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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Action

네 명의 길복순 _ 길복순, 변성현 감독

그냥_ 2023. 4. 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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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욕망과 규율의 벽을 무너트리는 빨간색 액션, 파란색 드라마

 

 

 

 

 

 

 

 

변성현 감독,

길복순 :: Kill Boksoon입니다.

 

 

 

 

 

# 1.

 

영화는 인간을 '욕망과 규율의 충돌 속에서 번민하는 존재'라 규정합니다. 여기서의 욕망이란 긍부정의 의미를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사랑부터 살인까지. 저마다 가지고 있을 본연의 성향이나 기질 따위를 뜻하는 가치중립적인 개념에 가깝죠.

 

등장인물들은 짐짓 실적, 명성, 보상, 관계 등 외부의 압박에 투쟁하는 듯 보이지만 진짜 갈등은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온 모순에 있습니다. 압력이 임계에 다다른 순간 욕망과 규율을 인정하고 그 벽을 무너트린 사람들(복순, 재영)은 살아남을 수 있었고, 욕망과 규율 사이에서 붕괴되어 버린 사람들은 죄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서사입니다. 각 인물의 최후는 작품의 주제의식을 엿보게 하는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길복순>의 세계에는 총 네 명의 길복순이 존재합니다.

 

첫 번째는 17살까지의 복순입니다.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던 유년기의 복순은 자신의 욕망은 깨닫지 못한 채 타인의 규율 아래 폭압적으로 지배당하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민규에 의해 킬러로 키워지게 되는 복순입니다. 아버지가 민규의 타깃이 되는 과정에서 아버지를 살해하게 되고, 그로 인해 살육이라는 욕망을 발견함과 동시에 타인의 규율로부터는 해방된 사람이죠.

 

세 번째는 딸을 가지게 된 복순입니다. 첫 번째 복순을 '욕망은 없고 규율만 있는 사람', 두 번째 복순을 '욕망만 있고 규율이 없는 사람'이라 한다면, 관객이 영화를 통해 보고 있는 세 번째 복순은 비로소 욕망과 규율을 동시에 가지게 된 시점의 길복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욕망과 규율 사이에 벽을 쳐 분리할 것을 선택하는데요.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영화 내내 삐져나오는 짙은 피로감으로 묘사되고 있죠. 마지막 복순은 욕망과 규율의 벽을 무너트리고 닫힌 문을 열게 된 앤딩의 길복순입니다. 네 단계에 걸친 성장 끝에 인생의 새로운 쳅터를 맞이하게 된 복순의 시작을 보여주는 결말이라 할 수 있겠네요.

 

 

 

 

 

 

# 2.

 

MK 회장 차민규는 스스로 만든 규율로 욕망을 거세해 버린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입에 달고 사는 것처럼 규칙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인 양 묘사되고 있죠. 신 상사를 살해하는 순간 자신이 곧 규율이라 말하는 장면은 짐짓 그가 규율 위에 군림하는 존재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순간에 조차도 그는 새로운 규칙을 추가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설경구가 폭발력을 보이는 만큼, 그에 비례해 규율이 얼마나 절대적인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죠. 민규가 복순에게 복수하는 방식 역시 캐릭터의 성격과 밀접하게 닿아 있습니다. 복순을 죽여 계속 살인하고 싶다는 [욕망]을 빼앗는 것은 동생의 죽음에 상응하는 복수가 아닙니다.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딸과의 관계의 붕괴라는 [규율]을 파괴하는 것이 진짜 복수라 생각하는 인물인 것이죠.

 

그런 민규에게 17살의 길복순은 마치 규율 밖의 존재처럼 여겨졌을 겁니다. 첫 만남에서부터 복순은 딸과 아버지라는 규율을 무너트리고, 살인자와 목격자라는 규율을 뛰어넘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민규의 눈앞에서 웃고 있던 소녀는 단순히 매력적인 이성이 아닌, 규율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비롯한 여타 인간들과는 다른,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에 대한 경외감 어린 눈부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 3.

 

딸 길재영은 동성애자로서의 욕망과, 가족 및 사회적 역할이라는 규율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사춘기 소녀입니다. 그녀는 혼란스러움 속에서 때론 욕망을 위해 규율을 포기할 것을 고민하기도 하고, 규율을 위해 욕망을 포기할 것을 고민하기도 하죠. 엄마 복순은 딸 재영에게 욕망과 규율을 모두 포기하지 말고 지킬 것을 요구하게 되고, 두 가지 모두를 온전히 지키는 동안의 버거움은 엄마에 대한 차가운 태도로 구체화됩니다.

 

모녀는 지난한 다툼과 대화 끝에 욕망과 규율을 무작정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해법이라는 결말에 서서히 다가갑니다. 여전히 식탁에 시금치(규율)를 올리면서도 사실은 쓴 시금치보다 스팸(욕망)이 맛있다는 걸 인정하는 장면은 과연 상징적이죠. 영화의 결말은 딸이 규율뿐인 것만 같던 엄마의 욕망을 발견하고 인정했음을 의미합니다. 걱정하며 하느님을 찾던 복순이 민망하게도 무던하게 엄마를 맞이하던 딸의 모습이, 되려 복순에게 거대한 성장으로 회귀하며 마무리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 외에 한희성은 복순의 안티테제 정도로 이해하면 무난할 겁니다. 아버지를 살해한 복순과 달리 아버지를 보필하는 인물이고 그것은 죽기 직전 유언의 형태로 재차 확인되죠. 그에게 규율은 오히려 킬러로서의 출세라 할 수 있고 이는 복순에 대한 동경으로 표현됩니다. 서로의 사고방식과 결핍이 거울상이라는 것은 과격한 베드신으로 은유되고 있기도 하죠. 차 회장의 동생 차민희는 핵심에서 한 발짝 벗어나 인물들의 모순을 폭로하는 트리거입니다. 다소 기능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겠네요.

 

다만 여기까지는 논리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욕망과 규율의 벽을 넘는 복순의 갈등과 고뇌와 고통을 한 땀 한 땀 설득하는 드라마의 완성도라 할 수 있을 텐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법 앙상하다는 생각입니다. 그 이야기는 말미에 이어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 4.

 

단점을 지적하기 전에 좋은 이야기를 조금 깔고 갈까요. 에어리언의 엘렌 리플리 이후로 많은 감독들이 중년 여성 캐릭터들에게 기계적으로 '엄마' 기믹을 붙이곤 하는데요. 썩 좋아하지 않는 방식입니다. 당장 같은 넷플릭스에서 제작된 <정이>만 하더라도 주인공을 모성의 화신으로 처박아 넣은 것을 지적한 바 있었죠.

 

변성현 감독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복순이 '왜 엄마여야 하는가'를 성실히 고민합니다. 인물에 감정의 낙차를 부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이 성장에 도달하는 방식으로서 이야기 속에 녹여내고 있다는 점은 칭찬받아도 좋은 거겠죠. 적지 않은 호불호와 일부의 날 선 비판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싼마이 신파라는 지적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랄까요.

 

결말의 폭발력만큼은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싶기도 합니다. 모순을 극복하는 복순의 성장을, 각각 화려한 노란색 홀과 창백한 푸른 새벽의 집으로 대비시켜 연결지은 것은 썩 효과적이죠. 둘 중 하나를 선택함으로 인해 다른 하나가 붕괴될 것만 같은 모순적 상황을 설정하고,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두 가지 모두를 인정하고 솔직하게 벽을 넘어 문을 여는 결말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전도연과 설경구라는 절륜한 연기력의 두 배우를 위한 판을 깔아 준다는 면에서도 실용적인 접근이라는 생각도 들구요.

 

비단 전도연, 설경구뿐 아니라 여타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합니다. 작품의 중반부를 홀로 떠받쳐야 했던 구교환은 특유의 불안함을 언제나처럼 훌륭히 묘사합니다. 복순과 민규와 희성이라는 세 캐릭터가 작동하기 위한 트리거로서의 역할이 민희에게 몰빵 되어 있는 데요. 이를 수행하는 이솜의 존재감 역시 훌륭합니다. <소공녀>에서처럼 긍정적인 방향으로든, 이번 작품에서처럼 부정적인 방향으로든 '나사가 하나 빠져있으면서도 본연의 순수성을 가진 캐릭터'에 대한 연기는 단연 독보적이죠.

 

 

 

 

 

 

 

# 5.

 

단점을 이야기해 볼까요. 얼핏 말씀드린 것처럼 드라마가 빈곤합니다. 주인공이 결말의 성장에 도달하기까지, 차근차근 벽을 허무는 시간이 누적된다는 감각이 크게 떨어진다는 것이죠. 특히 전반부는 전개라 할만한 것이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1시간 10분여까지의 분량을 주요 인물들의 소개로 태우고 있기에 적당히 시놉시스를 읽으신 분들은 안 봐도 영화를 따라가는 데 별 지장이 없을 정도니까요. 런타임 절반을 지나가는 데 주인공에게 정서적으로 다가가는 감각이 옅다는 것은 분명 치명적이죠.

 

주제의식에 종속되기만 할 뿐 마땅한 서사가 없다 보니 캐릭터의 입체감도 떨어집니다. 대부분의 인물 묘사는 연기자의 역량에 비해 상당히 단출한데요. 당연합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때문에 민규는 영화 내내 목이 쉬어 있고, 민희는 영화 내내 할리퀸이고, 재영은 영화 내내 사춘기고, 희성은 영화 내내 삐딱하고, 영지는 영화 내내 취준생일 뿐이었습니다.

 

# 6.

 

전반적으로 허세가 너무 심하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단점입니다. 명색이 킬러라면 쿨하고 시크한 맛도 있어야 할 텐데요. 대부분에게서 허세를 넘어 일종의 공명심까지 발견된다는 점은 작품을 유치하게 보이게 만들고 말았죠. 보다 보면 이들이 킬러인 건지, 조폭인 건지, 양아치인 건지, 예술가 흉내 내고 싶은 사이코들인 건지 헷갈린달까요.

 

캐릭터는 쿨한 데 그걸 보는 내가 멋있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가 멋있다는 것에 도취된 인물들을 지켜보는 식이라 역으로 멋대가리가 없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캐릭터 빨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액션 스릴러로서는 치명적이죠. 예를 들어 연습생 잼민이 사이에 복순이 들어가는 장면. 펜 들고 액션을 벌인다고 해서 멋있을 수가 있을까요? 그냥... 양학일 텐데요. 아직 일 하나 해보지 못한 잼민이 목에 펜으로 그으면서 으스대는 꼴이라 되려 한심해 보인다는 건 너무나 당연합니다.

 

단상에 선 사람의 카리스마가 작동하려면 일단 단상이 높아야 합니다. 차민규와 길복순의 카리스마는 이 두 사람이 올라서게 되는 단상, 즉 킬러들의 세계와 MK라는 회사의 카리스마에 비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영화가 만들어내는 세계의 카리스마 역시 너무 부실합니다. 회의장에 모인 원로들이 속에 구렁이 한 마리씩은 넣고 사는 산전수전 다 겪은 한 가닥 하는 인물이어야 그들을 압도하는 차민규의 카리스마가 설 텐데요. 다들 말 한마디 못하는 찐따가 되어버리면 이들을 지배하는 차민규의 카리스마 역시 곤두박질 칠 수밖에 없죠. 극 중 복순이 처리하는 '작품'의 퀄리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감독이 제시하는 작품의 난이도는 그걸 수행하는 '초 A급 킬러 길복순'의 카리스마를 전혀 지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7.

 

고생한 것에 비해 설경구와 전도연의 액션도 솔직히 어색합니다. 두 배우는 최소한의 동선을 가져가며 멀뚱멀뚱 서 있고, 이연을 비롯한 맞은 편의 배우들과 액스트라들이 두 배 세 배 더 구르는 식으로 만들어져 있죠. 물론 쉰이 훌쩍 넘은 두 배우에게 과격한 액션을 주문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무리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걸 관객인 나에게 들키면 곤란하잖아요. 일례로 콜린 퍼스는 마찬가지의 중년 배우입니다만, 킹스맨의 교회씬 등을 아무리 봐도 그가 배려받고 있다는 인상은 받지 못합니다. 배우의 능력이나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액션을 연출하고 담아내는 역량의 차이라는 것이죠.

 

소소하게 몇몇 포인트에서 노골적으로 관객들에게 아부하는 대사가 발견된다는 점 역시 작품을 얄팍해 보이게끔 만듭니다. 뜬금없는 '공정' 타령이나 '우리 세대에게도 기회가 오겠어? 23세기쯤?' 같은 것들 말이죠. 이런 대사들은 적어도 듣는 사람을 부끄럽게 만든다는 점에서만큼은 명량에서 호래자식 찾는 대사들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생각입니다.

 

정리하자면, 오마주라 주장하는 물량 공세의 액션과 훌륭한 배우진의 연기력을 버무려 나름의 주제의식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 원하는 결말에 안착시키는 데 성공한 영화라는 생각입니다. 동시에 그 결말에 도달하기까지의 드라마가 크게 빈곤한 가운데 인물들은 지나치게 기능적이며 액션을 포함한 몇몇의 장면들에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변성현 감독, <길복순>이었습니다.

 

# +8. 십오야의 법칙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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