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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캔디드 캔디드 샷 _ 캔디드 샷, 강민지 감독

그냥_ 2020. 3. 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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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강렬한 영화입니다. 과감한 영화입니다. 비단 사진뿐 아니라 사회적인 무언가를 관찰하고 다루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필연적으로 거쳐갈 수밖에 없을, 자신과 창작물의 존재 가치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일말의 은유 없이 직설적인 방법으로 다룹니다. 곧게 뻗어나가는 활시위처럼 감독은 과감하고 솔직하고 단호하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작품을 만드는가.

당신은 무엇 때문에 작품을 보는가.

 

 

 

 

 

 

 

 

'강민지' 감독,

『캔디드 샷 :: Candid Shot』입니다.

 

 

 

 

 

# 1.

 

캔디드 샷 [Candid Shot]

피사被寫의 인물이 포즈pose를 취하지 않거나 본인이 사진을 찍힌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촬영한 사진.

 

# 2.

 

이 영화는 사진작가가 피사체를 찍는 캔디드 샷이자, 캔디드 샷을 찍는 사진작가에 대한 캔디드 샷입니다. 작가는 노숙자를 달리는 지하철 앞에 세운 후 주머니에 돈을 찔러 넣고, 강민지 감독은 그런 사진작가를 자신의 시나리오에 복무시킨 후 그의 주머니에 돈을 찔러 넣죠. 관음적으로 피사체의 사진을 찍는 작가를 다시 관음적으로 찍는, 비판적이면서도 자기고백적인 영화입니다.

 

창작자라면 이 작품이 본능적으로 불편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 그대로 대부분의 창작은 기본적으로 모티브가 되는 대상에 대한 관찰에서부터 출발하고, 그 행위의 대부분은 자신의 목적에 도구적으로 복무하도록 하는 관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이죠. 성공한 작가나 감독, 배우 등이 카페나 거리에 죽치고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는 데 온 종일 보낸다는 건 이젠 너무도 흔한 에피소드입니다.

 

# 3.

 

창작자들도 사실 은연중에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에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뿐 '무언가 부끄러운 짓을 하는 것 마냥 찝찝한' 지점이 있다는 걸 말이죠. 일방향적이고 어떤 면에선 '폭력적'이기까지 한 관찰 행위와, 그런 관찰을 재료로 한 창작과 소비가 가지는 본질적 한계와, 그 한계에 대해 애써 고개 돌리게 만드는 비루함은 가린다고 쉽게 가려지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음된 창작 행위를 정당화하는 '명분'과, 실존하는 피사체에게 일방적으로 전가되는 '비용'의 간극 사이에서 창작자는 늘 고민하게 됩니다. 아니, 고민해야 합니다.

 

관음에 대한 책임이라는 것은 노숙자의 주머니에 꽂아 넣는 푼돈 몇 푼으로 대체되어선 안 되는 거겠죠. 나는 때리지 않았다 말하는 비겁함으로 대체되어서도 안 될 겁니다. 이 작품은 자신이 관찰하고 창작하고 또 소비하는 피사체에 대한 존중과 책임인 동시에, 자신도 언제고 누군가로부터 일방적으로 관찰되고 비판될 수 있음에 대한 엄중한 경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 4.

 

여기서 한 발짝 더 확장해 보자면, 관객 역시 이 문제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라는 생각도 듭니다. 관객 역시 대부분 지극히 오락적인 목적으로 대상을 소비하는 콘텐츠 산업 주체로서 그런 폭력적 관음이란 형태의 수요를 유발한데 대한 책임이 있으니까요. '내가 찍은 거 아님', '내 책임 아님', '이 작품을 보고 있는 내가 누군지는 어차피 아무도 모름'이라는 식의 태도는 무책임합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곤궁한 사람들의 가장 곤궁한 순간을 관람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은 관객 역시 가끔은 되물어야 합니다.

 

사진을 찍은 후 '아쉽다' 느끼는 작가. 그 '아쉬움'의 정체가 무엇인가 영화는 진지하게 묻고 있습니다. 지하철을 뛰어내리려는 사람과 우는 눈으로 웃고 있는 학생 앞의 카메라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진지하게 되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대단히 냉정하고 비판적인 조소가 영화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학생 작품이기에 가질 수 있는 역동적인 도발이죠. 제대로 하고 싶은 사람. 영화를 찍는 일을 제대로 하고 싶은 사람이 첫걸음부터 땅을 단단하게 다지고 가는 느낌이 인상적입니다.

 

 

 

 

 

 

# 5.

 

다만 영화를 지배하는 일관된 톤이 있었더라면 좋았겠다 싶은 생각은 듭니다. 영화가 그 자체로서 '작품을 들여다보는 작품'이자, '캔디드 샷을 찍는 사람의 캔디드 샷'이라면, 작품 속 사진작가에 투사된 관념을 비웃는다는 의미에서라도 화면 연출에 공을 더 들였다면 주제의식이 확 살았을 텐데요. 사진작가의 작품들처럼 흑백이나 저채도의 균일한 화면 톤을 가져가기만 했어도 마치 영화 스스로가 사진작가의 작품들 중 하나처럼 말려들어가게끔 보이지 않았을까 라는 거죠.

 

학교 폭력의 피해자와 지하철을 뛰어내리려는 노숙자가 교차되며 병렬적으로 함께 읽혀야 하는 데, 두 사람의 공간이 너무 이질적인 것도 옥에 티라 할 수 있겠네요. 작가의 사진전시실과 노숙자의 터널과 밤의 지하철 역에 비해 하굣길의 싱그러운 녹음은 너무 따로 논다는 인상입니다. 두 피사체가 서로 교차되며 인물로서의 경계가 허물어져 주제 의식이 드러나야 할 지점에서 배경의 나뭇잎이 어그로를 너무 많이 먹는달까요. 조금 더 처연하고 삭막한 늦은 저녁의 하굣길이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어차피 딴죽을 건 김에 사족을 하나만 더 달자면, 학폭 피해자인 친구의 캐릭터가 다른 두 배역에 비해 헐겁다는 인상도 있습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학폭 피해자의 멘탈리티라기엔 말과 행동과 표정의 설득력이 그리 높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뭘 쳐다보느냐 말하는 장면은 직접 말하는 대신 표정 연기로 대체되어 있는 게 정황상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요? 하루 종일 시달린 얼굴에 멍이 든 학생의 하굣길 모습이 너무 단정해 보이는 건 아닐까요? 극한에 몰려 있는 상처 받은 학생의 반응이라기엔 겉으로 드러나는 자기주장이 너무 주도적으로 보이는 건 아닐까요?

 

# 6.

 

좀 야박했나요? 하지만 그럼에도 기술적인 측면 때문에 퇴색될 만한 주제의식이라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위에 열거한 기술적인 부분들이야 애초에 제 생각이 맞다는 보장도 전혀 없거니와, 맞다한들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쌓이다 보면 얼마든지 해결될 사소한 문제들일 뿐이니까요. 이런 고민을 하고 이런 작품을 찍는 감독의 다음 영화라면 까짓거 얼마든지 지갑을 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런 영화입니다. 모처럼만에 보석 같은 단편이군요. '강민지' 감독, 『캔디드 샷』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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