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관객 친화적이지 않습니다. 장르 친화적이지도 않습니다. 주제에 친화적이지도, 공급자 친화적이지도, 심지어 돈줄인 제작자들에 친화적이지도 않습니다. 영화는 엽기적일 정도로 감독에게만 친화적입니다. 모든 캐릭터는 감독의 게으름에 복종합니다. 모든 장치들은 감독의 편의에 복무합니다. 모든 서사는 무책임하게 방치됩니다. 이따위 시나리오로 투자를 받고 돈을 벌 수 있다는 건 자본주의의 신이 감독에게 내린 최고의 축복이자 관객에게 내린 최악의 형벌입니다.
관객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습니다. 장르적 재미란 무엇이며, 그걸 어떻게 전달할까라는 고민 역시 전무하죠. 감독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다'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영화를 못 만드는 정도를 평가할 수 있다면 이 영화의 성취는 기념비적이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피터 설리반' 감독,
『시크릿 옵세션 :: Secret Obsession』입니다.
# 1.
폭우가 내립니다. 공중전화에 여자가 보입니다. 전화를 거는 데 안 받습니다. 어떤 차량이 그녀의 뒤를 쫓습니다. 여자는 멍청하게도 트인 공간에서 막다른 화장실로 도망갑니다. 후드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여자를 쫓습니다. 여고괴담식 화장실 앞칸부터 차근차근 열기를 시전 합니다. 망아지도 아니고 마지막 칸만 굳이 뒷발로 여는 바람에 여자는 축지법을 쓰고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화장실에서 도망 나온 여자는 웬 차량의 문을 열려고 합니다.
'이 차는 또 뭐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야? 뭐야, 열쇠가 꽂혀있네? 그럼 지가 타고 온 건가? 아니 차를 타고 왔으면 그냥 달리지 공중전화에 전화질은 왜 한 거지? 아니 그전에 화장실엔 왜 숨었던 거지? 추격자가 있으면 바로 차에 올라타는 게 상식 아냐?'
# 2.
라는 생각이 순식간에 스치지만 그래요. 일단 넘어갑시다. 차량에 올라탄 여자는 운전을 하려고 하는데요. 후드 쓴 망아지가 화장실에서 볼일이라도 봤는지 느긋하게 헤드라이트 앞에 등장합니다. 갑자기 사라지더니 뒤차에 타서 캐이블을 당깁니다. 그러니까 이 살인마는, 운전석 유리까지 깨져있는 여자의 차량 옆을 지나서 뚜벅뚜벅 뒤에 있는 자기 차로 돌아간 다음 룰루랄라 케이블을 당겼다는 거죠? 케이블은 또 언제 설치한 거야? 아니 그전에 이 짓을 왜 하고 있는 거지? 얜 목적이 뭐야? 미친놈인가?
여자는 다시 차를 버리고 달아납니다. 앞만 보고 달려도 시원찮을 상황에서 굳이 두리번거리던 여자는 고라니처럼 뺑소니를 당하는데요. 그 순간 직전까지 느긋하기 그지없던 후드 쓴 망아지는 자기 차량의 앞에(!) 다른 차량을 매단 채로 감쪽같이 사라지는 데 성공합니다. 후진을 존나 잘하나 봐요.
... 여기까지가 오프닝입니다. 영화를 모조리 설명해주는 훌륭한 오프닝이죠. 설마 이건 아니겠지? 싶을 때마다 그 설마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최소한의 만듦새를 위해 이야기를 다듬은 느낌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오프닝은 엔딩과 더불어 감독이 가장 공 들여 만드는 장면 중 하나일 텐데요.
# 3.
30분이면 관객은 '러셀'이 가짜 남편이며 강박증적인 살인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살인마의 정체를 까발려놓고 시작하는 스릴러. 충분히 있을 수 있죠. 문제는 그 시점에서 영화 속 모~든 등장인물들도 러셀의 정체를 알아차린다는 거지만요.
런타임이 1시간이 넘게 남아 있는 시점에서 '제니퍼'는 남편이 가짜라는 물증을 확보합니다. 느낌이 찝찝하고 미심쩍다는 수준의 심증이 아니라 집에 도배된 부부 사진의 원본과 합성을 위해 크로마키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소스와 합성 본까지를 곱게 담아둔 노트북을 통해 모조리 확인합니다. 또 다른 주요 인물인 '페이지' 형사 역시 러셀이 간단한 신원조회도 벗어나지 못하는 허접한 사기꾼이라는 것과,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조리 거짓말이라는 것과, 멀쩡이 살아있다 말한 '제니퍼'의 양친이 이미 오래전 고인이 되었다는 걸 자기 눈으로 확인하죠. 심지어는 하다 하다 병원 경리과 간호사조차 이 새끼가 뭔가 심상치 않다는 눈치를 깝니다. 아니 감독님아, 이런 식으로 스릴러를 만들 수 있을 거라 기대한 건가요?!
# 4.
'데이빗 핀처'의 <나를 찾아줘>를 예로 들어 보죠. 관객은 남편 '닉'과 함께 아내 '에이미'가 강박적인 미치광이 사이코라는 걸 얼마 되지 않아 알지만, 관객과 남편을 제외한 영화 속의 모든 사람들 특히 대중들은 아내의 실체를 전혀 모릅니다. 이 간극. 이 간극에서 영화적 스릴이 발생합니다. '에이미'가 몇몇 인물들과 떨어져 잇는 공간에서의 파괴적이고 비상식적인 태도들이 주는 긴장감과, 일반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언론을 접할 때의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연기가 주는 괴기함이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서로 핑퐁처럼 튀며 중첩되며 스릴러가 폭발하는 거죠.
반면, 이 영화는 너두 나두 야 나두 손에 손잡고 살인마를 알고 의심하고 추적합니다.
대체 어디서 스릴을 느끼라는 건가요.
# 5.
전혀 복잡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상상해보자고요. '제니퍼'와 관객은 '러셀'의 정체를 아는 데 '페이지' 형사만 모른다면, 우리는 '페이지' 형사의 일상적인 모습 순간순간에서 조바심을 낼 겁니다. 반면 '페이지' 형사와 관객은 '러셀'의 정체를 아는 데 '제니퍼'만 모를 수도 있겠죠. 끔찍한 살인을 수차례 저지른 러셀을 철석같이 남편인 줄 알고 웃어 보이는 '제너퍼'를 보며 관객은 불안감을 느낄 겁니다. 혹은 '제니퍼'와 '페이지' 형사 모두 '러셀'의 정체를 알지만 관객은 확신이 없을 수도 있겠죠. "응? 왜 저렇게 러셀을 몰아붙이지? 러셀이 살인마가 아니고 진짜 남편이면 어쩌려고 저러는 거야?"
하지만 영화는 여고 바바리맨처럼 보잘것없는 모든 정보를 시작부터 만천하에 공개합니다. 영화가 추구해야 할 최소한의 긴장감은 채 무르익기도 전에 모조리 휘발하게 됩니다. 그럼 감독은 왜 영화를 이렇게 만든 걸까요?
정답!
귀찮으니까!
인물 간 정보 층위가 생기면 감독은 차등적 정보에 따라 대사와 행동을 다각적으로 설계해야 합니다. 딱 들어도 복잡하죠. 어렵고 또 귀찮구요. 그러니까 그냥 관객을 포함한 모든 인물들을 런타임 내내 동일한 정보를 공유하는 상태로 내던져버리는 거죠. 그럼 감독도 그 똑같이 공개된 정보만 생각해 적당히 시나리오를 휘갈기면 되니까요. 쉬우니까요.
# 6.
감독의 게으름이 잘 드러나는 장치를 또 하나 들어볼까요.
뚝배기입니다.
이 영화는 미국 영화입니다. 배경도 당연히 미국이죠. 미국은 총을 마트에서 파는 나라입니다. 지천에 널린 게 총이란 거죠. 세계관에 총이 없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모든 살인이 충동적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죠. 심지어 살인마 '러셀'은 총에 맞아 리타이어 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칼'과 '몽둥이'가 많이 등장하는 걸까요. 살인마 '러셀'은 특별한 살인기를 훈련받은 요원이 아닙니다. 평범한 직장인 스토커죠. 총을 갈기면 살인을 하는 과정에서 소음이 발생하니까? 글쎄요. '러셀'의 말에 따르면 제니퍼의 신혼집은 인근 1.6km에 사람이라곤 없는 곳에 있다는데요. 심지어 '제니퍼'의 부부에게 범죄를 저지르는 날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밤이었죠. 이 정도면 신혼집에다 박격포를 갈겨도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감독이 둔기로 뚝배기를 후려갈기고 굳이 칼을 들고 다니게 하는 이유는 '서사적 치트키'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인물들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각자 독립적으로 활동하면 시간대에 따른 서사를 짜기 힘들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기절시켜버리는 겁니다. 한 명 뚝배기 갈겨서 기절, 약 먹여서 기절, 심심하면 기억상실로 퉁쳐버리면 적어도 그 기절하고 있는 시간 동안은, 혹은 기억을 잃은 시간 동안은 가짜 남편 '러셀'의 움직임만 신경 쓰면 되거든요. 복잡하게 꼬인다 싶은 부분들은 죄다 "XX가 기절한 사이에 남편이 XX을 했다"라는 간단한 문장으로 때워내면 편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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