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Film/Comedy

빌 머레이의 옥중일기 _ 사랑의 블랙홀, 해럴드 래미스 감독

그냥_ 2019. 1. 24. 23:30
728x90

 

 

# 0.

 

한국어 제목은 대체 누가 지은 걸까요? 어느 분이신지는 몰라도 영화의 개봉 연도를 생각하면 연배가 제법 되실 것 같긴 합니다만, 실례를 무릅쓰고 여쭤보건대 선생님은 좀 맞아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에... 사랑의 블랙홀이라니. 아니, 의사 양반, 이게 무슨 소리야!

 

 

 

 

 

 

 

 

'해럴드 래미스' 감독,

『사랑의 블랙홀 :: Groundhod Day』 입니다.

 

 

 

 

 

# 1.

 

원제는 <Groundhog day>입니다. 우리에겐 성촉절이라 번역되는 기념일이죠. 북미산 마멋의 다른 이름인 그라운드 호그가 겨울잠에서 깨어나 동굴에서 나오다 자신의 그림자를 뒤돌아보면 겨울이 6주 더 이어지고 그냥 나오면 봄이 온다는, 뭐 그런 설화의 날입니다. 어쨌든 겨울과 봄의 경계 즈음에 있는 날이니까 우리로 치면 '경칩' 정도 겠네요. Groundhog day라는 제목은 영화의 구체적인 배경이 되는 시간적 설정을 의미함과 동시에, 현재의 선택이 앞으로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장르에 대한 암시와, 그 결말이 어떤 식으로든 우여곡절 끝에 기나긴 겨울을 지나 봄에 도달할 것이라는 희망을 넌지시 은유하는 기가 막힌 제목입니다만, 이런 함의들을 우리의 배급사에선 깔끔하게 무시하시고 '사랑의 블랙홀'이라고 번역하셨습니다. 박수 세 번 짝짝짝.

 

하... 진짜 정말이지 밑도 끝도 없네요. 사랑이야 그렇다 쳐도 블랙홀은 뭔가요 대체. 덕분에 20여 년 전 많은 분들이 영화의 제목과 포스터에 대문짝만 하게 걸린 탁상시계와 빌 머레이의 깜찍한 표정이 더해진 어설픈 합성, 구석에 찌그러진 앤디 맥도웰의 미모에 속아 흔해빠진 양산형 로맨틱 코미디인 줄만 알고 영화관을 찾으셨을 겁니다. 달달한 데이트를 상상하며 찾은 극장에서 웬 이상한 아저씨의 몸개그와 원나잇 스탠드, 음주운전, 은행강도, 자살 따위를 억지로 보셔야 했겠죠.

 

 

 

 

 

 

# 2.

 

그런 영화들이 있습니다. 플롯에 대한 지배력이 굉장히 강한 매력적인 아이템을 주소재로 하면서, 동시에 그 아이템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변주의 여지가 있어 하나의 소장르를 구축하게끔 하는 영화. 이후 이어지는 비슷한 영화들의 단서가 되며 작품 자체로서 하나의 세부 장르를 정의하게 되는 영화들 말이죠. 대표적인 예로 언더커버 경찰의 이중 스파이물을 정립한 유위강, 맥조휘 감독의 <무간도>를 들 수 있을 겁니다. 이후 할리우드 리메이크 작인 <디파티드>나, 국내에서 대성공을 거둔 <신세계>같은 작품들은 원튼 원치 않든 모두 무간도의 지배 하에 놓여있죠. 앞으로 나오는 영화들이 어떤 배우와 어떤 설정으로 각색한다 하더라도 경찰과 범죄조직 간의 이중 스파이물이란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무간도의 영향력 하에서 자유롭기는 힘들 겁니다.

 

그리고 또 다른 훌륭한 예가 지금 이야기하는 이 작품, <사랑의 블랙홀>입니다. 모든 루프물의 조상님이시죠. 루프물에 스릴러와 액션을 버무린 던칸 존스 감독의 <소스코드>나, 더그 라이만 감독의 <엣지 오브 투모로우>, 잔잔한 멜로 정서로 엮어낸 길 정거 감독의 <이프온리>나 리차드 커티스 감독의 <어바웃 타임> 등은 모두 사랑의 블랙홀이란 이름의 명작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 3.

 

이렇게 말하니까 뭐 엄청 대단한 영화 같네요. 그치만 그건 영화일 하시는 분들이나 중요하게 생각할 이야기구요. 우린 관객이죠. 관객이 그런 것 까지 알아 일개 영화 따위를 받들어 모셔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어깨에 힘을 빼고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거만하게 영화를 보도록 합시다. 

 

말씀드린 대로 이 영화는 루프물, 반복되는 특정 시간 속에 갇힌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빌 머레이가 연기하는 모태 싸가지 필 카너즈는 방송 스탭인 앤디 맥도웰 누나(리타)와 함께 펜실베이니아주 펑추토니에서 열리는 성촉절 취재를 떠납니다. 매년 반복되는 지루한 행사에 무심한 태도로 일관하던 필은 일을 끝내기 무섭게 마을을 떠나려 하지만, 갑작스러운 폭설에 길이 막히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펑추토니에서 하루를 묵게 되네요. 다음날 아침. 필은 성촉절인 어제가 다시 반복됨을 알게 됩니다. 루프의 시작인 거죠. 무슨 짓을 해도 그날의 아침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필은 그야말로 하고 싶은 모든 짓들을 합니다. 난데없이 남을 때리기도 하고, 거짓말을 해 애먼 여자와 잠자리를 가지고, 난폭운전으로 사람들을 치고 다니며, 심지어 현금 수송 차량을 털기까지 하죠.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끊임없이 반복되는 하루가 주는 절대적인 고독과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필'은 이젠 역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스스로의 목숨을 거두려 합니다만, 역시 루프를 벗어날 순 없습니다.

 

언제나와 같이 또다시 시작된 그 날, 2월 2일. 되풀이되는 시간 속에 갇힌 자신의 저주를 리타에게 호소하던 필은 그녀와의 대화에서 무언가 깨달은 게 있는지, 그전과는 달리 선행을 하고 자기 계발을 하기 시작합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이 흘러 피아니스트보다 멋진 피아노 연주와 조각가보다 멋진 얼음 조각을 하게 된 필. 그동안 내면화되어버린 선량함과 능숙함을 바탕으로 그야말로 완벽한 하루를 보내고, 마침내 리타와의 사랑에 성공하죠. 그녀와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난 후 거짓말처럼 그토록 기다리던 내일, 2월 3일이 찾아옵니다. 필이란 이름의 마멋이 드디어 스스로의 그림자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온 거죠. 루프를 벗어난 그는 펑추토니에서 살기로 마음먹고, 리타와 함께 살 집을 구하며 영화는 막이 내립니다.

 

 

 

 

 

 

# 4.

 

저는 공포영화를 썩 잘 보는 편입니다. 주온은 귀엽구요. 링 사다코 미모면 어이쿠 감사하죠. 사탄의 인형 하고 애나벨 양쪽에 끼고 단독 캠핑 가능하구요. 따끈한 쏘우 한 조각이면 팝콘 한 그릇 뚝딱입니다. 장화, 홍련이요? 갓수정님과 갓근영님 볼 시간 잡아먹는 침대 귀신 나부랭이, 너 길 가다 마주치지 마라. 시도 때도 없이 관등성명을 외쳐서 육군 병장에게 크리티컬 한 트라우마를 되살리는 알포인트 정도만 제외하면 공포영화 따위 아무것도 아니죠. 그럼에도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제겐 이 영화가 최고의 '공포영화'입니다. 엥? 로맨틱 코미디라며? 웬 공포타령이야? 라 하시겠지만, 그러게요. 전 이 영화가 그렇게 무섭더라구요.

 

영화 속 루프는 그야말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넓은 감옥이자 가장 자유로운 지옥과 같습니다. 필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감옥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든 말할 수 있지만 누구로부터도 공감받을 수 없는 지옥에 있죠. 그는 사람을 죽이고 납치하고 속여서 섹스를 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작은 메모 하나 글귀 하나 남기지 못합니다. 그의 내면은 천천히 극단의 극단으로 내몰리겠지만 누구에게도 그 심정을 위로받을 수 없죠. 이후 만들어진 대부분의 루프물들은 영화적 편의를 위해서라도 루프를 탈출하기 위한 선명하고 구체적인 미션이 주어지는 게 보편적이지만 이 영화는 그런 것도 없습니다. 굳이 미션이라고 하자면 영혼의 성장이랄까요? 그야말로 최고 난이도의 과제네요.

 

무한정 이어질 것만 같은 기약 없는 루프 속에서 제 아무리 거대하다 한들 유한할 수밖에 없는 쾌락을 몽땅 태우고 나면, 필은 필연적으로 무한한 지루함에 직면해야 합니다. 상상하건대 섬뜩하지 않으신가요? 마치 우리가 애써 외면하거나 망각하며 살고 있는 '죽음'을 억지로 눈앞에 가져다 둔 것만 같은 공포감에 소름이 돋는 듯합니다. 한때 유행했던 스가하라 소우타의 만화 <5억 년 버튼>을 보면서 느낄 법한 서늘하고 불쾌한 공포감이 이 영화에선 훨씬 일상적이면서 담담한 톤으로, 대신 밀도있고 현실감 있게 전달되는 듯하죠. 로맨스를 걷어내고 수없이 긴 시간 동안 단 하루에 갇혀 있는 필의 상황을 내면화해보면, 마치 불사의 무기징역수가 쓴 옥중 고행기를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 5.

 

세상에서 가장 넓은 감옥을 살아 나온 필은 결국 어떤 사람이 된 걸까요? 그는 왜 선행을 하고 자기 계발을 하기로 한 걸까요? '필'에게 펀치를 맞는 네드 역의 배우 스티븐 토보로스키는 감독이 "주인공은 자기 시간으로 1만 년 정도 갇혀있었다."라고 말했다 하죠. 지독하게 긴 시간 동안 필은 자신의 행동이 그것이 선행이든 악행이든 아무런 결과론적 의미가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피아노를 들려줄 사람도 마땅히 없고 들려준다 한들 그걸 다음날까지 기억해줄 사람 역시 전혀 없습니다. 기록 해 남겨둘 수도 없죠. 사람을 살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무에서 떨어진 아이를 받아내지 못해도 저 아이는 자고 일어나면 또다시 아침을 살아낼 겁니다. 못 받아내도 마찬가지구요. 목이 막힌 할아버지 역시 살리나 죽이나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피아노를 배우고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을 살리죠.

 

 

 

 

 

 

# 6.

 

루프 속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 쳇바퀴를 도는 듯 하지만 사실 그로부터 벗어난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행위를 하는 필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죠. 그가 사람을 살렸다는 사실과, 사람을 살리겠다는 선택을 한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런 선택을 실천하는 자신과, 그런 자신의 내면만은 분명 루프 속에서도 지속됩니다. 피아노를 유려하게 연주하는 자신 역시 루프의 한계를 극복하죠.

 

그의 삶을 평가할 절대적인 가치는 외부의 극단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전혀 훼손되지 않습니다. 필은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본질이 자신 안에 있다는 진리를 얻은 사람, 스스로 오롯이 선 사람이네요. 선행은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공익광고에나 나올 법한 명제가 작위적이고 위선적인 것이 아니라는 걸 그는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깨달은 사람입니다. 기나긴 겨울을 건너오며 필은 비로소 자기 삶의 신(GOD)이 됩니다.

 

로저 이버트 옹은 영화를 보고 "필은 '더 나은' 필이 되는 것이지, '다른' 필이 되지는 않는다" 평했다 하죠. 루프 안에서 보낸 그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삶이란 어떤 시간에 사는지 어떤 이들과 사는지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어떻게 살아 내느냐에 따라 그 자체로 충만하고 풍요로운 것일 수 있음을 은유적으로 말합니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그래서 천사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 필은 깊은 루프의 저주라는 악마조차 무릎 꿇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 7.

 

결국 영화는 로맨스의 형식을 빌려 삶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대단히 철학적인 영화라 할 수 있겠네요. 인생의 의미란 건 결국 삶을 향유하는 자신의 내면, 그 안에 있음을 말합니다. 선량한 행동이나 능숙한 솜씨로 창조된 유무형의 외부적 물질에 그 본질이 담겨 있는 게 아니라 말합니다. 역시 조상님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온갖 RPG 게임이나 양판소에서 뭐만 하면 고대인을 찾는 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늘 습관처럼 깊게 숨을 내쉬어보곤 합니다. 들숨 한번, 날숨 한번. 또 들숨 한번, 날숨 한번.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온 감각으로 느껴보려 하죠. 어떤 결과물로 인해서가 아니라, 우린 우리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본질적인 사람입니다. 필이 버텨낸 시간에 비하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시간은 찰나와 같겠죠. 살아 있는 동안 그라운드 호그 마냥 과거를 뒤돌아 스스로의 그림자에 발 묶이지 않는다면. 최선을 다해 한걸음 한걸음 살아있음을 즐긴다면 제 눈 앞에도 여러분의 눈 앞에도 천사가 나타나리라 믿습니다. 해럴드 래미스 감독, 빌 머레이 주연, <사랑의 블랙홀> 이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 본 블로그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글에서 다루는 작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댓글", "포스트를 자신의 블로그로 유인하는 데 이용하려는 댓글", "무분별한 맞팔로우 신청 댓글" 등은 삭제 후 IP 차단될 수 있습니다.

 

 

"좋아요", "댓글""구독"

 

은 블로거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