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Film/Animation

세계관 최강자 _ 천공의 성 라퓨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그냥_ 2025. 2. 22. 18:30
728x90

 

 

# 0.

 

세게관 속 최강자 말고 세계관 만들기 최강자라는 뜻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천공의 성 라퓨타 :: 天空の城 ラピュタ』입니다.

 

 

 

 

 

# 1.

 

<반지의 제왕>을 극장에서 봤던 순간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난쟁이 둘의 눈물겨운 장거리 하이킹, 대단한 걸로 대단한 절대 반지의 존재감, 둘이어도 넷이어도 안될 것만 같은 삼총사의 우정, 스텟을 잘못 찍은 게 분명한 힘법사 간달프와, 뜻하지 않게 작품의 마스코트가 되어버린 골룸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소년의 눈망울을 반짝이게 하는 즐거움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가장 매력적인 건 톨킨에 의해 창조된 세계 그 자체다. 평화로운 호비튼의 언덕에서부터 황량한 운명의 산에 이르기까지. 음습한 팡고른 숲에서부터 폭압적인 아이센가드 탑에 이르기까지. 배수진의 분전이었던 헬름협곡의 요새와, 호쾌한 참교육이었던 엔트의 역습과, 그들 시대 최대의 전투가 펼쳐졌다던 펠렌노르 평원에 이르기까지 가운데땅 곳곳을 주인공 무리와 함께 탐험하는 경험은 감히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이다. 2001년부터 한 해 간격으로 휘몰아쳤던 장대한 시리즈의 마지막은 그래서 단순히 영화적 경험이 사그라드는 것이 아닌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듯한 아련함으로 기억되고 또 추억된다.

 

'안 본 눈 삽니다'랬던가. 반지의 제왕은 수많은 판타지 영화 팬들의 칭얼거림처럼 일종의 저주가 되었다. 이후의 모든 판타지는 강제로 반지의 제왕과 스파링을 붙어야 했고, <아바타>를 비롯한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은 판판이 깨져나가고 말았다. 나쁘진 않지만 반지의 제왕만은 못하다. 익숙한 푸념과 함께 극장을 돌아설 때마다 생각하곤 한다. 언제 또 반지의 제왕과 같은 놀라운 세계를 만날 수 있을까.

 

 

 

 

 

 

# 2.

 

잘못 들어왔나 싶을 수 있지만 <천공의 성 라퓨타>를 이야기하는 글 맞다. 평소와 달리 다소 감상적이다 보니 서론이 길었다. 반지의 제왕의 이야기로 뜸을 들인 건, 라퓨타가 15년씩이나 먼저 개봉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론 그보다 늦게 봤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비행석을 머금은 거대한 나무가 우주공간에서 내려다보는 엔딩을 보며 십수 년 전의 못생긴 소년은 생각했다. 이 영화의 세계는 너무나도 매혹적이구나. 이 영화는 반지의 제왕만큼이나 재미있구나.

 

장르로서의 판타지란 무엇인가. 각자의 견해가 분분하고 어느 것도 정답도 오답도 아니겠지만, 개인적으론 '세계가 주인공인 장르물' 정도로 느슨하게 이해하고 있다. 가령 현실의 내가 부자가 아니고 부자의 삶에 호기심을 느낀다 해서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를 판타지라 부르지는 않는다. 제 아무리 자본의 광기를 논한다 하더라도 주인공은 엄연히 조던 벨포트이기 때문이다. 초현실적 전개와 과격한 표현이 쏟아지는 논쟁작 <서브스턴스>를 판타지라 부르지 않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제 아무리 탐욕과 중독을 야기하는 사회를 평한다 하더라도 어쨌든 주인공은 엘리자베스 스파클이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극과 판타지를 구분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서양 판타지는 중세 고딕 문화를 적극 차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직관적으로 두 장르를 구분할 수 있다. 역사극의 주인공은 재현된 세계 속의 '그 사람'인데 반해, 판타지의 주인공은 새롭게 창조된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 3.

 

그런 의미에서 <천공의 성 라퓨타>는 이상적이고 정석적인 판타지 영화다. 내내 목이 터져라 서로를 불러대는 파즈의 모험과 시타의 감수성은 대단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전설 속 라퓨타 성의 실체와 무스카의 정체, 좌충우돌 도라 일당의 코미디는 유쾌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겸손과 공존을 지향하는 특유의 생태주의와 평화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라퓨타의 본질은 매 시퀀스마다 한 땀 한 땀 디테일로 가득한 세계다.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르른 하늘에서 돌들이 속삭이는 지하 광산까지. 파즈가 나고 자란 슬랙 계곡에서부터 시타가 살았다던 곤도아 산의 목장까지. 각각의 장면 속 세계의 황홀함이야 말로 작품의 진정한 가치다.

 

특히 매력적인 건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듯 스팀펑크의 세계관이다. 과학상자 꼼지락거리던 소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계적 물성과, 그 열망을 시각화하는 듯 가득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 구름의 질감은 압도적이다. 나무로 쌓아 올린 철도와 그 위를 삐걱거리며 내달리는 광차의 좌충우돌 역시 여느 블록버스터의 스펙터클 못지않다.

 

후반부 천공으로 옮겨간 후 감독은 숨겨둔 덕력을 유감없이 뽐낸다. 바람에 순응하는 이미지의 천으로 만든 타이거 모스호의 유체역학적인 디자인과, 이와 대비되어 육중한 질량을 힘으로 밀어 올리는 듯한 전함 골리아테의 존재감, 그 사이사이로 곡예 비행하는 창의적인 플랩터의 날갯짓은 스팀펑크의 매력이란 이런 것임을 자랑한다. 교전 끝에 고압적인 구름이 걷히며 모습을 드러내는 라퓨타 성의 상상력 역시 장관이다. 상층부 자연친화적인 영역과 하층부 과학기술 문명의 결합은 1980년대의 발상과 작화라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화로워 조금도 이질적이지 않다.

 

 

 

 

 

 

# 4.

 

미야자키 하야오의 탁월함은 그럼에도 일련의 세계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품을 가득 메운 세계의 강렬함은 멸망의 주문 바루스와 함께 찰나의 수증기처럼 사그라든다. 영화 속 그이들과 다름 아닌 욕망하는 인간임을 자백케 하는 듯 헛헛한 빈손을 어루만지는 동안, 이젠 지브리를 대표하는 명곡이 되어버린 <너를 태우고(君をのせて)>가 잔향처럼 아련하게 씁쓸하게 퍼져나간다. 앞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던 파즈의 모험과 시타의 감수성과 도라 일당의 코미디와 생태주의와 평화주의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진하게 우려낸 에스프레소처럼 침전시킨 채 말이다. end.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Netflix, Tving, WatchaPlay, CoupangPlay, Appletv,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 본 블로그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글에서 다루는 작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댓글, 포스트를 자신의 블로그로 유인하는 데 이용하려는 댓글, 무분별한 맞팔로우 신청 댓글 등은 삭제 후 IP 차단될 수 있습니다.

 

 

좋아요, 댓글, 구독

 

은 블로거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