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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Comedy

걸작보다 뛰어난 범작 _ 스트레인저 댄 픽션, 마크 포스터 감독

그냥_ 2019. 2. 6.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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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앞날을 알고 싶으신가요?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일을 겪으며 어떤 사람과 사랑을 하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지 궁금하신가요? 자신의 삶이 어떻게 굴러가게 될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직 찾아오지 않은 내일을 미리 알 수 있다면 모르긴 몰라도 사는 게 훨씬 안전하게 느껴지겠죠. 물론 혹시나 엉망진창이면 어쩌나 하고 살짝 불안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단 역시 아는 게 낫다 싶기도 합니다.

 

더구나 그렇게 쓰여질 자신의 앞날이 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의 완벽한 걸작이라면 어떨까요. 기승전결이 완벽한 서사와 훌륭한 내러티브로 짜여진 소설과도 같은 삶. 사람들이 두고두고 회자할 만큼 멋들어진 그런 삶을 살아낸 인간이라니. 더할 나위가 없을 것만 같네요.

 

네? 근데 그 걸작이 비극이라구요? 뭐요? 그래서 죽는다구요? 갑자기? 그것도 오늘?!?!

 

 

 

 

 

 

 

 

마크 포스터 감독,

『스트레인저 댄 픽션 :: Stranger Than Fiction』 입니다.

 

 

 

 

 

# 1.

 

소설 속 주인공이 되어버린 남자, '해롤드 크릭'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화장실에서 정해진 횟수의 칫솔질을 하고 정해진 경로를 정해진 걸음수로 걸어가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대로의 일을 하는. 대단히 단조롭고 반복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그런 루틴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소심한 인물입니다. 미납된 세금을 칼 같은 솜씨로 계산해 추징하는 국세청 직원 크릭. 어느 날 갑자기 정체모를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정확히 짚어 묘사하는 목소리에 혼란스러워하던 중 갑자기 이 여자가 곧 크릭이 죽을 거라 말하네요.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다'라느니, '하루하루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라'라느니 하는 자기 개발서 속 분량 채우기 용 챕터로나 나올법한 상투적인 메시지가 크릭에겐 현실이 된 셈입니다.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죠. 자신의 삶이 머잖아 끝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크릭은 혹시나 이 저주스러운 운명을 피할 수 있을까 싶어 온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숨어보지만 가혹한 운명의 신은 포크레인을 몰고와 일탈에 철퇴를 날립니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직감한 그는 기존의 따분한 일상을 벗어나 정반대의 자유로운 영혼인 여자에게 첫눈에 반해 고백도 해보고 팔자에도 없던 기타도 어설프나마 배워 봅니다. 동시에 살아남기 위해 목소리의 여자를 찾아 나서게 되고 결국 목소리의 주인공인 한 소설가를 만나게 되죠.

 

뜻하지 않게 누군가의 신이 되어버린 여자, 소설가 '카렌 아이플'입니다. 글을 쓰는 족족 주인공을 죽이기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소설 작가죠. 이번에 새로 들어가게 된 '해럴드 크릭'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작품 역시 그럴 생각입니다. 그녀는 크릭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적어도 그에게만큼은 전지전능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완벽한 작품을 이끌어 내는 게 쉬운 작업은 아니네요. 비 오는 날 멍청히 다리를 바라보기도 하고 빈 책상에 무기력하게 누워 보다 아름다운 크릭의 최후를 끊임없이 골몰합니다. 바짝 마른 가녀린 손끝에서 줄담배는 끊이지 않죠. 소설가의 공간이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인 정형적인 구조의 집인 건 그녀가 크릭에게 초월자와 같은 존재라는 걸 은유합니다. 『브루스 올마이티』에서 모건 프리먼의 옷과 공간을 떠올리시면 유사한 느낌을 받으실 것 같네요.

 

별생각 없이 캐릭터를 죽여오던 그녀는 결국 자신이 창작한 존재가 현실에 존재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것도 하필 완벽한 최후를 상상해낸 직후에 말이죠. 그녀는 고민합니다. 자신의 선택이 누군가의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도저히 이해할 순 없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현실 앞에 그녀 역시 나약한 인간일 뿐이니까요. 그녀는 과연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요.

 

 

 

 

 

 

# 2.

 

소설의 매력을 영화에 이식한 작품입니다. 보고 나면 잘 쓰여진 소설 한 편 읽고 싶어 지는 아이러니 한 영화죠. 감독은 이 소설책과 같은 영화를 통해 삶이라는 무거운 아이템에 대한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접근을 유쾌하게 풀어 나갑니다.

 

모두의 삶은 한 편의 이야기와 같습니다. 태어나서 어찌어찌 살아가다 죽는다는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죠. 그 '어찌어찌'를 어떤 가치와 어떤 사람들과 어떤 감정들로 채워나갈지를 고민하고 선택하며 유희하는 과정을 담은 한 편의 소설이라 할 수 있겠네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급적 위대하고 완벽한 걸작이길 바랍니다. 가급적 실패하지 않았으면 하고 가급적 실망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위기가 있더라도 극복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결과가 무엇이 되었든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엔딩과 함께하길 바랍니다. 그런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다른 말로 인생관, 혹은 가치관, 혹은 자존감이라 할 수 있겠네요.

 

영화를 보고 나면 자연스레 통념적으로 습관적으로 생각하던 삶의 가치에 대해 곱씹어보게 됩니다. 걸작으로서의 삶과 그 걸작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자신의 삶 사이의 갈등을 묘사합니다. 누구나 멋진 삶을 꿈꾸고 멋진 결말을 꿈꾸지만 그 멋짐도 '살아있음'이라는 존재적 가치를 극복하진 못합니다. 결국 삶이란 보다 완벽한 결말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그것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에 본질이 담겨 있음을 말하는 듯하죠. 아뇨, 심지어 완벽한 결말에 다가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살아있음'이라는 상태에 본질이 담겨 있다고 말하는 거라는 게 더 정확해 보입니다. 감독은 삶에 대한 이상주의와 결과물에 대한 강박적 집착에 조소를 보냅니다.

 

 

 

 

 

 

# 3.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이야기를 합니다. 크릭이 안나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나 기타를 연주하는 것은 아름답지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런 행동들은 뭔가 자주적인 듯 보이지만 사실 죽음을 눈 앞에 두고서 체념한 것에 가깝기도 하니까요. 그의 행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소설가 '카렌 아이플'을 찾아 나섰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마주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스스로 걸작의 완성을 위해 자신의 최후를 글로 옮길 것에 동의합니다. 만약 원안대로 소설이 쓰인다면 그는 죽게 되겠죠. 하지만 이 죽음은 전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입니다. 이전까지의 죽음이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선택 이후의 죽음은 그 스스로가 선택한 삶입니다.

 

앞서 소설가를 '신이 되어버린 사람'이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녀는 '운명'이라는 관념의 의인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만약 감독의 의도가 제 추측과 같다면 우린 조금 더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쥴스 힐버트 박사'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운명에 대적하는 한 인간에게 무심하지도 간절하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아낌없이 조언하는 존재. 서양의 기독교 철학에게 이야기하는 '신'은 오히려 '힐버트 박사'에 가까워 보이기도 하니까요.

 

힐버트 박사가 현실에 나타나 크릭을 돕는 신이라면 그는 동시에 감독의 오너캐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즉, 소설의 형식을 차용한 작품의 메시지는 박사의 입을 빌어 모두 투영된다 할 수 있겠네요. 실제 이야기는 이 박사의 입을 빌려하는 대사에 복무합니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대사 하나를 남겨 놓도록 하죠.

 

"당신 말이 맞아요. 내레이터가 당신을 죽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 모든 걸 잊고 그냥 당신 삶을 살아요. 앞으로 남은 날이 얼마건 해롤드, 그 시간 동안 모험을 할 수도 있고 뭘 발명하거나, '죄와 벌'을 다 읽을 수도 있어요. 해롤드, 당신이 원한다면 매일 팬케이크만 먹어도 돼요. 해롤드 잘 생각해 보면 삶을 어떻게 이끌어가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는 걸 깨닫게 될 거에요. 물론 팬케이크의 질도 중요하지만요."

 

 

 

 

 

 

# 4.

 

물론 결말은 예상할 수 있을 법한 '착한 영화'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법 유쾌한 아이디어에도 불구하고 양산형 교훈극처럼 마무리에 매가리가 없는 느낌이 드는 것 역시 사실이죠. 주제의식을 생각할 때 크릭이 자신의 삶을 '운명'으로부터 뺏어와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최선에 신(소설가)이 응답하는 과정이라는 점은 분명 아쉬운 대목입니다. 뭐랄까요. 신 중심의 서양 기독교 철학의 수동적인 한계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마치 '해롤드 크릭'과 같습니다. 걸작의 문턱에서 범작에 멈춰 서고 말았다는 점에서 말이죠. 하지만 범작으로서의 그런 유치한 '착한 결말'이 여운을 주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걸작으로 죽는 대신 범작으로 살아가게 된 '크릭'처럼 이 영화 역시 걸작이 되는 대신 그보다 더 뛰어난 범작이 되어 보려는 듯 하달까요.

 

책 읽기를 좋아하시는 분들. 섬세한 묘사와 담담한 서사를 즐기시는 분들. 선한 이야기로 삶을 위로받고 싶으신 분들. 짐 캐리의 트루먼 쇼를 재밌게 보셨던 분들께 이 영화를 권합니다. 다만 조금 더 유쾌한 이야기, 도발적인 상상력, 과감한 전개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실망하실 수도 있겠네요. 마크 포스터 감독, <스트레인저 댄 픽션>이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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