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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Horror

엔진 없는 자동차 _ 허쉬, 마이크 플래너건 감독

그냥_ 2019. 8. 8.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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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덜떨어진 살인마가 힘케 여주에게 잘못 걸려 개털리는 영화입니다.

 

 

 

 

 

 

 

 

'마이크 플래너건' 감독,

『허쉬 :: HUSH』입니다.

 

 

 

 

 

# 1.

 

살인마의 패널티는 무엇인가

 

살인마와 사냥감의 대결입니다. 무시무시한 살인마가 주인공을 위협하는 동안의 공포와, 극적으로 탈출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즐기는 장르물이죠. 당연히 살인마와 사냥감의 파워 밸런스는 무너져 있기 마련인데요. 시나리오의 완성도는 런타임을 벌기 위한 '살인마의 패널티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할 수 있습니다. 상황을 풀어내기 위해 한껏 위험한 인물로 만든 살인마에게 다시 족쇄를 채우는 거죠.

 

살인마는 한 명인데 주인공 파티는 너무 많아 똘똘 뭉쳐 있으면 나타나기 어렵다거나, 살인을 일삼음에도 사회적으로는 건실한 사람인 척하고 있기에 정체를 발각되기 싫어한다거나, 살인을 하는 과정이나 방식에서 수행해야 하는 조건이나 제약이 있다거나, 주인공 파티가 살인마의 위협으로부터 확실히 도피할 수 있는 세이프티 존이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리고 이런 살인마의 허점 혹은 약점의 퍼즐들을 주인공 무리가 인지하고 돌파하는 과정에서 지적 유희를 유발하는 스릴러로서의 장르적 재미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 영화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여성 소설 작가 '매디'와, 그녀를 사냥하는 살인마의 영화입니다. 언제나의 망작들처럼 이 영화 역시 소재는 흥미롭습니다만, 위 질문을 기준에서 보자면 낙제점을 주지 않을 도리가 없군요.

 

 

 

 

 

 

# 2.

 

살인마는 사람을 죽이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시작부터 곽경택 감독의 <친구>에서 '동수'가 암살 당하던 장면이 연상될 법한 살인 장면이 섬뜩하게 묘사됩니다. 총기가 아니라 석궁으로 사람들을 해치는 걸 보니 피해자들을 사람이 아닌 사냥감으로, 살인 역시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아니라 놀이의 일종으로 인지하는 듯하군요. 석궁에 새겨진 탤리 마크들을 보건대 사람을 많이도 죽였네요. 좋습니다. 이 사이코패스는 능숙한 베테랑입니다.

 

주인공 '매디'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적 없는 숲 한복판에 마련한 저택에 기거하고 있습니다. 작가라는 직업은 이 인물이 다른 사람과 제한적인 교류를 가지면서 고립된 삶을 살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혼자 사는 여자인 데다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해 시각과 진동에 의지해야 하는 청각장애인이군요.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지키기엔 너무도 위태로워 보인다는 걸 화재경보기와 고양이 등을 동원해 제법 효과적으로 설명합니다. 피식자와 포식자의 관계가 극단적으로 동시에 설득력 있게 설정되어 있죠. 여기까진 좋아요, 인물은 세팅됐습니다.

 

 

 

 

 

 

# 3.

 

이 영화의 문제는 살인마의 페널티가 없다는 점입니다.

 

유능한 작가를 주인공으로 부리는 감독 본인이 정작 유능한 작가가 되지 못했다는 게 아이러니합니다. 살인마의 패턴에 아무런 설득력이 없습니다. 설정만 덩그러니 존재할 뿐 상황에 대한 어떠한 포지션도 부여받지 못합니다. 이 문제는 비단 살인마를 바보로 보이게 만드는 것뿐 아니라 '매디'에게 감정이입 하기도 힘들게 만들죠. 살인마의 페널티가 명쾌하지 않으니 파훼법도 설 수가 없고, 그러다 보니 "안 돼!", "거기선 이렇게 해야지!", "저길 못 가게 해!"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할 여지 자체가 없습니다.

 

감독이 기껏 내놓은 페널티라 해봐야 문 걸어 잠그면 집 안으로 들어가기 힘들다 정도인데 이 페널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설득이 전무합니다. 왜 못 들어가는지 혹은 왜 안 들어가는지, 안 들어가는 거라면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어떤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따위가 전무합니다.

 

# 4.

 

더군다나 집을 나무나 벽돌로 꽁꽁 싸매 놓으면 소리를 못 듣는 '매디'의 운신의 폭이 너무 좁아진다 생각했는지 유리로 집을 둘둘 감아뒀는데요. 그러다 보니 저 엉성한 유리 집을 못 들어가고 앉아있는 살인마가 머저리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요즘 나오는 유리가 단단하다 해도 그래도 유리는 유리잖아요? 냅다 석궁을 쏴대거나 아싸리 짱돌만 집어던져도 버틸 수가 없는 건 당연합니다. 혹시나 싶어 '이 영화의 세계관이 유리는 절대 안 깨지는 건가?'라는 미친 생각도 잠시 해봤지만 영화 말미에 살인마가 유리를 깨고 건물로 들어가죠.

 

심지어 살인마는 이미 건물 안에 한번 들어갔다 나왔어요. 굳이 사람을 죽인 후 건물 안에 쫄래쫄래 들어가서 온 집안 구경까지 싹 하고, 룰루랄라 셀카 찍힌 문자도 보내고, 휴대폰만 살짝쿵 훔쳐 나온 다음 문을 걸어 잠글 시간을 넉넉히 준 후, 다시 들어가 보겠다고 까불다가 팔뚝에 칼빵을 맞죠. 이 머저리가 왜 이런 사서 고생을 하는지에 대해선 누차 말씀드린 대로 전혀 아무런 개연성이 없습니다. '매디'의 휴대폰이 굳이 들어가서 훔쳐 나오고 싶을 만큼 최신형이기라도 했던 걸까요?

 

 

 

 

 

 

# 5.

 

여기까지 들으시면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겠죠

"야 이 멍청아! 살인마가 미친 사이코패스라 사냥감을 가지고 놀려는 거잖아!

스스로 가면까지 벗고 얼굴 보여주는 거 보면 몰라?"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만약 살인마가 장난을 치고 싶었다면 주인공을 공격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죽이면 못 가지고 놀 테니까요. 살인마는 '매디'가 살아보겠다고 집 밖으로 탈출할 때마다 까딱 잘 못 맞으면 한방컷 나는 석궁을 갈기는 대신, 곱게 제압해 산채로 집안에 다시 던져 넣었어야 합니다. 더 발버둥 쳐 보라고 더 발악해보라고 비웃으며 말이죠. 까딱해서 석궁 맞아 죽기라도 하면 굳이 집안까지 들어가서 휴대폰만 곱게 들고 나온 것도, 굳이 전기를 내린 것도, 굳이 타이어 펑크 낸 것도, 굳이 자기 얼굴 까 보여준 것도, 굳이 이미 죽은 '사라'의 시체를 들고 와 노크를 하는 것도 몽땅 뻘짓이 되어버리는 건 너무도 당연합니다.

 

더군다나 집안으로 '매디'가 도망가는 순간 자신도 집으로 들어가려고 아등바등거려선 안됩니다. 팔 억지로 밀어 넣다 다치는 바보짓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게 목적이라 일부러 살려두는 거고, 가둬 두는 게 목적이라 일부러 유리 집을 안 들어가는 거라면, '매디'가 무사히 집안으로 호다닥 도망가는 순간 살인마는 평정심을 되찾았어야 됩니다.

 

# 6.

 

감독은 살인마에게 '매디'를 꼭 죽여야 하는 이유를 부여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집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이유 역시 있었어야 합니다. 마냥 밖에서 죽치고 있을 수 없는 이유도 있었어야 하고, 동시에 살인마는 모르지만 '매디' 역시 마냥 존버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집 밖으로 고개 하나 빼꼼 내밀 때마다 도끼눈이 되어 쫓아오는 살인마가 이해가 될 것 아닌가요. 그래야 제한 시간 안에 어떻게 집을 탈출할지를 '매디'와 함께 고민할 것 아닌가요.

 

만약 그게 아니라면 살인마는 명확히 '매디'보다 높은 곳에서 사냥감을 내려다보고 있었어야 합니다. '매디'의 발악을 비웃으며 그녀의 발버둥이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여있다는 걸 '과시'했어야 합니다. 석궁을 갈기는 대신 곱게 들어다 머리도 한번 쓰다듬어주고, 집안에 고이 던져놨어야 합니다. 석궁을 빼앗기는 순간 별 거 아니라는 듯 유리문을 따고 들어가 유유히 석궁을 집어 들고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무섭죠. 아. 이 인간이 주인공을 그리고 그 주인공에 감정 이입한 나를 가지고 노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야 무섭죠. 동시에 정말 위기 상황이 아니면 살인마는 당장 주인공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페널티와, 상대는 과시적인 인물이며 방심하고 있다는 힌트를 풀어나갈 여지가 생길 것 아닌가요.

 

관객은 영화 시작과 동시에 결말을 알고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런 류는 '살인마가 적당히 방심하는 동안 주인공에게 역관광을 당하되 얼마나 덜 멍청해 보이는 참신한 이유로 역관광을 당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주는지'가 승부처인 영화죠. 호소력 있는 살인마의 페널티는 살인마가 멍청해 보이지 않도록 하는 연료이자, 긴장감의 정도를 제어하는 악셀레이터입니다만, 이 영화엔 이 장치 자체가 없습니다. 연료와 엔진이 없는 자동차에 올라탄 감독이 승부처에서 철저히 패배하는 건 기정사실인 셈이죠.

 

 

 

 

 

 

# 7.

 

2/3 지점 즈음 나이브해진 텐션을 억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주인공 대신 죽어나갈 용도로 죽은 '사라'의 남자 친구가 동원됩니다. 너무 뻔한 전개이긴 하지만 뭐 그러려니 합시다. '사라' 남친이 온갖 정보를 NPC마냥 읊어주는 대가로 살인마의 정체는 눈치챈 것 같네요. 뚝배기 까기 위해서 짱돌 하나를 등 뒤에 숨기는 찰나, 우리의 지능캐 여주가 훼방을 놓습니다. 결말에서 살인마를 제압하는 과정도 몸싸움으로 잡아내죠. 작가라면서요. 그녀는 힘법사였던 걸까요?

 

영화에서 제시한 주인공은 명백히 지능캐입니다만 '매디'가 자신의 지능을 발휘할 여지 자체가 없다 보니 이 인물 역시 바보가 됩니다. 주인공이 하는 행동이라곤 한쪽 창문 열고 냅다 물건 던지고 그사이 도망간다는 게 전부입니다. 작가 뇌가 어쨌다구요? 환청이 들리는 게 어쨌다구요?

 

그 외에도 소리를 못 들어서 생기는 공포를 다루는 영화임에도 화면은 무진장 어둡게 만들어 둔다던지, 주인공은 공포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 웬걸 화를 내고 있다던지, 살인마는 양아치처럼만 보인다던지 하는 문제가 산더미처럼 남아 있습니다만, 그런 사소한 문제들은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감독들에게 자신이 만지는 장르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과 존중을 요구하는 게 그렇게나 힘든 걸까요. '마이크 플래너건' 감독, <허쉬>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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