과 개성 강한 인물들이 쏟아져 내리는데 정작 관객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온갖 그럴싸해 보이는 형용을 주고받지만 그 역시 와닿는 바가 없죠. 얼굴과 이름과 역할을 매칭 하는 게 살짝 버거울 정도로 영화는 혼자 내달립니다. 마치 관객은 내버려 둔 채 홀로 고고한 한 마리 새라도 되는 양 달려 나가 버리는 허세 예술가들처럼 말이죠.
비판과 풍자의 지점 역시 상투적입니다. 현대미술이 재력가들의 재테크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건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다. 갤러리가 셀러브리티들의 파티장이자 작품들의 노예시장이란 것 역시 새로운 사실이 아니죠. 비평계가 창작계와의 깊은 유착적 카르텔을 가지고 있다는 것 역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은연중에 눈치채고 있는 사실이며, 그 모든 것들이 창출하는 부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광기에 젖어 있다는 것 역시 지루한 클리셰입니다.
# 7.
풍자를 위해 공포물이라는 장르를 데려다 막 대하는 무례함은 조세피나의 저렴함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허망하게 휘발되는 이야기는 모프의 허세와 닮아 있죠. 아무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은 로도라의 이기심과 닮아 있고, 비판조차 기계적으로 전시하는 데 그친다는 점은 그레첸의 비굴함과 닮아 있습니다. 내용 없는 감각적인 표현을 동원해 자신의 정체성을 아티스트로 규정하고 싶어 하는 욕망은 피어스의 가식과 닮아 있으며, 영화가 하필 무수한 자기 복제를 통한 월정액제 플랫폼인 넷플릭스를 통해 제작 유통되고 있다는 건 존 돈돈의 욕망과 닮아있죠.
앞서 말씀드린 대로 공포물을 기대하시면 안 됩니다. 스릴러나 미스터리물은 더더욱 아니구요. 찰진 대사와 인물들의 우스꽝스러운 천박함을 하나하나 뜯어가며 지적 유희를 즐긴다는 감각으로 접근하면 나쁘지 않은 영화입니다. 다만 신랄하게 까대는 동안 '그래서 뭐 어쩌라고'에 대한 대답은 전혀 없으니 그런 비겁함을 이해할 수 있는 아량도 함께 준비하셔야겠네요. 날카롭게 다듬은 도끼로 멋들어지게 현대 예술을 처치하고 마지막엔 자기 발등을 찍는 영화랄까요. 댄 길로이 감독, <벨벳 버즈소>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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