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모든 면에서 그녀, 아녜스 바르다.
아녜스 바르다 감독,
『행복 :: Le bonheur』입니다.
# 1.
남자 프랑수아는 도덕적으로 파탄한 인물임에 분명하나 그것은 전혀 논쟁적이지 않은 것이기에 매몰되는 것은 시시하다. 오히려 외도보다 중요한 것은 외도하는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작품이 이질적인 것은 프랑수아의 외도에도 불구하고 아내에 대한 불만이나 권태, 불성실을 연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전히 아내와 가족을 사랑하고 그로부터 큰 행복을 얻고 있지만, 새로운 여자 에밀리로 인해 추가적인 행복을 얻을 수 있었고, 그것이 행복의 총량을 증진시켰을 뿐이라는 식이다. 프랑수아를 정의하자면 '지극히 행복지향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인생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라는 명제를 지지한다면 그의 선택들은 일견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는 최대한의 행복을 지향했을 뿐이고 과정에서 아내 테레즈에 대한 미움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외도를 고백할 수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외도가 아내를 불행하게 한다면 에밀리와의 관계를 중지하겠다고까지 말한다. 프랑수아에게 오직 중요한 것은 의리가 아닌 행복이고, 때문에 그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은 역설적이게도 이기적이지 않다. 반면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큰 위화감, 보다 정직하게는 불쾌감이나 배신감까지 느낀다. 관객은 과연 무엇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일까.
# 2.
외도를 고백하는 프랑수아는 10개의 팔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에게 10개의 팔이 있고 아내에게도 10개의 팔이 있어 지금까지 끌어안고 있었지만 갑자기 11번째 팔이 돋아났을 뿐이라고 말이다. 이 11번째 팔이 에밀리를 붙잡는다 하더라도 아내를 안고 있는 10개의 팔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은 사랑의 배타성에 대해 논의하던 스파이크 존즈의 <그녀>(2013)를 연상시킨다. 프랑수아가 악인이라는 것을 차치하고 그가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에밀리를 사랑하면서도 테레즈에 대한 사랑이 줄지 않은 것이라면, 마치 사만다와 테오도르의 그것처럼 고백 이전과 이후의 에밀리가 받은 사랑은 크기도 성격도 달라지지 않아야 한다. 잔인한 아녜스 바르다는 테레즈를 추궁해 확인한다. 에밀리와 외도하는 1달 동안 자신의 사랑이 줄어든 것처럼 느껴졌냐는 물음말이다. 테레즈는 아니라 답한다. 그녀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고, 그녀가 아니라 답한 것은 진정 아닌 것이다.
프랑수아의 고백 직후 두 사람은 관계를 가진다. 갈대밭의 섹스는 일종의 실험이다. 에밀리는 프랑수아의 고백 이전의 잠자리와 이후의 잠자리가 같은 것임에도 달라졌음을 느낀다. 절망한 테레즈는 강물에 몸을 던진다. 그녀를 불행하게 한 것은 프랑수아의 외도가 아니다. 프랑수아에게 종속되는 것을 허락해 버린 자기 자신이다.
# 3.
중요한 것은 에밀리는 다른 감정을 느낀다는 점이다. 프랑수아의 양다리가 문제라면 테레즈가 에밀리에게 느끼는 배타성과 에밀리가 테레즈에게 느끼는 배타성은 뉴턴 역학의 작용-반작용처럼 동일한 것이어야 하나, 에밀리는 테레즈의 존재를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느낀다. 테레즈에게 에밀리의 존재는 목숨을 끊을 정도로 견딜 수 없는 것이었던 것에 반해, 에밀리에게 테레즈는 얼마든지 대신할 수 있는 것이었듯 말이다. 두 사람의 차이는 사랑이란 감정에 배타성뿐 아니라 관계의 맥락이 포함됨을 의미한다. 이미 관계를 선점하고 구속하는 것으로 합의한 결혼의 유무라는 맥락 말이다. 세 남녀의 이야기 뒤로 결혼과 출산에 관련된 이야기가 서브플롯으로 계속 흘러가는 이유다.
중반부 목수들이 연애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여러 사람을 돌아가며 만나고 사랑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음을 지적한다. 카메라가 두꺼운 나무를 지날 때마다 서로 짝을 바꿔 춤을 추는 시퀀스 역시 비슷한 의미다. 이 사람을 사랑했다 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특별한 괴물들만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라면, 프랑수아의 책임은 본성의 잘못이 아닌 지극히 관계적인 것이다.
이는 영화 속에서 벌어진 '아내'와 '외도'의 대비를 넘어, '현실'과 '영화'의 대비로까지 확장된다. 극 중 테레즈는 에밀리와의 외도를 견디지 못해 자살하지만, 극 밖의 클레어 드루오는 마리-프랑스 보예르와 사랑을 연기하는 남편 장 클로드 드루오를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의 음성을 주고받고 나체에 얼굴을 파묻는 것은 똑같음에도 말이다. 본질은 맥락인 것이다. 1
# 4.
그리고 다시 이 '맥락'이라는 개념은 부부의 직업으로 은유되어 성별에 따른 역학관계로 이어진다. 프랑수아는 목수고 테레즈는 재봉사다. 두 사람은 모두 각자의 플랜으로 재단하는 직업이고, 여기서 재단하는 대상은 인생, 재단의 기준은 행복이라 추측하면 무난하다. 하지만 비슷한 일을 하는 두 사람이 사용하는 공간의 크기와 주도권은 크게 대비된다. 작업실의 크기도 다르고 테이블의 크기도 다르다. 프랑수아는 작업하는 순간 타인, 특히 여성을 밀어내지만 테레즈의 공간은 프랑수아에 의해 자유롭게 침범당한다.
영화에는 노란색과 초록색과 빨간색과 보라색과 검은색이 등장하지만 어떤 것이 누구의 색인 것은 아니다. 색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동안 중요한 것은 그 색을 결정하는 건 언제나 프랑수아고, 프랑수아가 결정한 색을 중심으로 주변의 세계가 점점 물든다는 것이다. 영화의 오프닝은 걸어오는 가족과 해바라기의 교차다. 아름다운 해바라기는 태양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꽃이고, 이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유롭게 맥락을 재단하는 남성과 그 맥락이 허락하는 공간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을 비유한다. 엔딩 장면의 온 세상이 노랗게 물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프랑수아의 노란 스웨터다. 관객이 본 그림은 맥락을 장악한 자가 자의적으로 결정한 편향된 행복이다.
아녜스 바르다다운 영화다. 섬세하면서도 화사한 색감과 감각적인 연출의 묘에서도 그녀, 아녜스 바르다다. 맥락에 귀속된 여성을 뒤틀린 제목으로 논한다는 면에서도 그녀, 아녜스 바르다다. 스파이크 존즈 보다 무려 50년을 앞서 그녀를 이야기했다는 면에서도 과연 그녀. 아녜스 바르다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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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녜스 바르다는 프랑수아의 아내 테레즈의 역으로 프랑수아 역의 배우 장 클로드 드루오의 현실 아내 클레어 드루오를 캐스팅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