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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Animation

46년간의 겨울 ⅰ _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그냥_ 2020. 6. 1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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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신기한 영화입니다. 대단히 편안하고 친절한 동화이긴 한데 어린이용 동화로만 보기엔 무지막지하게 많은 코드가 동시에 읽히거든요. 겨우 80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영화 안에 이렇게나 많은 은유를 녹여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말이죠. 

 

그림쟁이 쥐와 음악가 곰의 사랑스러운 동화에 대한 이야기는 굳이 글로 풀어놓을 필요가 없을 만큼 안정적이기에 생략하구요. 이 글에선 제 나름대로 이해한 코드들에 대한 생각들을 조악하게나마 풀어보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 영화를 공산주의 진영(쥐)과 자본주의 진영(곰) 간의 냉전 시대 갈등과 인간성 회복에 대한 우화로 읽었습니다.

 

 

 

 

 

 

 

 

'뱅상 파타', '스테판 오비에', '벵자맹 레네' 감독,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 Ernest et Célestine』입니다.

 

 

 

 

 

# 1.

 

'셀레스틴'의 첫 등장 씬은 공동 육아와 교정으로 설명됩니다.

 

보모는 어린 생쥐들에게 "곰들은 타이어와 전등, 자전거, 자동차, 집을 먹는다" 말합니다. 그리고 "작은 쥐들 역시 한 마리도 아닌 백 마리, 천 마리씩 잡아먹는다" 말하죠. 쥐는 그렇다 치더라도 물건들을 먹는다는 건 영 이상한 대사인데다 물건을 먹는다는 대사가 먼저 나오며 강조된다는 것 역시 영 이상합니다. 상식적으로 타이어와 전등 따위는 식량이 아닌 물자니까요. 부르주아들이 프롤레타리아로부터 재화를 약탈해 가고 한 명의 부르주아의 부를 위해 천명의 프롤레타리아가 희생된다는 주장에 대한 은유로 해석한다면 썩 자연스럽습니다.

 

 

 

 

 

 

# 2.

 

<무서운 곰>의 존재는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이념은 더 이상 논리가 아닌 당위이자 신념이죠. 보모가 곰(자본주의자)과 쥐(공산주의자)가 친구가 되는 것은 동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라 소리치는 순간. 감독은 그렇게 말하는 보모의 이빨을 빼버립니다. 이 공고한 선입견과 격화된 대결을 부정하고 비판할 것이라 선언하는 연출입니다.

 

 

 

 

 

 

# 3.

 

'어네스트'의 첫 등장은 고립과 빈곤으로 설명됩니다.

 

공산주의자의 배신은 교정되지만 자본주의자의 배신은 고립되는 법이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곤한 곰은 스스로 광대가 되어야 합니다. 이들의 사회에서 음악은 사람들을 달래기 위한 예술이 아니라 구걸을 위한 도구로 전락합니다. 무려 '노래를 부른 죄'로 자본주의의 경찰들은 '합법적으로' 악기를 압류하고 벌금을 부과합니다.

 

 

 

 

 

 

# 4.

 

작고 어린 '셀레스틴'이 이빨을 찾아다니는 것은 지표적 성장에 매몰된 공산주의 사회의 가혹한 아동 노동으로 이해됩니다. 대조적이게도 자본주의 사회의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잠자리에 들지만, 대신 버려질 이빨 하나까지 알뜰히 활용해 자본주의 경제 논리를 학습받게 되죠. 뽑은 이빨로 엄마에게 흥정을 하는 아들에게 역시 내 아들이라 자랑스럽다 말하는 아빠 곰의 모습은 제법 의미심장합니다.

 

 

 

 

 

 

# 5.

 

공산주의자에게 자본가는 자신들을 착취해가는 무시무시한 악당으로 묘사된다 한다면, 자본주의자에게 공산주의자는 지저분한 존재로 멸시됩니다. 아빠 곰은 어린 아들의 방에 숨어든 쥐 한 마리를 잡기 위해 무수히 많은 쥐덫을 놓지만, 정작 쥐는커녕 아빠 자신의 손을 찧고 맙니다. 군비 경쟁의 허망함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죠.

 

 

 

 

 

 

# 6.

 

그렇게 이들이 분리되어 경쟁하고 암약하며 다투는 시대는 눈이 내리는 겨울. 즉, 냉전입니다.

 

 

 

 

 

 

# 7.

 

곰 가족으로부터 출신성분(쥐)을 이유로 내버려진 '셀레스틴'은 굶주림에 쓰레기통을 뒤지던 '어네스트'에게 구출됩니다. 배고픈 '어네스트'에게 잡아먹힐 뻔한 '셀레스틴'은 대신 사탕 가게 창고의 존재를 알려주는군요. 이 장면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둘의 행동 양식입니다.

 

'셀레스틴'은 자신의 행동이 몰래 해야 하는 도둑질이라는 걸 명확히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어네스트'는 이를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나쁜 일이지만 배가 고프니 어쩔 수 없이 이 나쁜 짓을 한다'가 아니라 '내가 지금 배가 고픈데 눈 앞에 먹을 것이 풍족하니 먹으면 좋다' 정도로 사탕들을 대하죠. 사탕 창고에서 경찰에 잡혀가는 순간에마저 '어네스트'는 내 마시멜로를 돌려달라 소리칩니다.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공산주의자의 사고방식이죠. 

 

 

 

 

 

 

# 8.

 

'어네스트'와의 첫 만남 후 '셀레스틴'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셀레스틴'이 돌아온 쥐들의 사회에는 개인이 없습니다.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사적 관계는 영화 내내 일절 그려지지 않습니다. 모두 함께 훈련하고 함께 일하며 함께 쉽니다. 과시적이면서 동시에 감시적인 치과 타워는 노동의 성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빨을 전달하는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파이프들과 임플란트를 갈아 넣는 연필깎이는 냉전시대 공산주의 국가들의 강렬한 중공업적 이미지를 대변합니다.

 

 

 

 

 

 

# 9.

 

유능한 치과의사는 이런 공산주의 사회의 지도자입니다.

 

치과의사는 '예술'을 사랑하는 '셀레스틴'에게 노동자들의 희생과 노동의 숭고함을 마치, 극단적인 국가주의적 지도자들과 같은 말투로 역설하며 '쓸데 없는 생각'에 빠진 어린 쥐의 사상을 교정하려 합니다. 치과의사가 주창하는 사회에선, 훔쳐오기 용이한 작은 쥐는 훔칩니다. 노동하기 용이한 큰 쥐는 노동 합니다. 가져온 이빨과 힘들인 노동에 대한 개인적 보상은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이빨이 사라질 때까지 갈고 또 갈다가, 더 이상 이빨을 쓸 수 없게 되면 죽습니다. 비인간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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