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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Less is More _ 시저는 죽어야 한다, 타비아니 형제 감독

그냥_ 2020. 5. 1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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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재소자들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무엇을 발견하고 있었던 걸까.

감독은 연기하는 재소자들로부터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관객은 이들의 극을 보는 동안 무엇을 목도하고 있었던 걸까.

 

 

 

 

 

 

 

 

'비토리오 타비아니', '파올로 타비아니' 형제 감독,

『시저는 죽어야 한다 :: Cesare deve morire』입니다.

 

 

 

 

 

# 1.

 

타비아니, 워쇼스키, 샤프디, 코엔 등 대체로 무슨무슨 형제가 영화를 만들었다면 조심하셔야 합니다. 퀄리티 이전에 무지막지하게 어려울 가능성이 높거든요. 이 영화 역시 그러합니다. 각각이 요소들은 여타 형이상학적 예술 영화들에 비해 이례적일 정도로 단순하고 명쾌한 편이긴 하지만, 그 단순한 것들이 조립되는 과정 속에 숨겨진 함의의 깊이는 어마어마합니다.

 

재소자입니다. 동시에 배우죠. 재소자의 역할로 캐스팅된 배우가 아니라, 배우의 역할로 캐스팅된 실제 재소자입니다. 이들은 첫 오디션에부터 두 극단적인 상황을 오가며 자신에게 내재된 순수한 슬픔과 분노를 표현합니다. 각각의 인물들은 자연인으로서 본인을 자신의 입으로 소개합니다. 범죄자로서의 자신은 타인이 쓴 자막으로 소개됩니다. 감독은 이들에게 가명을 사용해도 좋다 말하지만 모든 이들은 기꺼이 실명을 사용하겠노라 말하죠.

 

 

 

 

 

 

# 2.

 

고귀하고 형이상학적인 예술과 저열하고 비루한 범죄가 선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동시에 개인의 내면 안에서 다각적으로 융화됩니다. 고작 서너 문장으로도 축약될 간결한 오디션 장면 안에,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의의와 회피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철학적 번민을 담아냅니다.

 

모두는 이기적인 이유로 범죄를 저질러온 비루한 인생들입니다. 시저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은 대의와 명분을 위해 행동한 것으로 수천 년을 살아남은 위대한 인생들이죠. 현실 속 인물들은 저열한 어휘를 담은 곤궁한 어투를 쓸 테지만, 시저들은 고상한 어휘를 품은 화려한 어투를 활용합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이 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연극의 격식과 우아함과 위엄을 어렵지 않게 내면화합니다. 영화 속에서 범죄자로서의 자신의 언어와 행동은 철저히 제한되지만 그럼에도 위화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시저'는 이들 안에 있습니다.

 

 

 

 

 

 

# 3.

 

두 명의 감독이 존재합니다.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타비아니' 형제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우스 시저』는 '파비오 카발리'가 연출하죠.

 

재소자들은, 배우들은, 아니 재소자들은. '파비오' 감독으로부터는 직관적인 연극배우로서 디렉팅 받게 됩니다만 '타비아니' 감독으로부터는 ⑴ 자기 배역을 연기하는 ⑵ 배우를 연기하는 ⑶ 재소자를 연기하는 ⑷ 배우로서 디렉팅 받게 됩니다. 각각이 의미하는 연기의 위계는 명확하지만 경계는 희미합니다. 등장인물들은 다른 층위의 정체성에서의 다른 시각을 프레임 단위 이하에서 오가며 예술에 몰두하고 탐닉하는 동안 자기 정체성이 확장되는 감각을 몸으로 경험합니다.

 

재소자를 무대 위가 아닌 교도소 안에서 연습하는 모습을 담아냄으로써 선명하던 인물과 배역의 경계는 장렬히 무너집니다. 연기를 연습하다 말고 '지오반니 아르쿠리'가 '시저'가 아닌 자연인으로서의 자신의 서운함을 자신도 모르게 '시저'의 화법으로 표현하는 순간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서사적 쾌감이 전달됩니다. 실체와 허구의 경계는 예술이 열어젖히는 다각적 정체성 앞에 힘없이 허물어져 내립니다. 단절된 공간과 시간의 고압감과 일련의 통제된 사회적 실험실 안에서 순수하게 발화하는 화학적 반응들은 다른 작품들과는 명확히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합니다.

 

 

 

 

 

 

 

 

# 4.

 

자신의 연기로부터 현실의 괴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재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체념하던 무언가를 무수히 발견합니다. 정체성에 몰입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관객은 어마어마한 카리스마를 느끼게 됩니다. 예술은, 고귀한 삶은 선택받은 누군가들의 전유물이 아녔다는 것은 희망적이지만, 자신 안에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을 감옥 밖의 누군가가 제시한 기회에 의해서만 발현할 수 있다는 절망감은 그보다 더욱 큽니다.

 

영화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흑백의 화면처럼 영화와 인물들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과 눈을 뜨기조차 버거운 빛을 동시에 오갑니다. 자유와 감옥, 살인과 예술을 동시에 말하는 죄수들의 아이러니는 영화가 형이상학적 메시지를 다루는 이상적 방법 중 하나라 할 법합니다.

 

 

 

 

 

 

# 5.

 

무대 위에서 세상이 색을 얻는 연출은 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어 보입니다. 예술이 만개하는 순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에 눈이 뜨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테고요. 기능적인 면에서 플래시백이 해제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죠. 감옥에서의 연기가 본질이고 되려 무대 위에서의 연기가 허구적이라는 것에 대한 역설적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연극 무대 위를 수놓은 형형색색의 색감이 아닙니다. 연극이 끝나고 난 후 독방으로 돌아온 '카시우스' 아니, 범죄자 '코시모 레가'의 공간이 여전히 화려한 색으로 물들어 있다는 것이죠. '코시모 레가'는 말합니다.

 

 

예술을 알고 나니,

이 작은 방이 감옥이 되었군.

 

 

'예술'은 연기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았다'는 것은 알았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방'은 갇힌 좁은 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옥'은 자물쇠에 채워진 물리적 감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코시모 레가'의 말이 아닙니다. '타비아니' 감독의 말도 아닙니다. '말'은 말이 아닙니다. 관객이 보고 있는 것은 영화가 아닙니다. 이 대사는 완벽히 직설적이지만 동시에 완벽히 역설적입니다. 죽일 수 없는 '시저'는 죽어야 합니다. 너무 괴롭기 때문이죠.

 

 

 

 

 

 

# 6.

 

명문화할 수 없는 예술의 의미, 장르화 할 수 없는 삶의 의미를 둘러싼 것들의 중첩을 통해 풀어냅니다. 무수히 많은 형식논리적 대척점에 놓인 '흑'과 '백'을 모조리 수집해 날카로운 메시지라는 칼로 얇게 저며, 그렇게 탄생한 레이어들을 겹치고 또 겹친 후 낡은 영사기로 빛을 쏘아 만든 그림자 같은 영화입니다. '비토리오 타비아니', '파올로 타비아니' 형제 감독, 『시저는 죽어야 한다』였습니다.

 

# +7. 새삼, 연극 보고 싶네요. :)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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