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Film/Thriller

싸가지 _ 에놀라 홈즈, 해리 브래드비어 감독

그냥_ 2020. 9. 26. 06:30
728x90

 

 

# 0.

 

무례합니다. 영화가 싸가지가 없어요. 메시지, 보다 정확히는 특정한 이념을 위해 서사와 캐릭터와 표현과 연출 심지어 관객 경험까지 복무시키는 영화입니다. 이럴 거면 왜 굳이 힘들게 영화를 하나요. 그냥 시민운동을 하시지.

 

 

 

 

 

 

 

 

'해리 브래드비어' 감독,

에놀라 홈즈 :: Enola Holmes입니다.

 

 

 

 

 

# 1.

 

현시대의 성갈등에 대한 개개인의 가치판단 여하와는 별개로 19세기 런던을 배경으로 한 여성의 자기실현은 충분히 창작자의 구미를 당길법한 소재임엔 분명합니다. 윌리엄 올드로이드의 『레이디 맥베스』와 같은 영화들은 다시 봐도 강렬하고 매혹적이죠.

 

하지만 당위만으론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가치를 어떻게 쟁취하고 실현하고 설득할 것인가가 본질이죠. 드라마의 감동은 특정 가치와 메시지를 쟁취하는 치열한 여정에 대한 진지한 감정이입이기 때문입니다. 감독이 이야기하는 누구나 특별하다라는 메시지 역시 그 자체로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메시지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그 메시지를 치열하게 증명하는 동안의 여정이죠.

 

안타깝게도 해리 브래드비어 감독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밀도 높은 서사와 캐릭터의 분투를 연성하는 대신 메시지의 당위성으로 무장한 채 억지를 부리고 맙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이 영화는 페미니즘이라는 이념을 위해 모든 서사와 캐릭터와 표현과 연출과 관객 경험을 희생합니다.

 

 

 

 

 

 

# 2.

 

우선 큰 오빠 마이크로프트입니다. 셜록 만큼이나 뛰어난 두뇌라는 소리를 듣던 마이크로프트는 영화에서 똑똑한 둘째와 셋째 사이에 낀 덜떨어지고 폭력적이기만 한 머저리가 되고 맙니다. 감독에게 있어 마이크로프트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합리성을 완벽히 상실한 채 여성주의가 무찔러야 할 무수히 많은 관념들을 집합시켜 의인화 한 더미Dummy에 불과하죠.

 

두 번째 피해자 셜록입니다. 영화에서 셜록의 역할은 슈퍼스타로서의 명성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모험을 돌파한 에놀라가 들어 올리게 될 일종의 트로피죠. 에놀라가 셜록보다 먼저 추리를 전개하고 먼저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온갖 여자들이 셜록에게 우렁찬 목소리로 훈계를 쏟아낼 때마다. 그 여성들의 권위를 최대한 북돋우기 위해 셜록은 근사하게 치장된 전리품으로 남아있어야 했습니다. 유도 선수 아줌마의 선거법과 관련된 일장연설 씬은 감독이 셜록을 어떻게 써먹고 있는지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대목입니다. 영화의 중반 즈음 이 장면이 등장하는 순간 셜록의 역할은 결정된 것과 같습니다. 어떤 식으로 에둘러가든지와 무관하게 결국엔 슈퍼스타 셜록이 자신의 부족함을 참회하고 에놀라 앞에 눈물의 반성문을 쓰는 서사가 완성되겠죠.

 

감독이 홈즈를 다루는 무례함은 영화에서 홈즈라는 코드를 지워보면 쉽게 확인됩니다. 주인공이 에놀라 '홈즈'가 아니라 그냥 시골에서 엄마와 함께 자란 영특한 소녀 '에놀라'였다 가정할 시 서사가 진행됨에 있어 지장이 생기는 가를 살펴보면 단번에 알 수 있죠. 점검해 보세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걸요?

 

최종 사건이 해결된 후 셜록이 레스트레이드 경감 앞에 나타나 사건의 전말을 말로 읊어주는 대목 정도를 제외하면 이 영화에서 [홈즈]라는 IP가 기여하는 바는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 남은 목적은 하나뿐이라는 것이죠. 권위 훔치기. 홈즈를 데려다 쓰면서 홈즈를 수단으로 삼아 모욕하는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걸 알았다면 아서 코난 도일이 어떤 참담한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지는군요.

 

 

 

 

 

 

# 3.

 

물론 최대 피해자는 관객입니다. 감독의 그 잘난 메시지를 위해 관객은 영화 경험의 상당 부분을 일방적으로 희생당합니다.

 

일반적인 영화들은 아주 특별한 설정이나 목적이 있지 않는 한 쉽게 제4의 벽을 넘지 않습니다. 관객의 몰입을 철저히 파괴할 수밖에 없는 연출법이기 때문이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그 순간 마치 실제 존재하는 것만 같은 어딘가의 누군가가 아니라 작가에 의해 창작된 공간이라는 걸 자각하는 순간 마다마다, 장르 경험의 퀄리티가 뭉텅이로 무너져 내리는 건 당연합니다.

 

<에놀라 홈즈>는 미쳤나 싶을 정도로 제4의 벽을 넘습니다. 목적은 데드풀이나 마스크와 같은 캐릭터 설정에 기초한 코미디가 아니라, 관객의 머릿속에 일관된 메시지를 때려 박기 위해서죠. 말인즉, 감히 상업 영화 따위가 싸가지없이 관객을 상대로 계몽啓蒙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감독은 미친놈인 걸까요.

 

꽃미남 남주를 제외한 절대다수 남성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과장된 악당이거나 괴물이거나 찐따로 그려지는 데요. 그들이 맥락에 맞지 않는 괴상한 행동을 할 때마다 에놀라가 카메라를 쳐다보면 뭐 나더러 어쩌라구요. 무슨 놈의 영화가 관객에게 동의를 구걸하고 자빠진 건데요. 같이 욕이라도 해주랴? 진지한 분위기를 조성해 관객에게 긴장감을 제공해야 할 대목마다 주인공이 센척하며 실실 쪼개고 있으면 뭐 멋있다고 침이라도 흘려줘야 하는 건가요? 줄거리를 연출로 풀어나가야 할 대목들을 주인공이 카메라 쳐다보며 대사로 읊어버리걸 보며 뭐 여주의 영특함에 감동해 기립박수라도 보내줘야 하는 건가요?

 

 

 

 

 

 

# 4.

 

홈즈라는 브랜드를 들은 관객들은 일반적으로 범죄 추리 스릴러를 기대합니다만 우리의 해리 브래드비어 감독은 천재 탐정 가족을 데려와 인디에나 존스식 액션 어드밴처 + 주만지식 퍼즐 게임을 연성하겠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안합니다.

 

열차 추격 씬에서 "두 가지 방법이 있어!" 따위의 폼을 잡은 후 내놓는 대답이란 게 고작 냅다 뛰어내리기인 걸 목격하는 순간. 주요 서사 진행마다의 추리랍시고 준비한 것이 고작 낱말 퀴즈고 그 낱말 퀴즈의 풀이과정이라는 것 역시 그저 겁나 똑똑한 에놀라가 머릿속에서 퍼즐을 막 움직였더니 짜잔! 정답이 찾아졌어요! 로 귀결되는 순간. 정답을 풀어갈 때마다 여지없이 전개상 정확히 필요한 단서들이 친절하게 전시되어 있는 걸 확인하는 순간. 모든 인물들이 순간이동이라도 하는 듯 필요한 시점, 필요한 장소에 꼬박꼬박 친절하게 나타나는 순간. 그나마의 액션 시퀀스들 역시 그저 에놀라가 쌈박질 먼치킨이라 무조건 이긴답니다! 라는 식으로 대충 퉁치는 순간들 마다마다. 영화의 장르적 재미는 최선을 다해 무너져 내립니다.

 

# 5.

 

마이크로프트와 셜록과 관객 모두를 희생해가며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여성의 자기실현]입니다. 분명히 하건대 저는 이글에서 해당 메시지에 대해 논평 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면 제대로 하라는 것이죠.

 

이전 시대의 패러다임을 내면화한 사람의 사고방식을 충분히 고찰해 그 나름의 합리성을 전달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가치가 이를 논파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공들여 묘사했어야 합니다. 당대 영국의 여성 참정권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제대로 조사해서 확실히 묘사했어야 합니다. 손쉽게 남이 만든 위대한 캐릭터의 권위를 훔쳐와 빌붙을 생각하지 말고 '에놀라'가 스스로 슈퍼스타가 될 수 있는 충분한 쟁취의 과정을 고민했어야 합니다. 메시지를 대사에 때려 박아 카메라 보고 읊을 시간에 '에놀라'의 자기 주도적 여정을 관객 스스로 감동할 수 있도록 시나리오를 다듬었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앞가림을 말하는 주인공의 역경의 순간마다 멀쩡히 살아 있는 엄마가 예토 전생 해 툴팁을 던져대는 연출을 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그렇게나 끔찍해하는 마이크로프트의 돈을 훔쳐 대충 얼렁뚱땅 모든 위기를 넘을 게 아니라 에놀라 스스로의 힘으로 런던 한복판에서 살아남는 서사를 설득했어야 합니다.

 

감독은 여성이여. 자신의 삶을 찾아라 라는 주제의식을 고작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수십 번 반복합니다. 사랑하는 엄마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잔소리도 몇 번 반복하면 지겨운데 생판 처음 보는 감독 놈이 방언처럼 지 생각을 주절거리면 지치지 않을 도리가 없죠. 감독아, 알겠다고. 알았으니까 영화나 제대로 만들라고, 새꺄!

 

 

 

 

 

 

# 6.

 

디테일을 살펴보면 영화는 한층 더 처참해집니다. 물에 수차례 머리를 넣은 사람이 적당히 숨만 참으면 달아날 수 있다는 전개는 나태해도 너무 나태합니다. 암살자가 단도 들고 허우적대는 액션 연출은 어처구니를 화끈하게 승천시킵니다. 감독이 제안하는 신출귀몰 변장 어드벤처 역시 프린세스 메이커식 공주님 옷 갈아입기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튜크스베리와 함께 학교를 탈출하는 장면에서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에놀라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 싸가지 없는 감독 놈이 관객을 기만하는 연출이죠. 저택 한복판에서 샷건을 갈기는 것까지 보면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총 들고 몸싸움하던 병신들이 막타는 굳이 기절한 여주가 깨어날 때까지 친절하게 시간을 벌어줄 목조르기로 시전 하는 걸 보며 깊은 현타에 빠지고 맙니다.

 

에놀라가 마이크로프트에게 붙잡혀 들어가게 된 학교 생활은 감독이 생각하는 '올바른' 관객들을 열 받게 만들려는 편의적 목적의 시퀀스에 불과합니다. 억지로 힘줘가며 등장시킨 코르셋은 노골적이죠. 이 씬에서 스트레스를 의도적으로 주입해 클라이맥스에서 해갈하겠다는 식의 접근법은, 엄복동에서 정석원이 엄복동 동생을 총으로 쏴 죽이는 장면에 정확히 대응된다 할 수 있습니다.

 

딴에는 반전이랍시고 할매가 나타나 자기 손주에게 샷건을 갈기지만 묘사가 부실해 감동 없이 황당하기만 합니다. 벽채가 무너져 내리는 샷건을 그 얇은 철판이 어떻게 막아낸 건지, 방금 직전까지 샷건을 갈긴 사이코패스 할매가 등 뒤에 눈 시퍼렇게 뜨고 서 있는 데 주인공 커플은 무슨 깡으로 포옹이나 하고 자빠진 건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Your time is over"라는 손발 오그라드는 대사 한마디만 할 수 있으면 된 거겠죠.

 

 

 

 

 

 

# 7.

 

영화는 메시지라는 왕을 모시는 시녀가 되고, 그 동안의 이물감을 가리기 위한 정신 사나운 화면 연출이 쏟아져 내리지만 이들에 현혹되었던 것을 극복하고 돌이켜보면 전개 역시 괴기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빠는 돌아가시고 오빠 둘은 독립했는데 엄마랑 잘 크다가 엄마가 갑자기 집을 나가고 오빠 둘이 집에 돌아오더니 자신을 학교에 넣는답니다. 상식적으로 자신을 버리고 집 나간 엄마에 대한 반항심이 가장 커야 하지만 우리의 덜떨어진 엄마바라기 에놀라는 엄마를 찾아 나서죠. 엄마 찾다 말고 어릴 때 키우던 양 생각이 나서(?) 웬 잘생긴 예비 남자 친구를 구하겠다고 유턴을 합니다. 딸의 안전을 확신하지 못해 잠수 탓다던 엄마는 신문 광고 쪼가리에 반응해 눈앞에 나타나구요. 십수 년간 연 끊고 살던 오빠들이 왜 갑자기 엄마를 찾고 싶어 하는 건지, 왜 갑자기 여동생에 집착하는 건지 1도 이해가 가지 않는 와중에 자기 주도적인 삶을 주창하던 영화의 결말은 마이크로프트 대신 셜록이라는 더 친절하고 더 유용한 보호자가 생긴 결로 귀결됩니다. 이 쯤 되면 영화라고 하기도 민망하죠.

 

이 개막장 영화는 결국 백마 탄 왕자님이 된 꽃미남과의 소녀 감성 로맨스로 마무리됩니다. 적당히 막을 내려야 하니 직전까지 괴물 같던 마이크로프트는 갑자기 정상인 코스프레를 하고, 1등급 호구 셜록 역시 근육질 수트핏을 자랑하며 퇴장합니다.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 인생은 내 거라는 둥의 주요 메시지를 직접 대사로 치고 또 치는 건 감독이 자기 영화의 모범적 관객들이 십여 차례 반복해 말해주지 않으면 뭔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머저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 말고는 설명되지 않죠.

 

... 네. 보지 마세요. 이거 볼 바에야 차라리, 차라리 <#살아있다>를 보세요. 그쪽도 엉망이지만 적어도 무례하지는 않으니까요. '해리 브래드비어' 감독, <에놀라 홈즈>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 본 블로그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글에서 다루는 작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댓글", "포스트를 자신의 블로그로 유인하는 데 이용하려는 댓글", "무분별한 맞팔로우 신청 댓글" 등은 삭제 후 IP 차단될 수 있습니다.

 

 

"좋아요", "댓글""구독"

 

은 블로거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