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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SF & Fantasy

빅 마이크를 기억하며 _ 그린 마일,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

그냥_ 2025. 6. 4.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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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비범한 야심과 직관적 구현 끝에 한 끗의 아쉬움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

『그린 마일 :: The Green Mile』입니다.

 

 

 

 

 

# 1.

 

사형수가 사형장을 향해 걸어가는 마지막 복도, 그린 마일이다. 라스트 마일로도 불리는 초록색 리놀륨 복도는 그 극단적 목적처럼 다양한 함의를 가진다. 마지막 걸음을 걸어가는 Dead Man은 이전의 삶을 훑어보며 회고하고 후회할 것이기에 인간 여정을 축약한 공간이라 이해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아닌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로 죄지은 사람들이 걷는다는 면에서 인간의 취약성과 죄의 무게를 구체화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움직임의 관점에서 양방향이 아닌 일방향으로만 작동하는 시설이라는 것도 생각해 봄직하다. 비가역적인 결정론적 동선을 일종의 확신이라 한다면, 그런 확신의 공간에서 죄수가 바뀔 때마다 앞뒤로 오가는 간수의 걸음은 영화적 계기로 인해 전에 의심해 본 적 없는 확신이 흔들리게 될 것임을 물리적으로 암시한다.

 

따라서 영화 그린 마일을 즐긴다는 것은 3시간에 달하는 뭉클한 드라마 아래로,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이질적 공간이 가진 입체성을 해체해 들여다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크게 4개의 테마가 순차적으로 결합된 형태다. 인종 차별, 종교 신화, 사형제 담론, 이 모두를 포괄하는 선과 악에 관한 보편 윤리다. 개봉한 지도 어느덧 25년, 사랑하는 마이클 클라크 덩컨이 작고한 지도 10년이 훌쩍 지난 영화이니만큼 구태여 당연한 것까지 상세할 필요는 없을 테니 개인적 감상을 얹어 가볍게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 2.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0년대 미국 남부. 사회적-경제적 불안이 만연한 인종 차별로 응집되던 시대적 배경은, 교도소라는 공간적 배경과 함께 핵심적인 설정이다. 잘못된 장소와 잘못된 시간뿐 아니라, '잘못된 외형'이 존 커피가 처형받게 된 강력한 근거가 된다는 것은 직관적으로도 충분히 불쾌하고, 영화는 그 잘못된 외형과 관련된 당대 미국이 가진 인종차별의 성격에 대해 최대한 친절하게 묘사한다. 이를테면 존 커피의 강인한 신체와 온순한 내면을 대비시킨다거나, 폭력적이면서 동시에 굴종적인 간수 퍼시 웨트모어로 말미암아 인종 차별의 멸시 속에 물리적 공포가 함께 숨어 있음을 지적하는 식이다.

 

그 유명한 조지 스티니 주니어(George Stinney Jr.)의 사형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영화는 인종차별의 가장 처참한 형태로 부조리한 사법 시스템을 차용하지만, 그럼에도 시스템에는 감정이 없고, 모든 시스템의 부조리는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인해 이루어진다는 면에서 개인적이다. 특별한 악역인 퍼시뿐 아니라 존 커피의 변호사 버트 해머스미스를 비롯한 평범한 사람들의 지나가는 언행에서까지 차별이 두텁게 묘사되는 이유다. 다만 아쉬운 것은 영화 스스로 존 커피를 쓰는 방식이다. 차별을 이야기하는 영화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스스로 차별적이지 않나 점검하는 것인데, 그 부분에서 비판의 여지를 남겼다는 것은 썩 치명적이다.

 

매지컬 니그로(Magical Negro)라는 말이 있다. 감독 겸 비평가 스파이크 리가 제창한 말로, 플롯 상 백인 주인공의 성장을 돕는 마법의 흑인을 뜻한다. 개별 캐릭터의 서사에 대한 주체적 고찰 없이 백인 중심 서사에서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으로서 도구화되는 흑인 캐릭터. 영화에서 존 커피에 대한 인종 차별을 설득한 것은 그의 진정성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유용함을 실증한 결과에 지나지 않고, 그 유용함이라는 것조차 존 커피를 스스로 구원하는 것이 아닌 폴 에지콤의 성찰의 재료가 된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일견 통렬하다. 평소 스파이크 리의 과격한 주장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린 마일에 대한 지적은 공감 가는 바가 있다. 존 커피에 대한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근거는 그의 선량함이나 유능함이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이어야 하고, 설령 존 커피가 유능하지 않고 비열한 인물이었다 하더라도 소녀를 죽이지 않았다면 사형당하지 않았어야 한다.

 

 

 

 

 

 

# 3.

 

좋든 싫든 그린 마일은 종교적 알레고리와 분리할 수 없다. 거참 공교롭게도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us)와 이니셜을 공유하는 존 커피(John Coffey)는 천사 같은 심성, 기적적인 능력, 반복적인 고난, 무고하게 처형당하는 운명 등을 생각할 때 아브라함계 종교의 구원자를 끌고 온 것이라 추측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자연스럽게 그의 죽음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순수선으로 이해된다. 감옥이라는 공간은 예수가 대신 짊어진 원죄와 고난을,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그린 마일은 숭고한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고 말이다. 반면 퍼시는 뒷배를 믿고 전횡하는 존재라는 면에서 부패한 개인이라기보다는 악마를 끌고 온 것이라는 상상이다. 박애의 상징인 예수를 끌고 온 이상 사람을 해치지 않아야 하는 존 커피가 그럼에도 퍼시를 처단할 수 있었던 건 그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와일드 빌 역시 마찬가지다. 퍼시는 사디즘적인 악의, 와일드 빌은 순수 폭력적인 악의고, 인종 차별의 근거가 되는 두 악의는 미국인들이 믿어 마지않는 신의 뜻에 반하는 악마적인 것이라는 엄정한 경고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 말하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종교적으로 신도 원하지 않는다 말한다는 면에서 타협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결국 남은 것은 폴의 결말이다. 오래도록 살아남은 것을 두고 누군가는 저주라 해석하기도, 누군가는 양심이란 축복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론 굳이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가치중립적인 면에서 긴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은 예수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기 위함이고, 예수와의 거리가 멀어지는 만큼 폴 에지콤의 사색은 현생의 인간들에게 가까워질 것이다.

 

 

 

 

 

 

# 4.

 

부차적이긴 하지만 사형제도에 대한 비판 또한 관련된다. 다만 그 주장이 앞서의 인종 차별이나 종교 신화에 비해 중요하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예수를 끌고 들어온 이상 존 커피는 교도소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도록 애초부터 예정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사법 시스템의 결함은 결론이 아닌 전제라 할 수 있고, 사형제의 문제 역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결정된 것이라는 면에서 그 설득력은 감정적이기만 할 뿐 논리적이지 못하다. 차라리 사형제에 대한 논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세 번째 살인>에서 다룬 논의가 훨씬 깊다. 물론 평소 사형이라는 제도와 거리가 무척이나 멀 수밖에 없는 관객들로 하여금 '사회 정의가 반드시 옳은가'라는 담론에 들어갈 수 있도록 최대한의 친절로 상황을 극화하고 과장한 것이라 항변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인간 존엄에 대한 명분은 대부분의 사형제 폐지론이 차용하는 만큼 그린 마일에서도 중요하게 그려진다. 영화는 사형장으로 향하는 사형수들의 스트레스를 묘사함에 있어 가감이 없다. 선역의 교도관들이 죄수들이 최소한의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은 사형제가 가져야 할 겸허함을 보여주는 것이면서도, 스펀지를 물에 적시지 않는 퍼시의 행각 따위는 단순히 악역의 악행을 묘사함에 앞서 사형제라는 것에 충동적인 보복 감정이 포함되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 반문하는 것이기도 하다. 죄수들의 인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사형 집행인의 인권 문제다. 톰 행크스가 연기한 폴 에지콤이 느끼는 정신적 부담,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떠나보내며 이를 '천벌' 혹은 '저주' 받았다 여기는 모습은 사형은 집행인에게도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이 됨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것은 영화 그린마일의 핵심적인 내러티브 중 하나가 된다.

 

 

 

 

 

 

# 5.

 

끝으로 연출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프랭크 다라본트가 메가폰을 잡은 대부분의 영화가 그러하듯 원작자 스티븐 킹의 내러티브를 최대한 단순화한 후 정성스레 이식한 작품이다. 친절한 플롯, 평면적 캐릭터, 다정한 표현, 녹색의 복도와 대비되는 커피색 세계 따위의 구성은 직관적인 범용성이 크고 이는 영화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았던 힘이 되었음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가장 인상적인 조작은 액자식 구성이다. 이야기를 되돌리거나 수정할 수 없는 닫힌 것으로 만들어 관객에게 도덕적 무력감을 주는 것이기도 하고, 작중 초자연적 설정을 보다 편안하게 수용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상당히 감정적인 이야기를 길게 던져 놓음에도 스크린을 뒤돌아 나오는 관객들로 하여금 종교적 사색을 유도하는 거름망으로서 작동하기도 한다.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혼란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회의 형식으로 독백하게 한다는 면에서도 내러티브를 보강하는 효과가 있다. 장르적인 면에서 폴의 이야기를 듣는 청자에 자리하게 하는 것은 일련의 사건들이 진실인지 아니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윤색된 이야기인지에 대한 미묘한 여지를 남기는 것으로, 이는 존 커피의 기적을 명징한 사실이 아니라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듣게 만드는 것이라는 면에서 종교 신화적 영화들 특유의 긴장감을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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