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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밀려나 버린 것들, 지워져 버린 것들 _ 이다, 파벨 포리코브스키 감독

그냥_ 2018. 11. 22.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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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전쟁이 할퀴고 간 참혹한 상처. 원래의 길에서 밀려나 버린 것들, 지워져 버린 것들. 그들이 만들어 낸 공백입니다. 세상은 정적이고 엄숙하고 삭막하며 육중합니다. 색과 온기를 잃습니다. 사람들은 얼굴만 겨우 보일 정도로 밑바닥으로 끝으로 밀려납니다. 

 

 

 

 

 

 

 

 

'파벨 포리코브스키' 감독,

『이다 :: Ida』 입니다.

 

 

 

 

 

# 1.

 

어디서 뭘 하는지 원망스러운 신을 모시는 수도원입니다. 대화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귀퉁이로 밀려나는 동안 빈자리는 건조하고 차가운 여백이 차지합니다. 카메라는 픽스되어 있습니다. 인물들은 전시되어 있습니다. 최소한의 목소리는 앵글 밖에 있는 사람에게 맡깁니다. 생동감은 극단적으로 제한됩니다. 관객은 메마르게 정지된 시간을 관찰하게 됩니다.

 

# 2.

 

'안나'는 정식 수도자가 될 서원식 Ritus Professionis을 앞둔 수녀입니다. 수도원에서 자랐죠.

 

서원식을 앞두고 수도원장의 강요에 못 이겨 유일한 혈육 이모 '완다 그루즈'를 만납니다. 이모로부터 자신이 유대인 '이다 레벤슈타인'이라는 것을 듣게 됩니다. 어릴 적 가족사진을 보던 '이다'는 부모의 묘를 묻지만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는 답을 듣습니다. 부모의 유해를 수소문하겠다는 조카에게 이모는 말합니다. "그러다 신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할래?" 시대에 밀려 고아 '안나'가 되어버린 유대인 '이다'는 원래 걸어갔을지도 모를 여백의 길을 찾아 나섭니다.

 

 

 

 

 

 

# 3.

 

'완다'는 화려한 스카프를 두르고 담배, 술을 입에 달고 사는 수다스러운 여자입니다. 조카와는 대조적인 인물이죠. 

 

다른 궤적을 살아온 두 여자는 각자의 부모이자 동생의 유해를 찾아 어색한 여정을 떠납니다. 수소문 하던 이모는 술집 주인과 대화를 나눕니다.

 

"이다의 아빠와 엄마를 아세요?" (완다)

"유대인인가요?" (술집주인)

"아뇨, 에스키모인이죠." (완다)

"모르겠네요. 미안합니다." (술집주인)

"왜 미안하다고 하시죠?" (완다)

"글쎄요, 저도 모르게 버릇이 돼 버려서." (술집주인)

 

전쟁은 끝났지만 상처는 남아 사람들에게 처량한 거짓말을 주고받게 합니다. 

 

 

 

 

 

 

# 4.

 

수소문을 나서던 중 음주운전을 하다 차를 도랑에 빠트리는 바람에 하룻밤 유치장을 살게 됩니다. 이곳에서 '이다'는 이모가 50년대 '인민의 적'을 구분하던 판사, 너무도 많은 사람을 사형대에 세웠던 그래서 '피의 완다'라 불리던 판사였음을 알게 됩니다. 자신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시대의 사생하였던 거죠. '이다'는 이모에 대한 연민과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유치장을 나와 차를 몹니다. 길에서 우연히 색소폰을 부는 집시 히치하이커를 태우게 됩니다. 남자는 파티에 두 여자를 초대합니다. 신실하고 순수한 '안나'는 거절하고 파티는 '완다' 혼자 다녀옵니다.

 

술에 잔뜩 취한 검은 드레스의 이모가 조카에게 "인생을 낭비하게 하고 싶지 않아"라 말하자 '이다'는 몸을 일으켜 전등을 켭니다. 은유적이죠. 자신의 조언을 거부하는 조카에게 완다는 다시 말합니다. "너희 예수님은 나 같은 사람도 사랑했어." 영화 내내 표정 한번 보이지 않고 소리 한번 내지 않던 '이다'는 파티가 끝난 홀에서 집시의 블루스를 들으며 옅은 표정을 보입니다. 공허한 신실함에 균열이 이는 순간입니다.

 

 

 

 

 

 

# 5.

 

우여곡절 끝에 부모를 죽인 남자를 병원에서 만나게 되고 '이다'의 부모와 함께 '완다'의 아들까지 죽임을 당했음을 알게 됩니다. 이모에 대한 연민이 깊어 갈수록 신실함은 무너져 내립니다.

 

그날 밤 살인자의 아들이 찾아와 모든 것을 없던 일로하고 원래 이다네 집의 소유권을 준다면, '이다'의 부모와 '완다'의 아들을 묻은 곳을 알려주겠노라 제안합니다. 긍정의 대답과 함께 살인자의 아들을 돌려보낸 '이다'는 늦은 밤 시와 대화를 나눕니다. 영화 내내 머리에 두르고 있던 베일을 풀어 놓습니다.

 

 

 

 

 

 

# 6.

 

이튿날 살인자의 아들을 따라 가족이 묻힌 숲으로 발길을 옮기는 두 사람. 사람 키만큼이나 깊숙이 파묻혀 있던 무덤 앞에 무릎 꿇은 남자와, 아들의 유골을 끌어안고 돌아서는 이모를 향해 '이다'는 묻습니다.

 

"저는요? 저는 왜 살아있죠?"

"아직 갓난 아이라 유대인 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지."

 

살인자의 아들은 사실 자신이 살인자였음을 시인하며 고개를 떨굽니다. 버려진 유대인의 무덤에 가족의 유해를 옮긴 후 '이다'가 신부님을 모셔와야겠다 하자, '완다'는 랍비를 모셔와야지라 답합니다. 서원식에 올 거냐는 '이다'의 물음에 '완다'는 "아니, 대신 널 위해 축배를 들게."라 답합니다. 멀어져 버린 삶은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 7.

 

수녀원으로 돌아온 '이다'는 처음의 자신과 너무 많이 달라져 버렸음을 알게 됩니다. '이다'는 처음으로 배회하고 갈등하다가 타인의 서원식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완다' 역시 자신이 이전과는 너무도 달라져 버렸음을 느낍니다. 술을 마시고 남자를 만나고 음악을 키우고 담배를 피우고. 그 걸음 그대로 창밖으로 몸을 던지고 맙니다. 

 

수녀원을 박차고 나온 '이다'는 이모의 집으로 돌아와 유품을 정리합니다. 이모처럼 굽 높은 하이힐을 신고 드레스를 입고 담배를 물고 술을 마시고 베일을 벗고 남자와 섹스를 나누지만, 어느 것도 공허함과 허무함을 채워내지 못합니다.

 

 

 

 

 

 

# 8.

 

전쟁으로 인해 원래의 원래의 삶으로부터 밀려 나온 사람들 '이다'와 '완다'가, 지워져 버린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이 이야기의 결말이 더욱 큰 여백으로 점철된다는 건 여러모로 의미심장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비로소 카메라는 '이다'를 정면으로 주시하며 그녀와 발맞춰 길을 떠납니다. 화면 한가운데 존재하는 '이다'는 여백을 이야기하던 감독의 마지막 위로였을까요. IDA라는 글귀로 시작하던 이 영화는 IDA라는 글귀로 마무리됩니다. 처음의 '이다'와 마지막의 '이다'는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입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나타나 훌쩍 떠나버린 이다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파벨 포리코브스키' 감독, 『이다』 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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