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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불량 성냥과 계급 우화 _ 성냥공장 소녀,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그냥_ 2021. 5. 1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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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기억되기 마련입니다. 당장 이 작품만 하더라도 후반부 복수 장면이 인상적인 작품이죠. 그럼에도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시퀀스를 하나 꼽으라 한다면 전 '오프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니아분들 중 일부는 간혹 극장 시간이 늦어 오프닝 10여분을 놓치게 될 경우, 아예 관람 자체를 미뤄버리기도 하는데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죠.

 

좋은 감독들은 대게 관객과의 첫 만남이, 이후 영화적 경험에 있어 절대적 지분을 차지하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나, '봉준호'의 <마더>, '쿠엔틴 타란티노'의 <장고> 같은 영화들은 오프닝 시퀀스만으로도 티켓값을 넉넉히 돌려주는 작품이죠. 그리고 이 영화 역시 그 리스트에 들 법합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성냥공장 소녀 :: Tulitikkutehtaan tyttö』입니다.

 

 

 

 

 

# 1.

 

공장에서 성냥이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시작됩니다. 감독은 자신의 작품을 <공장에서 만들어진 성냥의 이야기>로 소개합니다. 아무런 대사도 인물도 배경도 등장하지 않아 간과할 수도 있습니다만, 성냥이 만들어지는 공정을 유심히 관찰해 보는 건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함께 살펴보죠.

 

차가운 쇳덩이가 보입니다. 삭막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바스러지며 조각나는 통나무. 가시 박힐 것만 같은 건조함. 불안하게 만드는 엔진의 떨림. 끊임없이 제자리를 도는 컨베이어 벨트가 보입니다. 일회성으로 소비될 성냥들과,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성냥갑. '불량품'을 검수하는 한 소녀와, 그 그녀가 '불량품'인지를 다시 검수하는 관리자가 뒤를 지키는군요.

 

감독은 낡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보잘것없는 '성냥', 그 가운데서도 더욱 보잘것없는 '불량품'인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 2.

 

'차가운 쇠덩이와, 삭막한 기계 돌아가는 소리'의 영화입니다.

 

주인공 '이리스'는 차갑고 삭막한 시간 속의 사람입니다. 그녀는 이쁘지도 않고 매력적이지도 않은 소위 '불량품'이죠. 무능하고 무기력한 엄마와 계부에게 생활비를 착취당합니다. 성냥 공장의 부속품이 되어 하루 종일 일하고 나면, 집안일까지 도맡아야 하는 척박한 삶이죠. 기계적 헌신에 대한 보상은 매년 선물 받는 같은 제목의 책 한 권과, 자신이 번 돈으로 원하는 드레스 한벌을 샀다는 이유로 돌려받은 폭력뿐입니다.

 

 

 

 

 

 

# 3.

 

'바스러지며 조각나는 통나무'의 영화입니다.

 

일을 끝마치고 돌아온 소녀는 부모의 식사를 준비합니다. 가족은 식사 내내 아무런 말이 없죠. 영화 속 처음 등장하는 목소리는 가족의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 앵커의 것입니다. 뉴스는 '천안문 사태'와, '시베리아 대륙 횡단 열차 가스관 폭발사고', '이란의 종교지도자 사망' 소식을 전합니다. 네, <계급론>이군요. 그녀는 우연히 나쁜 가족을 만난 특별히 불행한 패배자가 아니라, 산업화라는 거대한 흐름에 휩쓸린 소모품으로서의 노동자 일반을 대변합니다.

 

 

 

 

 

 

# 4.

 

'가시 박힐 듯 건조한' 영화입니다.

 

영화에는 대사와 표정이 거의 전무합니다. 본격적인 복수 서사가 전개되는 후반부 20분 전까지, 영화는 극단적으로 생동감을 제한당합니다. 감독이 의식적으로 영화의 톤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리스'의 인생과 공간은 그 자체로 메마른 입술이 갈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건조합니다. 사랑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행복과, 가족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꿈마저 금세 증발해 버릴 만큼 건조합니다.

 

그녀의 착취와 학대와 냉대도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건조한 표정으로 받아들이는 '이리스'의 무기력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 5.

 

'제자리를 도는 컨베이어 벨트와, 일회성으로 소비되는 성냥'의 영화입니다.

 

공장에서 노동하는 모습의 등장과, 무도장에 줄지어 앉은 여자들의 모습, 영화 내내 '이리스'가 다니는 동안 뒤로 보이는 패턴화 된 도시 디자인과, 줄지은 차량의 배치 따위는 그녀 역시 컨베이어 벨트 위에 있음을 은유합니다. 누군가의 담뱃불이 되기 위해 팔려나가는 성냥들, 그 사이에 놓인 팔리지조차 못한 불량 성냥. 그녀가 복수를 시작하며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불량 성냥이 스스로를 불붙였음을 문학적으로 은유합니다.

 

낮은 곳의 드라마입니다. 산업화로 인해 공산품화 되어버린 노동자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애정입니다.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습니다만, 결말은 과격한 '쥐약'으로 변주됩니다. 약을 사는 '이리스'가 약사에게 어떻게 쓰는 거냐 굳이 되묻는 대목은, 이 약을 먹게 될 사람들이 사회를 좀먹는 쥐새끼라 감독이 직접 말하는 대목입니다. 대단히 투쟁적인 영화라는 거죠.

 

 

 

 

 

 

# 6.

 

그리고 드디어 불량 성냥의 복수가 시작됩니다. 그녀는 쥐약을 물에 타 자신을 모욕한 남자 '아르네'를 독살하고, 착취하던 엄마와 계부까지 모두 독살합니다.

 

이들에 대한 복수는 강렬하면서 통쾌하지만 논리적이고 시시합니다. 그보다 인상적인 것은 되려 바에서 자신에게 말을 건 무고한 남자까지 독살한다는 점이죠. 이는 그녀의 복수란 단순히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폭력적 리액션일 뿐 아니라, <통제를 벗어난 자기 파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렇죠. 한번 불붙은 성냥은 스스로 재가 되기 전까지는 꺼지지 않는 법이죠.

 

불량 성냥의 사소한 불씨조차 쉽게 타오를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은 충분히 건조합니다. 불량 성냥에게 '너는 이쁜 성냥이 될 수 있다.' 라거나, '라이터가 될 수 있다' 라는 말은 무의미합니다. '너도 스스로 불붙여 네가 원망하는 모든 것들을 배워버릴 수 있다.'는 말이 진정한 위로이자 애정이라는 점을 감독은 포착합니다.

 

복수가 끝난 후 '이리스'의 심정을 대변하는 고풍스러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녀는 달아나는 대신 담담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용의자를 체포하기 위해 찾아온 경찰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앞서 가는 '이리스'의 동선은, 감독이 얼마나 섬세하게 인물의 정체성을 매만지고 있는지 엿보게 합니다.

 

 

 

 

 

 

# 7.

 

'사회 구조적 문제의식'과 '구체적 개인의 절망감'을 높은 일체감으로 엮어낸다는 점에서 대단히 논리적이고 구체적인 작품입니다만, 그 이면에 문학적이고 심미적인 표현이 가득 숨겨져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풍부한 미장센을 선명한 스타일로 승화시키는 요즘의 메타와는 달리, 있는 듯 없는 듯 위화감 없이 녹아들게 만드는 연출이 탁월합니다. 독특한 스타일이 제공하는 미감에 대한 높은 만족도를 느끼면서도, 작품이 작가가 창조한 임의의 세계관이라는 거리감 없이 실제 존재할 것만 같은 한 인간의 인생을 뚝 끊어다 둔 것만 같은 밀착감을 느끼게 됩니다.

 

# 8.

 

반세기는 더 전에 만들어진 작품인 것만 같은 극단적인 미니멀리즘. 얼어붙을 듯 침전된 분위기와 건조한 미장센. 연기하지 않는 듯한 연기. 그럼에도 숨길 수 없는 미감과, 논리적이고 영리한 음악의 활용. 이 모든 요소들이 하류계급 노동자에 대한 강한 연민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정체성에 대한 짙은 탐구로 올곧고 예리하게 소집됩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성냥공장 소녀>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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