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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Animation

경이로운 세계 _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그냥_ 2025. 2. 1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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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大丈夫、怖くな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 風の谷の ナウシカ』입니다.

 

 

 

 

 

# 1.

 

온종일 비행하듯 자유롭지만, 마스크 없인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구속적이다. 붉은 눈의 오무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공포, 푸른 눈의 오무는 숲을 지키는 수호자다. 압도적인 곤충은 두렵지만, 가볍고 튼튼한 허물은 요긴한 것이기도 하다. 독을 내뿜는 숲은 스스로를 희생해 땅을 정화하고, 인간은 자신의 죄악을 대신 갚는 줄도 모른 체 숲을 증오하며 불태운다. 평화로운 구름 속엔 매서운 번개가 몰아친다. 바람은 포자를 실어 나르는 무서운 것임과 동시에 막아내는 고결한 것이다. 문명은 풍요의 이유이자 멸망의 이유다. 쌍둥이 여동생을 거둔 줄도 모르고 나우시카를 공격하던 아스벨은 이내 친구가 된다. 아버지를 죽게 만든 고압적인 크샤나의 망토 아래에는 누구보다 깊은 상처가 숨겨져 있다.

 

모든 것은 양면적이다. 양면성은 존재를 가치중립적이게 한다. 나우시카의 지하실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창조하려는 중립성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지하에서 길어 올렸다는 순수한 물은 대상을 어느 방향으로도 치우치거나 오염되지 않게 하는 것으로, 그 속에서 사물과 자연과 인간이 공존한 장면은 작품의 주제의식을 투영한다. 자신의 손가락을 깨문 어린 여우다람쥐에게 아프지 않다 말한 나우시카의 이야기란, 결국 지하실의 사상을 세상에 관철하는 이야기다.

 

 

 

 

 

 

# 2.

 

나우시카의 바람계곡, 크샤나의 토르메키아, 아스벨의 페지테. 각각은 세계에 대응하는 각자의 사상을 대변하고 있고, 양면성을 이야기하는 영화는 당연하게도 각자의 당위와 모순을 함께 묘사한다. 대표하는 캐릭터와 뒤를 받치는 캐릭터 간의 친절한 대비다. 가령 거신병을 복원해 포자의 숲을 절멸하겠다는 토르메키아의 사상에는 상처와 복수, 야심이 담겨있다. 토르메키아를 저지하는 것이 필요악이라 주장하는 페지테의 사상에는 자기 대의에 충전된 자들의 무자비함 아래로 자기모순의 죄책감이 숨어있다. 바람계곡은 유일하게 공존과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그조차 불완전하긴 매한가지다. 병마에 고생하다 죽임을 당한 왕처럼 부족은 쇠약해지고 있었음에도 별다른 대안이 없고, 이는 바람계곡 주민들의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성향으로 표현된다.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주인공에게 가혹하다. 그중 가장 가혹한 크샤나조차 한쪽 팔과 양다리를 잃은 존재로서 변호받는다. 역으로 가장 당위를 보장받는 오무는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나우시카를 밀쳐낸다. 작품에는 다양한 층위의 피아만이 존재할 뿐 뚜렷한 선도 악도 없다. 감독은 양면성의 내부에 대해 논평할 생각이 없다. 입체적인 세계 속에서 나약한 인간은 무엇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가를 탐구할 뿐이다. 나우시카는 겉보기엔 모험하고 설득하고 있지만, 동시에 일련의 양면성을 체험하며 마냥 낙관하던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인식과 치열하게 투쟁한다.

 

 

 

 

 

 

# 3.

 

모두는 개성적이지만 내면엔 공통적으로 두려움이 존재한다. 나우시카의 손가락을 깨물었던 여우다람쥐는 작품이 주장하는 두려움이라는 원리에 대한 암시다. 단순하게 악한 상대에 대한 두려움을 포용하는 연민과 자애. 모험 끝에 도달한 성장이란 결국 모든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이다. 여기서의 존재란 비단 인간이나 생물뿐 아니라 물과 공기와 바람 따위의 물질, 심지어 관계나 신뢰, 공동체, 사상 등 무형의 것까지 포괄하는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다. 작품이 진정 논박하는 대상은 무엇에 대해서든 누구를 향해서든 '경시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고, 따라서 내러티브는 일관되게 모든 이들이 경시하는 마음을 이겨내고 경이로움에 다가가는 과정으로 점철된다. 초현실주의적 엔딩에서 보인 시청각적 숭고함의 정체다.

 

주인공 나우시카의 숭고함은 모순 없는 고결한 영혼이어서가 아니다. 스스로 한계가 있는 캐릭터임에도 그녀는 어느 순간에나, 설령 상대가 자신을 공격한다 하더라도 경외감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작품이 제창하는 평화주의의 본질이다. 평화롭지 못한 것은 피아의 양면성에 주목하지 못함으로써 경외심을 깨우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련의 평화란 쉬운 것이 아니다. 외려 쉽지 않기 때문에 숭고한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들의 경이로움을 자각하기 위해 스스로 수고로움을 감수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하고 힘겹고 자기희생적인 것인가를 신화적으로 그린다. 작품의 마지막이 어떤 면에선 비겁해 보일 정도의 초현실적인 기적으로 귀결되는 이유다. 동시에 그것을 예언의 형태로 실현하고 있다는 면에서 일련의 힘겨움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인 것이라 다독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때론 미시적 스케일에서 역행할지언정 거시적으로는 관철되어 나갈 운명이라고 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평화주의는 처음부터 이토록 순수한 것이었다.

 

 

 

 

 

 

# 4.

 

종전한 지 40여 년 밖에 안된 1984년은 군국주의에 대한 경계와 원폭의 상흔이 남아있었기에,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 생존의 문제를 다루는 유행이 강하게 작동하던 시기다. 때문에 뜻하지 않게 군국주의 옹호 논란이 있기도 했었더랬다. 감히 대표한다 할 수는 없겠으나 일제의 폐해에 가장 시달렸던 한국인 중 한 명의 입장에서 생각해도 이 작품이 군국주의를 옹호하고 있다는 혐의는 와닿지 않는다. 조금 더 솔직하자면 오히려 이 영화에 군국주의를 의심했던 사람들의 사상이 역으로 의심스럽다.

 

특히 나우시카의 희생을 카미카제와 연결하려는 경향성이 보이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카미카제는 인간을 수단으로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던 반면 나우시카의 희생은 막아내기 위한 것이다. 자신이 믿는 생명의 의미와 미래를 위해 스스로 희생한 것이다. 공동체를 위해 개인이 복무할 것을 강요하는 것과, 개인이 스스로의 선량함으로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엮는 건 과도한 확대해석에 불과하다. 소방관을 카미카제의 후신이라 매도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것이다.

 

오히려 불쾌한 것은 군국주의를 지적하던 몇몇 사람들의 콤플렉스 이면에, 여전히 카미카제를 왜곡된 '희생'으로 인식하는 듯 보인다는 것과 원폭을 부당한 '피해'라 인식하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더욱이 불쾌한 것은 그 과정에서 태평양 전쟁의 카미카제와 원폭투하 이전의 역사에 대한 아무런 성찰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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