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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Thriller

세 가지 질문 _ 녹터널 애니멀스, 톰 포드 감독

그냥_ 2021. 3. 2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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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배우들이 있습니다. 봐야겠다 싶어 리스트에 올려놓더라도 당장 보기엔 지칠까 두려워 한참 동안 묵혀 두게 되는 영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껏 충전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각오를 담은 긴 심호흡과 함께 조심스레 꺼내 드는 영화. 고런 영화들을 주로 만드는 배우들 말이죠.

 

 

 

 

 

 

 

 

'톰 포드' 감독,

『녹터널 애니멀스 :: Nocturnal Animals』입니다.

 

 

 

 

 

# 1.

 

이 분야 끝판왕은 단연 '호아킨 피닉스'입니다만 굳이 한 명 더 꼽아야 한다면 전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영화의 주인공 '제이크 질렌할'을 꼽겠습니다. 호아킨 피닉스의 작품들이 대체로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형이상학적 메시지를 둘러싼 극단적인 감정 소모를 불러일으킨다면, 제이크 질렌할의 경우 대단히 디테일한 현실적 상황 속 복잡 난해한 관계들이 낳는 이성적 판단의 충돌을 자주 발생시키곤 하죠. 인상 비평 아니냐구요? 맞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예상은 이번에도 적중합니다. '야행성 동물'이라는 도무지 모를 난해한 제목에서부터 쎄 했습니다만 그 느낌이 정확했음을 확인하는 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는 건 오프닝만으로도 확인됩니다. <녹터널 애니멀스>라는 제목으로 구글링을 하면 가장 먼저 '해석'이라는 키워드가 따라붙는 덴 다 이유가 있는 법이죠.

 

 

 

 

 

 

# 2.

 

일반의 미감과는 매우 동떨어진 체형의 모델들이 나체를 한 채 화려한 붉은 장식과 환희에 찬 표정으로 등장합니다. 관객은 극단적으로 상반된 두 요소의 충돌 속에서 강한 위화감을 느끼게 됩니다. 감독은 이후 두 시간여 동안 자신이 선보이게 될 영화를 <위화감>으로 소개합니다. 한 인간의 내-외면을 구성하는 무언가가 강하게 깨어져 어긋나 있음으로 인해 벌어지게 될 이야기라 안내합니다.

 

모델들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이어받는 검은 옷과 검은 저택의 '수잔'이 불편한 표정으로 등장합니다. 그녀는 앞서 등장했던 모델들과 마찬가지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숨겨진 내면의 괴리를 겪고 있는 존재입니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남들보다 훨씬 편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듯한 그녀의 숨겨진 무언가를 조명할 것이라 말합니다.

 

수잔의 검은색 껍질 안에 숨겨진 붉은색 피가 폭력적으로 꺼내어 집니다. 환희에 찬 표정 이면에 숨겨진 비루하게 늘어진 살가죽을 벗겨낼 계기가 등장합니다. '에드워드'의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죠. 그녀는 스스로 치장하던 진한 화장과 화려한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가장 내밀하고 개인적인 공간으로서의 침대에 홀로 누워 전 남편의 소설을 마주합니다.

 

 

 

 

 

 

# 3.

 

영화는 병렬적으로 전개됩니다. 20년 전 에드워드와 수잔이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에 대한 회상과, 토니가 아내와 딸을 처참하게 잃고 복수하는 내용의 소설이 교차됩니다. 상대적으로 섬세하고 서정적인 톤의 회상과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 묘사의 소설이 수잔의 시각에 따른 각자의 이야기 속 구조적 접점을 기준으로 상호 작용합니다.

 

전개될수록 절대 어울릴 수 없을 것만 같은 각각의 남자 주인공 토니와 에드워드의 정서가 하나로 합쳐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이 두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는 또 다른 주인공 수잔의 심리 변화를 목격하게 됩니다. 두 이야기를 친절하게 묶어내는 메타포들, 이를테면 괴기한 느낌으로 곱게 전시된 아내와 딸의 주검을 떠받치는 붉은 소파의 연출과 같은 것들이 두 서사를 엮는 데 심미적으로 또 문학적으로 기여합니다.

 

작가 에드워드가 소설의 주인공 토니의 모티브를 자신에게서 가져왔노라 말하는 대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소설의 주인공 토니를 구태여 제이크 질렌할로 하여금 1인 2역으로 소화하게 하는데요. 관객들이 두 이야기를 보다 편안하게 구조화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 나름대로의 친절, 혹은 불필요한 혼선을 막기 위한 타협이라 할 수 있겠죠. 혹은 관객은 필연적으로 수잔의 시선 너머로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를 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수잔이 소설 속 주인공으로부터 에드워드를 투영해 읽어 내고 있다는 메시지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수잔이 토니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전 남편 에드워드의 내면을 들여보는 동안 숨겨져 있던 자신의 내면을 함께 들여다보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네요.

 

 

 

 

 

 

# 4.

 

영화를 보는 동안 세 가지 질문을 즐겼는데요.

첫 번째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수잔은 에드워드의 소설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소설을 통해 수잔은 옛사랑을 회복합니다. 소설에는 가해자로서의 자신에 대한 질책과 원망, 분노가 담겨있음이 분명해 보임에도 말이죠. '복수'라는 글귀가 새겨진 작품을 샀다는 사실은 잊었다는 점이나 책에 베이는 장면 등은 관객을 위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에드워드가 붙여준 과거 자신의 별명이 '야행성 동물'이었다는 점이나 섬뜩한 이야기의 소설의 감수본 첫 장에 적힌 'FOR SUSAN'이라는 글귀. 혹은 두 서사에 공통적으로 동원되는 수사들, 이를테면 글이나 총솜씨에 대한 비하 따위를 생각한다면 상처 받은 자의 원망 정도는 읽지 못했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수잔은 토니를 통해 옛 연인이 받았을 상처를 온몸으로 (수사적 의미가 아닌 욕조에 웅크려 있던 모습 그대로의 온몸으로) 공유하며 사랑을 되살리게 됩니다. 욕조에 누워 눈물을 쏟아내며 나지막이 에드워드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작품의 주제의식 중 대단히 큰 부분을 차지할 수잔이 느꼈을 정서의 성격이 미묘하더군요. 에드워드에 대한 그리움, 연민, 죄책감, 동경 등과 수잔 자신에 대한 자기혐오, 권태에 대한 해방감 등이 뒤엉킨 그 정서 말이죠.

 

 

 

 

 

 

# 5.

 

끝내 약속 장소에 등장하지 않는 에드워드. 어설픈 솜씨라 비웃었지만 가슴 한가운데를 관통해 버린 총알처럼, 어설픈 솜씨라 비웃었지만 수잔의 가슴 한가운데를 관통해 버린 문학이라는 처절한 복수로 귀결되는데요. 두 번째 궁금함은 바로 "에드워드는 수잔이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을까." 였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복수가 완성되려면 필연적으로 수잔이 다시 에드워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의 최대 의의는 피해자의 절규 혹은 질책 정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어지니까요.

 

에드워드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 수잔은 이 소설을 읽고 자신의 내면을 마음 깊이 공감해 줄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자,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의심의 여지없이 믿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복수를 위해 소설을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갔을 에드워드의 심리상태를 생각하면, 마치 제이크 질렌할의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눈앞에 그려지기라도 하는 양 육중하고 비극적인 서정성이 연상되죠.

 

 

 

 

 

 

# 6.

 

사실 한걸음 떨어져 보면 결말의 복수는 시시합니다. 문학적 복수는 고상하고 이상적이고 완결적이고 아름답지만, 비현실적이고 초라하고 허무하며 비겁하죠. 두 시간에 걸쳐 에드워드는 환희에 찬 얼굴의 이면에 가려진 비루한 몸뚱이이자 잔인한 야행성 동물로서의 수잔을 들춰내기 위해 문학이라는 복수를 선택하지만, 결국 이런 복수밖에 선택할 수 없는 나약한 작가 에드워드의 비극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소설 속 토니는 복수에 성공하지만 내내 누구보다 고통받은 사람 역시 토니였듯, 에드워드는 결국 수잔에게 복수를 성공하지만 그럼에도 19년의 긴 시간 동안 가장 큰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사람 역시 에드워드였을 겁니다. 에드워드는 토니의 비극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에드워드는 이 소설이 자신에게 가장 큰 비극이 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죠. 영화의 가장 다이내믹한 경험은 토니가 겪지만, 정서적 주체는 수잔이 가져가고. 정서는 수잔이 가져가지만, 영화의 핵심은 되려 한 번도 등장한 바 없는 지금의 에드워드가 가져가는 아이러니랄까요.

 

 

 

 

 

 

# 7.

 

작품의 가장 큰 성취라면 붕괴라는 생각입니다. 인격 경계의 붕괴 말이죠. 감독은 작품을 통해 명확한 인과 관계나 대결 관계에 놓인 수잔과 에드워드와 토니 그리고 관객의 심리 경계를 붕괴시킵니다. 감상평에서 관객이 느낀 혼란스러움은 영화를 보고 난 후 느끼고 있을 강렬하면서 복합적인 정서들이 쉽사리 분리되어 정리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마지막 세 번째 의문이 생깁니다. "감독 톰 포드는 무슨 이유로 관객에게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를 선물한 걸까."

 

복수를 위해 문학 작품을 선물하는 이야기를 활용한 액자식 구성이라는 점과 굳이 원작의 제목인 <토니와 수잔>을 버리고 작중 소설명과 같은 제목을 선택했을까를 생각할 때, 이런 의문은 제법 흥미로운 디저트가 되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입니다.

 

어쩌면 감독은 남의 이야기로서 복수극을 한편 즐기는 것을 넘어 관객들에게 자신 안에 숨겨진 '야행성 동물'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랬던 건 아닐까요. 혹은 톰 포드 감독 스스로 영화를 만드는 동안 자신 안에 숨겨진 어떤 내면의 상처를 발견했을 런지도 모르겠군요. :) '톰 포드' 감독, <녹터널 애니멀스>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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