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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Thriller

탐정놀이의 목적 _ 레베카, 벤 휘틀리 감독

그냥_ 2021. 3. 1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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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히치콕 감독의 <레베카> 리뷰 말미에 말씀드린 대로 불필요한 선입견 없이 기대를 가지고 작품을 보려 노력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기대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영화는 레베카가 아닙니다.

 

 

 

 

 

 

 

 

'벤 휘틀리' 감독,

『레베카 :: Rebecca』입니다.

 

 

 

 

 

# 1.

 

히치콕 감독의 작품이 원작으로서 완벽하기에 이후 창작되는 <레베카>는 모두 1940년 작품 속 설정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식의 순혈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레베카가 아니다라는 표현은 레베카라는 인물의 존재를 극의 중심에 놓고 전개되는 영화가 아니라는 뜻이죠.

 

이 영화는 오히려 <나>입니다. 릴리 제임스가 연기한 '나' 말이죠. 영화에는 무수히 많은 부실함이 발견되는데요. 그 대부분은 이야기는 레베카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반해 전개는 주인공 '나'를 최대한 북돋우려 하는 과정에서의 억지스러움에서 비롯됩니다.

 

# 2.

 

원작 소설 속 주인공은 화자로서 역할합니다. 히치콕 감독 영화에서의 주인공 역시 철저히 관찰자로 포지셔닝하죠. 나를 관찰자이자 이방인의 자리에 앉혀 둔 상태에서 '맥심'과 '댄버스'를 비롯한 다수의 등장인물들이 죽은 레베카를 어떻게 기억하고 정의하고 있는가를 관찰하는 방식으로 극은 전개됩니다.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폭발적 감정의 위력을 주인공과 주인공에 감정 이입된 관객이 함께 즐기는 장르물이죠.

 

반면 벤 휘틀리 감독의 영화 속 '나'는 명실상부 주인공으로 우뚝 섭니다. 2020년의 '나'는 이전과는 달리 훨씬 적극적이고 능동적입니다.

 

 

 

 

 

 

# 3.

 

도입의 로맨스 파트는 새롭게 설정된 주인공의 성격을 노골적으로 표현합니다. 스크럼블드 애그를 주문해 놓고도 채 먹지 못하던 '나' 대신 고급스러운 굴 요리를 덜컥 시켜먹는 '나'가 등장합니다. 아내의 죽음에 얽힌 스트레스와 귀족 문화에 염증을 느끼던 부호 드 윈터의 적극적인 애정표현을 받아내던 순박한 '나' 대신 먼저 바다에 뛰어들 정도로 적극적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여인의 열정적인 구애가 펼쳐집니다.

 

원작의 신데렐라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는 끝내주는 몸매의 애교 만점 뽀뽀 마니아가 대신합니다. '나'가 먼저 적극적이다 보니 맥심은 본연의 깊은 트라우마를 표현하는 대신 이 적극성을 받아내는 달콤한 상남자로 전향하게 됩니다. 전처를 수장시킨 과거를 생각할 때 맥심이 '나'의 투정에 이끌려 함께 바다에서 수영하는 대목은 가히 원작에 대한 의도된 모욕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죠.

 

# 4.

 

전반부를 지배하던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는 화려함을 위한 화려함으로 격하됩니다. 청혼 장면에서의 문학적 은유는 직설적인 말 한마디와 시도 때도 없이 남발하는 키스신으로 손쉽게 대체됩니다. 능청스러움과 우악스러움과 질투와 코미디를 복합적으로 선보이던 입체적 캐릭터의 감초 디드스 반 하퍼 부인 역시 마냥 천박하고 표독스러운 평면적 악역으로 전락합니다. 총체적 난국이죠.

 

 

 

 

 

 

# 5.

 

시나리오를 미리 알고 있는 입장에서 주인공의 캐릭터성을 이렇게 능동적인 것으로 전환해 놓으면 이후 레베카의 정체를 둘러싼 맨들리의 호러와 미스터리를 어떻게 풀어나가려는 거지? 라는 의문이 자연스레 뒤따르게 되는데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작가는 이 문제를 무려 탐정 놀이로 극복합니다. 맥심이 가진 심리적 그늘에 대한 표현이 충분히 누적되지 않는데 이걸 후반부에 설득하는 게 가능한거야? 라는 의문 역시 자연스레 뒤따르게 됩니다만 이 문제는 몽유병이라는 치트키로 가볍게 극복합니다. 만세.

 

# 6.

 

'나'의 눈으로 바라본 맨들리는 없습니다. 호화 저택 맨들리를 자유롭게 탐험하는 '나'만이 존재할 뿐이죠. 맨들리 특유의 고압감은 온데간데없고 댄버스 부인의 카리스마 역시 허망하게 휘발됩니다. 맨들리로 들어가는 날 쏟아지던 비와 같은 오마주성 아이템들은 아무런 고찰 없이 일수 찍듯 기계적으로 소환되어 기계적으로 낭비됩니다. 아직 1/3 밖에 오지 않았음에도 슬슬 처참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죠.

 

 

 

 

 

 

# 7.

 

'나'의 존재감이 쓸데없이 너무 거대합니다. 작가는 다프네 뒤 모리에가 왜 하필 주인공의 이름을 제거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했어야 합니다. 히치콕은 왜 그렇게까지 주인공의 존재감을 지우려 노력했을까를 고민했어야 합니다.

 

뮤지컬 판에선 주인공급으로 활약하게 되는 댄버스 부인은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됩니다. 주인공 '나'가 적극적으로 모험을 나서는 탐정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되려 댄버스 부인이 관찰자 역할로 전락했기 때문이죠. "네가 아니라 '레베카'여야 해!" 라 말하던 광기의 댄버스는 온데간데고 그 자리엔 전 직장 상사와의 추억이나 읊어대는 걸어다니는 음성 기록물만이 있을 뿐입니다.

 

# 8.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원작의 댄버스 부인은 원래 레베카가 놓아두던 빗의 위치조차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끔 철저히 상황을 통제합니다. 왜? 그 빗은 '레베카'의 빗이니까요. 아무리 사소한 빗 하나라 하더라도 감히 너의 머리를 빗는 데 써선 안될 물건이니까요. 맥심의 근엄한 사진 아래 비스듬히 줄지어 놓인 빗이 화면에 딱 담기는 순간 댄버스 부인의 카리스마와 댄버스 부인에 투영된 레베카의 카리스마가 폭발하게 됩니다. 원작은 그렇게 흘러가죠.

 

이 영화는 같은 장면을 어떻게 소화하느냐. 댄버스 부인이 레베카의 빗으로 '나'의 머리를 빗겨줍니다. 세게요. 왜? 머리 당기면 아프니까요. 일련의 허접스럽기 그지없는 씬이 펼쳐짐과 동시에 댄버스 부인의 광기 어린 집착은 말끔히 사라지고 그저 심통난 집사 아줌마의 소소한 괴롭힘만이 존재하게 됩니다. 

 

 

 

 

 

 

# 9.

 

댄버스 부인은 절대 '나'의 눈을 피해선 안됩니다. '나'가 댄버스 부인이 점유한 공간을 밀어내게 만들어선 안됩니다. '나'는 서있고 댄버스 부인은 앉아 있는 구도를 만들어선 안됩니다. 댄버스 부인이 서정적인 감정연기를 '나' 앞에서 쳐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두 사람이 같이 피식피식 웃으며 농담을 쳐선 절대 안 됩니다. 왜? 그럼 캐릭터가 죽으니까요!! 이 작가 놈아!!!

 

대체 왜 "레베카는 모두의 마음을 홀려버리는 사람이었다"는 둥 "한낱 인간들은 대적조차 할 수 없다"는 둥의 싸구려 대사를 내뱉게 만들어 매력적인 캐릭터를 불쌍하게 만드는 건가요. 대체 왜 캐롤라인 부인의 옷을 제안하는 걸 하녀에게 대신시켜 캐릭터를 보잘것없게 만드는 건가요. 이렇게 되면 댄버스 부인이 가진 집착과 광기는 모조리 거세될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거울방에서의 절규 역시 그냥 찐따 괴롭히는 일진 같아만 보이잖아요. 너는 절대 레베카가 될 수 없다는 걸 확신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 그걸 비굴하게 설득하는 것만 같잖아요.

 

아니, 거울방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게 하라고 미친놈아! 거기서 말을 하면 창문에 매달려 자살을 종용당하는 씬이 힘을 전혀 못 받잖아! 아니, 뭐해! 창문은 적어도 댄버스가 직접 열게 했어야지!!!

 

 

 

 

 

 

# 10.

 

주인공이 댄버스를 가볍게 제압하고 비글처럼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다 보니 레베카에 대한 열등감 역시 무르익는 데 실패합니다. 전반부에서 맥심이 가진 그늘에 대해 묘사하는 데 실패한 채 근육질 상남자만을 그려내다 보니 전개를 위해 <몽유병>이라는 서사와 분리된 억지스러운 설정이 덧붙여지게 되죠. 그 외에도 원작에서 맥락 안에 녹여 묘사되던 것들은 대부분 직접적인 말초적 대사로 대신됩니다.

 

저화질의 흑백 영화에서도 공간이 손에 잡히듯 읽히던 원작의 맨들리 역시 온데간데없고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허무한 호화스러움만이 부유합니다. 무도회장에서 호스트가 게스트들에게 등 떠밀린다는 말 같지도 않은 상황을 만든 건 공간에서 충분한 위압감을 만들지 못했다 생각한 작가가 억지를 부린 거죠. 심지어 밑도 끝도 없이 사람들이 줄지어 레베카! 레베카! 거리니까 무슨 부족민들이 추장 이름 부르는 거 같잖아요.

 

 

 

 

 

 

# 11.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는 후반부는 원작 모욕의 절정이라 할 법합니다. 단연 최악은 레베카의 시신이 영화에 노출된다는 점이죠. 어떤 방식으로라도 레베카는 영화에 나와선 안된다는 걸 정녕 몰랐던 걸까요. 작가는 확실히 이 시나리오의 주제와 성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관심조차 없었던 게 분명합니다.

 

맥심이 별장에서 레베카에 얽힌 실체를 자백하는 클라이맥스는 '아미 해머'의 참담한 연기력이 폭발하는 지점입니다. 물론 영화 시작부터 어처구니없는 영국식 영어에 정줄을 놓게 했습니다만 이 시퀀스에서의 허접스럽기 그지없는 총 들고 생쇼 하기는 도저히 참고 보기가 힘들군요.

 

# 12.

 

해당 씬의 마무리를 레베카의 실체로 정리하는 게 아니라, '나'가 "당신이 레베카를 사랑하는 줄 알았어" 라 말하는 것으로 도치시킨 것 역시 영화가 내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맥심의 사랑을 갈구하던 '나' 대신 맥심이 매달리게끔 만든 것 또한 영화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맥심의 재판을 적극적으로 통제하는 것도 '나'고 베이커 박사의 병원을 잠입해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것 역시 '나'이며 결말 역시 '나'의 내레이션으로 정리되는 것 모두. 영화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렸죠. 이 영화는 <레베카>가 아니라 <나>라니까요.

 

 

 

 

 

 

# 13.

 

이처럼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영화가 먼치킨 슈퍼히어로 주인공 '릴리 제임스'의 모험활극으로 전개된 이유는 허무하게도 후반부 댄버스 부인의 창작 대사에서 자백됩니다.

 

 

"여자는 즐기면서 살면 안 되는 거야?

나의 '레베카'는 마음껏 즐기는 삶을 살았어.

그러니 남자가 죽이려 달려들었지."

 

 

아... 이 새X들, 여성주의를 하고 싶었던 거군요. 어쩐지 쎄하더라. 그래요. 이 이유에서라면 플롯과 전개가 어긋나면서까지 주변 모든 인물을 극단적으로 희생시키면서까지 신여성新女姓 '나'를 띄운 게 설명이 됩니다.

 

# 14.

 

작가는 저택에 불을 지른 댄버스 부인을 구태여 절벽으로 다시 끌고 나옵니다. 주인공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만나게 한 후 물에 뛰어들어 죽게 만들려는 거죠. 왜 이런 번잡스러운 결말을 준비했느냐. "당신은 행복하지 못할 거야"라는 말에 "Yes, I Will" 이라는 '나'의 여성주의적 대답 한마디를 꼭 듣고 싶었거든요. 위대한 승리자가 된 주인공이 헐벗은 남편과 카이로를 여행하는 모습 위로 자랑스러운 승전보를 내뱉으며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얼추 끝나간다 싶으니 아주 노골적이시네요.

 

<에놀라 홈즈>도 그렇고 이 영화 <레베카>도 그렇고. 근래 넷플릭스 자체 제작 콘텐츠들 중에 이런 식의 작품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번거롭게 그러지 마시고 그냥 시민운동을 하러 가시라니까요 글쎄.

 

 

 

 

 

 

# 15.

 

후...

 

홧김에 시니컬하게 말하긴 했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영화를 통해 특정한 가치를 주장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죠. 다만 그러고 싶다면 메시지를 안정적으로 설득할 수 있을 정도의 전면적 각색 정도는 준비했어야 합니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남의 창작물에 폐 끼치지 말고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드는 정도의 염치는 있었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나 다프네 뒤 모리에의 <레베카>와 같은 전혀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진 다른 사람의 작품을 편리하게 훔쳐 오는 양아치 짓거리 하지 말고 말이죠. '벤 휘틀리' 감독, <레베카>였습니다.

 

# +16. 글 내내 의식적으로 '감독'이라는 표현 대신 '작가'라는 말을 쓴 건, 각본 명단에 '벤 휘틀리'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만들어 놓은 시나리오를 촬영하기만 한 고용 감독일 가능성이 높은 감독을 비판하는 건 가혹한 일이죠.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_ 레베카,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 0. 넷플릭스의 <레베카>를 보려 했습니다. 'DELING' 님 댓글 덕에 뮤지컬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요. 살펴봤더니 리메이크 작이더군요. 원작은 무려 1940년 작. 그것도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morgosound.tistory.com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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