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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헤어지는 중입니다 _ 휴먼 보이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그냥_ 2025. 3. 2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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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예술로 사색한다는 것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휴먼 보이스 :: The Human Voice』입니다.

 

 

 

 

 

# 1.

 

폭이 넓은 붉은 드레스의 틸다 스윈튼이다. 건조한 스튜디오를 걸어 의자에 앉는다. 창백해서 더욱 미술적인 마스크 위로 강한 그림자가 떨어진다. 검은색 드레스로 갈아입은 배우는 다시 스튜디오를 가로지른다. 오프닝이다.

 

푸른 정장의 여자는 도끼를 산다. 영수증은 거절. 교환할 일은 없다. 볼일을 마친 여자는 키우는 개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집을 수놓고 있는 수많은 그림들을 뒤로한 채. 개는 줄지은 여행가방의 냄새를 맡는다. 여자는 4년간 사귀었던 애인과 사흘 전에 헤어졌다. 책과 앨범을 정리한 그녀는 스튜디오의 콘크리트 벽이 눈앞에 펼쳐진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운다. 개는 침대 위 곱게 펼쳐진 남자의 양복 위에 기댄다. 너저분한 약통 사이에 놓인 샤넬 넘버 파이브. 화장을 마친 여자는 붉은 니트를 갈아입는다. 문득 분노가 치밀어 눈가에 경련이 인 여자는 도끼를 들어 양복을 난도질한다. 시야는 버드뷰로 바뀐다. 이 모든 공간이란 스튜디오에 차려진 세트임을 폭로한다. 인위적이고 임시적이며 실험적이고 따라서 관념적이다.

 

알약 무더기를 삼킨 여자는 비참한 양복 옆에 다소곳이 눕는다. 걸려온 전화를 애써 무시하려 하지만 개가 여자의 귀를 핥아 깨운다. 발신자 제한 표시를 본 여자는 샤워기에 머리를 적신다. 키친의 서랍이 열리지 않는다. Shit. 커피를 내려 마시는 데 다시 전화가 울린다. 그다. 여자는 반가우면서도 그것을 애써 숨긴다. 세트의 안과 밖을 자유로이 오가는 동안 전화는 계속된다. 때론 비굴하게 때론 과격하게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은 전화의 형식을 빌린 자기 고백처럼 들린다. 마지막 인사마저 거절한 남자의 말에 여자는 폭주한다. 전화는 끊긴다.

 

새로이 옷을 꺼내어 입는다. 테라스의 화분을 시작으로 세트 곳곳에 휘발유를 뿌린다. 다시 전화를 걸려온 남자에게 우리가 살던 집을 지켜봐 달라 말한다. 점화. 뜨겁게 그리고 시원하게 타오르는 불길을 지켜보며 여자는 먼저 전화를 끊는다. 이내 소방관이 스튜디오로 출동하고 여자는 개에게 이젠 내가 주인이라 말한다. 열린 스튜디오의 문 너머 세상과 빛이 들이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 2.

 

단편(短篇)은 길이가 짧은 작품이라는 본래의 뜻뿐 아니라 전반에 걸치지 않고 부분에 국한된다는 면에서도 단편(斷片)적이다.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30분짜리 단편은 그 길이와 별개로 틸다 스윈튼의 정의처럼 익숙하고 지루한 위기에 봉착한 여자에 대한 단상이다. 여자는 여전히 사랑하는 연인과 사흘 전에 헤어졌고 영화는 그녀와 떠나간 남자 사이의 마지막 전화를 묘사한다. 감독과 배우는 도끼를 든 여인의 곤경을 창작하고 관찰하고 탐구함으로써 작품의 의의를 설득하고, 그 끝에 시네마의 의미를 사색한다.

 

클리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지만, 경험한 누구나 알다시피 이별이란 극단적인 곤경이다. 상대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상황은 지극히 일방적이라 내팽개쳐진 상대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것은 지성으로도 설득으로도 보상으로도 시간으로도 애정으로도 갈구로도 만회할 길이 없다. 초조함과 광기에 잠식된 여자는 문자 그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다한다. 낙관과 재치, 사과와 순종, 자해화 협박이 대화와 독백 중간 어딘가의 형태로 차근차근 나열되고 차근차근 좌절된다.

 

여자는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사실 사랑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다소곳이 정리된 캐리어처럼 사랑은 돌이킬 수 없고, 그것은 사흘간 충분히 고통받은 여자도 이미 알고 있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알약을 삼킨 그녀는 사실 살고 싶은 사람이며 사랑을 갈구하는 동안 지키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대한 것이다. 이때의 되찾고자 하는 존엄이란 특별히 숭고한 것이 아니다. 그저 남들과 똑같은 높이까지 간신히 회복하는 것으로서의 절박함이다. 부서진 존엄을 상징하는 것은 역시나 도도한 틸다의 모습과 대비되는 개다. 이제 막 실연한 여자는 주인 잃은 개와 다를 바 없는 비참함이지만, 매력적인 복식과 과시적인 화장과 미술적인 공간을 방황하고 교양을 치장함으로써 최선을 다해 자아를 방어한다.

 

여자는 자신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남자를 되돌리지 못할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행한다. 약속된 구원에 도달하기 위한 엄격한 의식을 하나하나 수행해 나가듯 말이다. 결국 마지막 방화란 잔인한 고통으로부터의 끔찍한 해방이다. 먼저 전화를 끊었던 상대에게 스스로 전화를 끊었다는 것. 모든 피학적인 상념으로 가득한 정신적 공간을 저주와 제의의 중간 어딘가의 함의로 불태웠다는 것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이 모든 과정의 끝에 스스로를 불태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당하게 출구를 나섰다는 것이다.

 

 

 

 

 

 

# 3.

 

영화와 연극의 결합은 주인공의 결별과 그에 대한 고찰만큼이나 중요한 아이디어다. 영화적 요소들은 상황의 맥락과 현실감을 제공하고, 연극적 요소들은 전화하는 여자의 심리를 마치 방백 하듯 받아들이게 한다. 감독은 처음엔 스튜디오 안의 세트라는 것은 단순히 노출시키고 감추길 반복하며 그 추이를 실험하다, 점차 배우로 하여금 직접 오가게 함으로써 '해체'하고 '중첩'시킨 끝에 마침내 '결합'한다. 마침내 전화는 방백과 독백과 대화가 결합되고, 배역은 도끼를 든 여자와 여자의 직업인 배우와 그런 여자를 연기하는 틸다와 다시 그녀를 낳은 페드로와 다른 모든 여자들의 이별이 두텁게 결합한다.

 

그로 인해 영화는 전에 보지 못한 프레임 당 밀도와 그보다 큰 자유도를 얻는다. 스스로 충분히 온전해 보이는 세트 위로, 세트가 펼쳐진 스튜디오가 있고, 그 위로 도끼를 팔던 가계가 있으며, 다시 스튜디오의 열린 문 너머 현실이 있지만 이 모두는 그럼에도 페드로의 영화다. 정신적 단계로 세분화된 레이어를 넘나드는 경험은 허용과 해방으로서의 시네마의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 모든 레이어를 통할하는 인간 감정의 내러티브로 환원된다는 면에서 끝내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시네마란 인간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사랑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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