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에 새로운 역사가 쓰였습니다. UBD라는 천년의 유산을 남긴 『자전차왕 엄복동』(이하 엄복동)이 『라스트 갓파더』의 시대착오적 코미디와 퓨전해 한층 강력해진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죠. 이 영화는 무려 '엄복동'을 이깁니다. 심지어 위대한 『리얼』의 아성에까지 도전해 볼 법합니다.
'김태윤' 감독,
『미스터 주 _ 사라진 VIP :: MR. ZOO 』입니다.
환상적 스타트
오프닝을 주목해 보는 건 이어 보게 될 영화의 수준을 가늠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명작들은 시작부터 자신이 얼마나 잘 다듬어진 대단한 영화인지를 가감 없이 자랑합니다. '봉준호' 감독 작 『마더』의 압도적인 오프닝 시퀀스는 좋은 예라 할법하죠. 반면, 폭망작들 역시 오프닝에서 자신이 얼마나 망작인지를 가감 없이 자랑합니다. 아, 똥이다. 이 냄새다.라는 걸 확실히 보여줍니다. 역시 극과 극은 통하는 걸까요.
이 영화 역시 시작부터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엄복동』이 싸구려 CG 새 한 마리를 날려 보내며 자신이 신파와 애국심으로 3.1절 한철 장사하는 영화라는 걸 솔직히 고백했다면, 이 영화가 소개하는 스스로의 정체성은 무려 <PPL>입니다. 시작과 동시에 누가 봐도 어색하기 그지없는 가정용 로잉머신이 등장하기 무섭게, 주인공인 '이성민'보다 더 큼지막하게 등장하는 스마트 스피커가 관객을 무한히 이어질 광고의 이자나미로 인도합니다. 인지도와 연기력 대비 출연료가 저렴한 조연급 배우를 주연으로 섭외한 후, 영화 분량의 대부분을 작품을 홀로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한껏 충전된 주인공의 똥꼬쑈로 채워 최대한 제작비를 절감한 후, 무수히 많은 PPL과 IPTV와 OTT 서비스를 총동원해 최대한의 수익을 보고 빠지는. 그딴 목적의 영화라는 걸 오프닝 몇 분 만에 단번에 이해하게 합니다.
PPL 뽕을 한번 놓은 후 이어지는 엘리베이터 씬. 왠 뜬금없는 여성적 코스튬의 마초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징그러운 아저씨가 키우는 강아지가 주인공의 얼굴에 실례를 하는 것을 개그랍시고 던지죠. 재미있는 걸 보고 터지는 건강한 웃음과, 불쾌함에 터트리는 실소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무려 코미디 영화의 감독을 하고 있다는 걸 명확히 확인하게 됩니다. 시작부터 무면허 운전자의 버스에 올라탄 승객과 같은 공황장애가 엄습합니다. 뒤 돌아있는 주인의 강아지에게 손찌검을 하려던 찰나 주인이 되돌아보며 뻘쭘해한다는 식의 유머 일번지 시절 슬랩스틱 코미디와, 똥오줌 하면 깔깔대고 웃는 미취학 아동 수준의 화장실 개그가 관객의 정신건강에 심대한 도트 딜을 넣습니다. 한국은 코미디 영화의 불모지라구요? 웃기시네. 이런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코미디를 대하니 망하는 겁니다만.
이어서 처음으로 주인공이 대사를 치는 총기 연습장 씬이 나오는데요. 앞서서의 두 씬이 똥 '냄새'가 나는 장면이라면 이 장면은 드디어 <똥을 직접 등장시킨 장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연기가 시작되는 순간 눈과 귀를 의심하게 됩니다. 저기요. 저 아저씨 그 『미생』의 '이성민'... 맞는 거죠?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이성민'을 비롯한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인물들은 무려 '콩트 연기'를 합니다. 영화로서의 '희극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코빅'이나 '개콘'과 같은 공개 코미디물에서 짧은 시간 안에 단타성으로 치고 빠질 때 선택적으로 적용하는 과장된 '콩트 연기'를 합니다. 거짓말 같으신가요? 저도 그렇습니다. 실력을 의심할 수 없는 주연 배우의 커리어를 생각할 때, 디렉팅이라는 게 아예 없는 걸 넘어 일부러 방해하는 수준의 지시가 있어야만 나올법한 연기가 펼쳐집니다. 무슨 100년 전 변사와 함께하던 신파극을 보는 것도 아니고. 연극영화과 신입생들도 하지 않을 법한 싼마이 톤의 과장된 대사 처리들이 비단 '이성민'뿐 아니라 거의 모든 인물들에게서 쏟아집니다. 해당 씬 마지막의 밑도 끝도 없이 휘갈기는 중국어 대사는 관객에게 날리는 페이탈리티죠.
감독은 일부러 싸구려 영화의 전형을 모아둔 게 분명합니다. 『협상』과 같은 J.K 식 영화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체는 쥐뿔도 없지만 최대한 있어 보이는 척을 해야 할 때면 아무런 맥락 없이 한쪽 벽을 가득 메운 무식하게 큰 디스플레이에 초록색 세계지도를 뛰우고 그 위에 CCTV 화면을 몇 개 대충 겹쳐 깔아 두는 연출은 이 영화에도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국가 안보'나 '세계 평화'와 같은 <아무런 개연성 없이 관객에게 제발 몰입해달라고 구걸하는 싸구려 설정>들은 덤이죠. '이성민'들이 주절주절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면 결론은, 중국에서 우호 사절로 판다를 한 마리 보냈고, 그걸 국정원에서 경호를 하겠다... 뭐 그런 건데요. 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전 이 지점부터 승천하는 어처구니와 함께 뇌에 과부하가 걸려 침을 질질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저기요. 판다 경호를 왜 국정원에서 하는 거죠? 상식적으로 누군가를 <경호한다>라는 설정을 먹히게 하려면, 1. 대상을 해치는 걸 목적으로 하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걸 충분히 예상할 수 있거나, 2. 경호 대상이 스스로 다른 마음을 먹고 도주할 가능성이 있어서 신변을 확보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한데, 씨X 그런 게 하나도 없잖아요? 감독이 주장하는, 판다를 경호하는 이유라는 건 <그냥 겁나 귀중하다>라는 게 전부입니다. 아니, 그딴 논리면 '이성민'은 석굴암은 왜 경호하러 안 가는 거랍니까. 석굴암도 겁나 중요한데? 현실 속 우리가 왜 석굴암을 경호하지 않는 걸까요. 왜긴 왜야! 누가 석굴암을 쌔벼갈 리가 없으니까 그렇지!!!!
장르적인 면에서 판다를 국정원이 경호 한다라는 설정을 만든 이유는 단순합니다. <하찮은 일을 거창하게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웃음을 주겠다>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걸 웃긴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면, 그 하찮은 일을 거창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란 놈을 필연적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야 몰입을 하죠. 이걸 굳이 짚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러려고 리뷰를 하나 하는 자괴감이 듭니다만, <좋은 코미디> 이전에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코미디>를 위해선 대상이 바보여선 안 된다는 건 상식입니다. 당사자는 때론 비극적일 정도로 합리적이고 또 진지하지만, 그 대상의 최선이 한 발짝 떨어진 사람들의 눈에 희극적으로 보여야 코미디죠. '채플린'은 100년 전부터 한 게 이건 데요. 2020년에 이 조잡함은 대체 뭔가요.
전화가 오는 데 미친놈도 아니고 왜 냅다 소리를 치는 겁니까? 판다는 왜 또 특사님이라고 부르는 건데요? 어디 판다가 명예 훼손으로 고발이라도 한답니까? 진급에 눈이 먼 사람이 일 하다 말고 딸내미가 부르는 전화 한마디에 회의를 내팽개치고 가는 걸 나더러 몰입하라구요? 딸이란 애는 지 애비를 '미스터 주'라고 부른다구요? 네이버에서 배웠다 드립은 지금 웃으라고 치는 거 맞는 건가요? 사람 구하는 동물은 많아도 동물 구하는 사람은 없지 않냐구요? 겁나 많을 텐데?!
갑자기 엄마 없이 커서 그렇다고 패드립을 날린다구요? 아빠는 딸의 패드립을 개무시하고 동물 싫어한다는 대답을 한다구요? 둘이 대화를 하고 있는 건 맞나요? 뭐야, 그러고 보니 인물 배치는 왜 저래? 둘은 왜 어정쩡하게 2m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을 하고 있는 건데요? '주복동'의 세계에도 코로나가 도는 걸까요? 동물을 싫어하는 데다 결벽증까지 있다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길고양이가 들려지면 놀래서 떨어트리는 게 일반적인 반응 아닌가요? 뭐? 이 미친놈이 고양이를 쓰레기통에 집어 쳐 넣었다고? 고작 <동물을 끔찍이 싫어한다>는 걸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게 그거야?!?! 아니 씨X!!!
사과 빌런의 충격
... 판다 한 마리가 이송되는 데, 그래요. 인력 투입은 네. 위에서 깔만큼 깠으니 그러려니 합시다. 받아들여 줍시다. 그런데 이 판다가 무슨 대나무에 마약이라도 가지고 들어왔나 봐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탐지견들이 왜 때문인지 줄줄이 나와 풀냄새를 맡고 있거든요. 아, 반려견과의 관계 개선 및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노즈 워크인 걸까요. 감독은 '강형욱'의 팬인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참. 나름 비밀요원이면 좀 티 안 나게 하고 돌아다녀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일반인들이 득실득실한 공개장소에서, 애저녁에 뒤진 개연성의 장례식장에서 상주 노릇을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법한 흰 셔츠 블랙 정장에 맥아더 선글라스는 왜 쳐 끼고 있는 걸까요. 아, 이 영화가 『인천 상륙작전』 급이라는 걸 은유하는 오마쥬일 수는 있겠군요. 내친김에 또 하나. 왜 국가 사절이라는 판다를, 왜 동네 근린공원 같은 데서, 왜 실물로 보여주는 건가요. 차라리 저 지랄할 비용으로 축사를 근사하게 꾸민 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방송을 한다는 게 훨씬 말이 되지 않나요?
잠깐 논외로, 당연한 이야기지만 배우도 전문직입니다. 개중에 연기 잘하는 배우도 있고 못하는 배우도 있다지만, 어쨌든 배우가 배우인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죠. 무슨 이야기냐구요? 충분한 준비 과정 없이 능력에 맞지 않는 배역에 사람을 잘 못 쓰면... 아. 돌려 말하기 힘드네요. 그냥 주연 배우 옆의 주조연 급으로 '배정남' 쓰면 망한다구요. 적어도 직전까지는 상황적 이물감만이 강하게 느껴지던 영화가 '배정남'이 등장하면서부터 오그라드는 손발에 척추가 뒤틀리는 느낌을 주는 영화로 한 단계 진화합니다. 제가 초반에 말씀드렸죠. 이 영화는 『엄복동』 이하라구요. 네, 적어도 연기 하나만큼은 『엄복동』이 이 영화보다는 확연히 낫습니다. 『엄복동』엔 적어도 이렇게 노골적인 연기력 트롤은 없거든요.
미친 듯이 어색한 동물 CG도, 말도 안 되는 막장 전개도, '배정남'의 발연기도, 그래요. 일단 넘어갑시다. 어찌 되었든 판다를 일반에 공개하는 이벤트를 하고 있고, 이 판다가 납치된다는 건데요. 좋아요. 드디어 '이성민'이 영화 내내 추격하게 될 메인 빌런이 등장할 타이밍 이군요. 두구두구두구두구...
감독은 메인 빌런으로
<청소차 트렁크에서 후드 쓰고 사과 처먹는 미친놈>을 준비합니다!!!!!!!!!
와!!!!!!! 대한 독립 만세!!!!!!!!!!!!
... 그야말로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빌런이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악당이 등장하는 순간의 정신적 충격은 『엄복동』에 나온 마약사범의 찰진 엉덩이보다도 백배는 강렬합니다. 급격한 정신적 충격에 입가에 경련이 일며 주화입마에 빠져들게 됩니다. 2020년에 개봉한 한국 영화에 <무려 백설공주를 괴롭히던 사과 바구니 왕비를 성전환시켜 빌런으로 소환하겠다는 비범한 상상력>를 펼치는 걸 보며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사과 빌런의 졸개 셋이서 연막탄을 퐁퐁퐁 쏘자, 모든 국정원 요원과 군부대 요원에게 패닉이 온답니다. 거참 다행이네요. 한 다섯 명이서 불꽃놀이라도 했다가 나라가 마비되었을 텐데. 그렇게나 중요하다는 판다를 아무런 울타리 하나 없이 꺼내 놓은 용맹한 기획에 호응하듯 판다 역시 신나서 근린공원을 산책하러 다닌답니다. 참고로 판다는 번식도 귀찮다는 이유로 잘 안 하는 탓에 판다용 야동을 보여줘야 하는 친구들이지만, 뭐 그런 것 따위 우리 감독님께 중요하겠습니까?! 대한민국 시내 한복판에서 마취총으로 판다곰을 납치하는 게 가능한 세상인데 뭘 못하겠어요.
'이성민'이 초근거리에서 범인들에게 총을 겨누는데, <미리 터트려 놓은 연막탄>도 아니고 <방금 던진 연막탄> 때문에 범인을 놓치는 걸 관객더러 믿으랍니다. 중년의 '이성민'이 소화하기 힘든 몸개그를 전담하기 위해 동원된 '배정남'은 카트 하나 운전할 줄 모르는 머저린데, 쟤가 무려 국정원의 요원이라는 걸 관객더러 믿으랍니다. 저런 애도 취업이 되는데 우리나라 청년 실업률은 왜 이 모양인 걸까요. 네? 심지어 후진하는 카트에 콩하고 치였더니 갑자기 막 동물 말을 듣게 되었다구요? 이야 거참 편리하네요. 영화 만들기 참 쉽습니다.
개지랄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한 바탕 펼쳐진 후, 어쨌든 판다는 사라졌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두구두구두구두구...
네. 한중 수교가 날아갔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그러니까 '엄복동'의 세계에선 자전차 경주 때문에 독립이 안되고, '주복동'의 세계에선 판다 한 마리 때문에 G2 국가와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 간의 외교가 박살 났다는 거군요! 이야~ 자전거 훔쳐 타는 판다라도 있었다간 핵전쟁이라도 나겠네요.
이쯤이면 한 1/3 정도 지났을까요? 슬슬 쿨타임이 돌았습니다. 무슨 쿨타임? 당연히 영화의 정체성 <PPL> 쿨타임이죠. 스마트 스피커 한번 보고 가실게요. 『엄복동』이 심심하면 국뽕을 주입하기 위해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면, 이 영화는 일수 찍듯 PPL을 주기적으로 충전합니다. 언제든지 밑도 끝도 없는 전자 제품들이 중국산 판다 따위 가뿐히 밀어내고 등장할 수 있으니 늘 마음의 준비는 해두시길 권합니다.
개연성 없음. 감독 없음. 주인공 없음.
개인적으로 여기까지 보는 동안의 가장 선명한 정서는 '연민'이었습니다. 우리의 감독님은...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이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억지로 짜내가며 여기까지 끌고 오는 동안 얼마나 고충이 크셨을까요. 그래서 짜잔! 진이 빠진 감독은 이 이후의 전개를 싸구려 막 개그를 남발하는 걸로 대충 때우기 시작합니다.
동물 옷을 입히고 굴리는 분장개그, 불에 탄 후 그을린 얼굴 개그, 따봉을 곁들인 되지도 않은 역겨운 대사 개그들과, '심형래'식 띠리리 리띠리 수준의 음향효과 따위의 막장 코미디 영화 어벤저스가 운집합니다. 그 외의 공백은, 배우들을 불러다 동물을 더빙시키며 각자의 시그니처 대사들을 마치 억지 유행어를 남발하던 개그콘서트 단물 다 빠진 코너들처럼 욱여넣는 걸로 메우고 있죠. 그런데 그런 식의 억지 유행어가 요즘 시대에 먹히던가요? 개콘 시청률 얼마더라? 4%?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이 이후의 전개는 <동물들이 동물들이기에 보거나 들을 수 있는 단서들을, '이성민'이 받아다 조립하고 추론해가며 판다를 훔쳐간 빌런을 쫓는> 걸 예상할 겁니다. 만, 이 영화의 비극은 주인공이 그런 제한적 단서들을 수집해 엮어나가는 구조의 이야기를 만드는 게 감독에겐 너무 힘든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난관에 봉착한 감독. 다행히 감독님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방법을 찾아냅니다. 바로, 동물을 사람처럼 아니 사람보다 더 똑똑하게 만든 후, 동물이 시키는 대로 '이성민'이 돌아다니게 만드는 거죠. 사고로 인해 동물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동물들의 지능이 냅다 올라간다 사이에 아무런 개연성은 없습니다만, 알게 뭔가요, 귀찮아 죽겠구만. 대충 넘어가면 됐지.
물론 혹자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죠. 영화는 픽션이지 않냐. 동물이 사람같이 행동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토이스토리』 못 봤냐. 『아이스 에이지』 못 봤냐. 라구요.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만약 이 영화의 세계관이 동물들이 사람처럼 똑똑한 세상이었다면, '주태주'의 사고와 별개로 그 이전부터 동물들은 사람과 같은 행동을 했어야 합니다. 잡지책으로 딜을 할 정도의 지능을 가진 침팬지라면, 식사가 나올 때면 수저랑 앞접시 달라고 주문 벨 정도는 원래부터 눌렀어야 하구요. 군견과 멧돼지와 쥐새끼가 모여 담소를 나누는 세상이라면 야생동물들이 서로를 잡아먹을게 아니라 마트에서 장 봐다가 샤브샤브 정도는 끓여 먹는 세상이었어야 합니다. 만약, 『토이스토리』에서처럼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 사람처럼 행동하는 세계관>이라고 우긴다? 그렇다면 모든 동물들이 '주태주'에게 자신의 생각이나 사람과 같은 행동들을 들킬 때 화들짝 놀라 흩어지는 척이라도 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말이 맞죠. 동물은 사람 같을 수 없다는 것 따위의 현실성 진단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이야기라면 최소한의 극 내에서의 앞뒤는 맞아야 할 것 아닙니까.
야생 길고양이를 보며 세균 타령을 하는 사람. 집에 셰퍼드가 돌아다니자마자 쓸고 닦기부터 하는 사람이, 자기 차 그것도 조수석에 개를 태우고 귀가하셨다구요? 오자마자 씻겨야겠다는 생각부터 하는 게 아니라 집안이 작살나고 나서 딸내미가 부둥켜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씻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구요? 아니, 최소한 직접 다닥다닥 붙어 있는 씬들 사이에서는 앞뒤가 맞아야 하는 게 <예의> 아닌가요? PPL용 스마트 스피커를 보란 듯이 깨물고 다니질 않나. 거기까지 아득바득 억지 개그를 욱여넣지 않나. 뭐요? 살려주세요? 정복해 버릴 테다? 하드웨어를 다 물어뜯어 놨는 데 테이프로 칭칭 감으니까 살아난다구요? 구리스 대신 마데카솔이라도 발라줬나요? 쟤는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에 종속되어 있는 건가요? 인터넷이랑 연결된 스마트 기긴데? 감독님 문과세요?!?!
생일이라는 딸내미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생일 '파티'를 한다고 데려 온 친구는 무려 2명입니다. 그래요. 잠깐 스쳐 지나갈 아역 섭외에 돈을 쓰자니 아까우셨겠죠. 자, 사라진 판다는 모르겠고, 일단 딸내미와 동네 산책을 나서는데요. 딸내미는 다음 주에 판다를 보러 가자고 합니다. 네, 딸이 판다가 없어진 걸 모른대요.
아놔... 이것도 말이 안 되죠. 판다가 없어졌다는 걸 대외비로 했다면, 한중 수교가 망가지지 않아야 합니다. 한중 수교가 망가졌다면, 대외비가 무너졌다는 소리고, 그렇다면 온 나라가 이 이야기로 들썩였어야 하고, 이 정도 규모의 소식이면 '웰컴 투 동막골'이 아니고서야 아무리 애라 하더라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딸 이야기 나온 김에 또 하나. 이 영화는 딸과 아빠의 대화가 끝날 때면 자꾸 딸내미가 어디로 갑니다. 뭐 분가했나요? 자택으로 돌아가는 거야? 어딜 그렇게 혼자 가는 거야 자꾸?!?!
개막장 코미디 쇼를 위해 '이순재'부터 '김보성'에 '이정은'까지 생각 없이 갈아넣긴 했는데, 아직 분량이 많이 남았습니다. 난감해진 감독은 시간을 벌기 위해 온갖 종류의 감동 신파 코드를 슬슬 때려 붓기 시작하죠.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한 동물들의 사연, 무신경한 아빠와 딸의 갈등과 참회 따위들 말입니다. 심지어는 개가 회상씬까지 잡아먹습니다.
특히나 이 회상 속 전투 장면은 진짜 대단합니다. 위대할 정도로 개판입니다. 그러니까 감독의 주장은, 빌런이 UN 평화유지군을 상대로 한 테러범이라는 건데요. 이 빌런 놈이 또! 망토에, 또! 모자를 뒤집어쓰고, 또! 또! 또! 사과를 쳐 먹었답니다. 이럴 바에야 그냥 말 안 듣는 셰퍼드를 데리고 다닐게 아니라 대한민국의 과수원집 아들내미들만 조사해도 금방 잡을 것 같지 않나요? 그러니까 이 사과 빌런은 무려 1. UN군 소속의 한국군에 테러를 가하고, 2. 심지어 사상자가 나왔고, 3. 심지어 그걸 수십 명의 전우들이 눈앞에서 똑똑히 지켜봤는 데, 4. 심지어 멀쩡히 살아서 달아난 데다, 5. 심지어 국내에까지 버젓이 들어와 6. 심지어 도심 한복판에서 7. 심지어 집채만 한 판다 곰을 쌔벼서 토꼈다는 거죠. 8. 그리고 심지어 그걸 영화로 찍어다가 9. 심지어 개봉까지 하면서 10. 심지어 관객더러 믿으라고 하고 있는 거구요. 정말이지. 대단하지 않습니까?!?!
영화의 톤은 어쨌든 엉망진창이나마 코미디로 가고 있는데, 모든 배역들 역시 콩트 연기를 하고 있는 데, '김서형'의 '민국장'만은 혼자 눈 시뻘게 져서 정극 연기를 하고 있는데, 연기 이전에 이 인물은 국장인지 패션모델인지부터 잘 모르겠습니다. 비단 '김서형' 뿐 아니라, 모든 배우들의 감정선에 아무런 일관성도 기승전결도 없습니다. 그냥 '지문'에 따라 감정을 생산해서 납품하고 있다는 인상에 훨씬 가깝습니다. 지문에 울라고 적혀 있으니까 울고, 버럭 소리치라고 적혀 있으니 소리치는 식입니다. 대사들은 거의 하나도 이어지지 않고, 행동 역시 하나도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 점이 이 영화가 『엄복동』 보다 못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엄복동』도 마찬가지로 대사가 구리고 비겁하긴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말은 됩니다.
특히나 이 영화에서 '이성민'의 캐릭터는 좀 심각합니다. 이 인물은 자기 연기를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행동이라곤 영화 시작 로잉머신을 돌리는 것뿐, 그 외의 모든 연기는 <리액션>뿐 입니다. 동물을 보고 놀라는 역할. 동물이 시키는 대로 돌아다니는 역할. 동물이 하는 말 알아듣는 역할. 누가 말하면 듣는 역할. 스피커가 지시하면 행동하는 역할. 딸내미 앞에서 주눅 드는 역할. 등등등. 피드백 셔틀이죠. 포스터엔 '이성민'의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등장하지만, 이 인물은 주연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주연들의 연기를 보조하는 <매우 큰 분량의 중요한 조연>이죠. 멀쩡한 배우 데려다가... 씨X 뭔가요,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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