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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Comedy

과적 금지 _ 판소리 복서, 정혁기 감독

그냥_ 2020. 5. 2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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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병구가 돌린 전단지를 본 민지는 체육관을 찾아와 복싱의 다이어트 효과에 대해 문의합니다.

글쎄요. 다이어트는 날아갈 듯 날씬한 혜리보다 이 영화가 더 필요해 보이는데요?

 

 

 

 

 

 

 

 

'정혁기' 감독,

『판소리 복서 :: My punch-drunk boxer』입니다.

 

 

 

 

 

# 1.

 

번개 같은 주먹! 병구 주먹!

천둥 같은 장단! 민지 장단!

 

예고편을 본 관객들은 판소리 복서 엄태구가 혜리의 장구 가락에 맞춰 흐느적흐느적 주먹을 휘두르는 걸 본 순간 끝났다 생각했을 겁니다. 아이템의 파괴력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른 것 다 필요 없고 이 병신 같지만 멋있는 매력을 찰지게 풀어내기만 하면 무조건 대박이다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의 주인공 병구가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김수현 같은 빙구미를 뽐낼 수만 있다면. 병구와 민지의 투샷이 미묘하게 사랑스러운 찐따미를 뽐낼 수만 있다면. 나머지의 개연성, 메시지, 내러티브 따위의 부차적인 것들은 최대한 호의적으로 합의해줄 마음의 준비를 관객 스스로 하고 있었을 겁니다.

 

 

 

 

 

 

# 2.

 

허나 영화는 관객의 기대를 보기 좋게 배신합니다.

 

판소리 복서 하나에만 혼신의 힘을 기울여도 모자랄 판에 온갖 아이템과 장르가 영화의 매력을 혼탁하게 합니다. 복싱에 판소리에 코미디에 드라마에 로맨스에 종교에 시사에 철학까지. 파편화된 요소들을 무지막지하게 섞어 두는 가운데 모든 것들을 손에 쥐어보려 아등바등하지만 그 결과는 복싱도 아니고 판소리도 아니고 코미디도 아니고 드라마도 아니고 로맨스도 아닌 괴작이 되고 말았습니다.

 

 

 

 

 

 

# 3.

 

템포가 무지막지하게 느려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고작 110분 남짓의 영화가 3시간짜리 <아이리시 맨>보다 더 피곤합니다. 전반적인 진행이 어마어마하게 늘어집니다. 초반은 숨 고르기 일 뿐 런타임이 흐르다 보면 템포가 빨라지려나 싶었습니다만 되려 중반부를 넘어갈수록 더더욱 쳐지고 질척거립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지루한 게 당연합니다.

영화엔 서사가 없거든요.

 

2시간에 달하는 동안 '혜리가 나타났고 엄태구가 시합을 치렀다'가 서사의 전부인데 그마저도 마지막 30분에 몰려있습니다. 병구의 마지막 경기가 잡히기 전까지는 온갖 종류의 이미지와 그 이미지에 투사된 관념들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서사 하나 없이 묘사만으로 영화가 굴러갑니다. 런타임 절반을 소개로 때우면 당연히 관객이 지쳐 나자빠진다는 걸 간과합니다.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소화해야 할 아이템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죠.

 

 

 

 

 

 

# 4.

 

'한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야 한다'라는 식의 노골적인 자아실현 코드가 등장하는 순간. 장 사장과 같은 상투적인 캐릭터가 재개발과 같은 상투적인 아이템을 들고 투입되는 순간. 도핑과 할머니와 3류 타령이 거론되는 순간 마다마다 느려 터진 영화의 호흡은 더 느려져 갑니다.

 

관객이 바보도 아니고 지연이 허구적 존재라는 걸 한참 전에 눈치챈 상황에서 이 인물이 펀치 드렁크로 인한 환각이라는 걸 반전이랍시고 실토하는 순간. "시대가 끝났다고 우리가 끝난 건 아니잖아요!" 따위의 주제의식을 감독 스스로의 자백하는 순간. 필름 카메라와 고장 난 티브이가 낡고 오래된 것들에 대한 유아적 은유로 동원되는 순간 마다마다 영화의 매력은 뭉텅이로 사라져 갑니다.

 

공무원 시험이나 볼까라는 둥의 청년 실업 코드가 들어오는 순간 무방비로 어퍼컷을 처맞은 것처럼 눈앞이 깜깜해집니다. 밑도 끝도 없이 유기견이 사망하는 걸 넘어 체육관을 넘겨주는 대가로 시합이 성사되었다는 신파까지 가노라면 관객이 대신 펀치 드렁크를 처맞은 것 마냥 뇌정지가 오게 됩니다.

 

 

 

 

 

 

# 5.

 

전혀 조립되지 않은 온갖 종류의 아이템들을 욕심쟁이처럼 꾸역꾸역 모아대면 진행은 커녕 아이템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게 당연합니다. 뭔가 조금 흘러가나 싶으면 다른 아이템의 다른 국면으로 전환되기를 무수히 반복합니다. 직전까지 펀치 드렁크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로맨스 편지를 쓰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다가 건축물 재개발 이야기를 하면 관객은 당연히 답답함과 어지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뭐가 되었든 한 가지 테마에 확실히 힘을 실었어야 했습니다. 복싱에 힘을 실어서 마지막 재기를 위한 도전기를 풍부하게 그리거나, 병신 같지만 그럴싸한 판소리 복싱이란 놈을 공들여 조각했더라면 지금보단 훨씬 좋았을 겁니다. 쓰잘데기 없는 감동 코드 싹 도려내고 코미디에 혼신을 갈아 넣어 적중률을 최대한 끌어올려 대중성을 높였어도 괜찮았을 테고, 아싸리 병맛 로맨스로 방향을 틀어 잡았어도 좋았을 겁니다. 단, 드라마만 아니라면. 그중에서도 특히 신파만 아니라면 무슨 길로 가든 괜찮았을 겁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영화는 온갖 잡기를 놓지 못하는 가운데 그나마의 동력을 신파로부터 찾습니다.

아...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 6.

 

드라마는 진지해야 합니다. 진중해야 합니다. 등장 인물들의 행동 일부분이 다소 과장되거나 희화될 수는 있다 하더라도 삶에 대한 태도만큼은 절대 과장되거나 희화되지 않아야 합니다. 문제는 이 영화의 소재가 본질적으로 드라마로서 작동할 수 없는 아이템이라는 거죠. 판소리 복서라는 아이템 자체가 '과장'과 '희화'이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펀치 드렁크와 관련된 무거운 배경이 있다 하더라도 병구의 몸놀림이 진중한 것으로 설득될 리가 없음은 당연합니다.

 

병구가 괴짜 판소리 복서가 아니라 펀치 드렁크 환자가 되는 순간 그의 바보스러운 개그를 즐기면 즐길수록 불편해지는 게 당연합니다. 병구가 펀치 드렁크 환자가 아니라 괴짜 판소리 복서가 되는 순간 그를 둘러싼 감정적 드라마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 게 당연합니다. 코미디를 바라보면 드라마가 터지고 드라마를 바라보면 코미디가 터져나갑니다. 외통수죠.

 

 

 

 

 

 

# 7.

 

1시간 남짓 길어야 1시간 10분 안쪽으로 줄였더라면 어땠을까요. 조잡한 아이템들 이를테면 재개발이니 할머니니 성경이니 도핑이니 청년실업이니 유기견이니 하는 것들 싹 도려 냈으면 어땠을까요. 찰진 판소리를 곁들인 복싱 스텝과 깨알 병맛 코미디 몇 방에 올인했더라면 어땠을까요.

 

병구가 제 아무리 펀치 드렁크를 앓고 있다 한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파이터답게! 복서답게! 쿨하고 멋지게! 경기에 올랐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분투에 가슴 졸일지언정 그가 불쌍해 보이게 만들면 안 되지 않았을까요.

 

천둥 같은 민지 장단이 링에 울려 퍼지는 순간 모든 관객들이 홀가분하게 흥을 즐겼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가지고 있는 것을 모조리 불태운 병구는 멋지게 K.O. 당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쓰리진 링 위에서의 사족이나 이후 앤딩에 담긴 것과 같은 뜨뜻미지근한 여운은 관객 스스로의 몫으로 남겨뒀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랬더라면 지금보단 더 낫지 않았을까요.

 

# 8.

 

의도는 정반대였겠습니다만 역설적이게도 '복싱'과 '판소리'가 우리나라에서 어쩌다 대중성을 잃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영화라는 생각입니다. 작금의 복싱과 판소리가 그러하듯 이 영화 역시 당위만 가득할 뿐, 본질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데엔 실패하거든요. 세상에... 어디 영화 따위가 본분은 소홀히 하며 건방지게 당위로 무장하고서 관객에게 도덕성 시험을 하려 드나요. 그러니 관객 수로 혼이 나죠. '정혁기' 감독, 『판소리 복서』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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