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세상이 대충 망한 뒤 지금 이 시대에서 건(gun)법으로 나를 막을 자는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미쇼 감독,
『더 로버 :: The Rover』입니다.
# 1.
또포칼립스다. 이쯤 되면 망하지 않은 세상이 역으로 잘못된 건가 싶다. 낡은 차량 안에서 간신히 평온을 얻는 남자, 건조한 모래바람 몰아치는 황량한 들판, 정체 모를 중화풍 음악으로 소개되는 호주는,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망해도 단단히 망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수상할 정도로 총을 잘 쏘는 농부 에릭은 가이 피어스가 연기한다. 살아있는 채권 겸 생체 내비게이션 레이는 이제 막 트와일라잇을 벗어던지던 무렵의 로버트 패틴슨이 맡았다. 이기적인 스타일과 과장된 호흡의 느려터진 영화는 미친듯한 호불호를 유발하나, 마초의 섹도시발을 쉴 새 없이 뿜어내는 가이 피어스의 연기와, 분리불안 걸린 치와와스러운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만큼은 이견의 여지없는 강점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로서는 이례적일 정도로 물자의 위기를 생략한다. 먹고살기 힘들다는 식의 묘사가 몇몇 등장하지만 말뿐이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치료도 연료도 총알도 부족한 법이 없어 두 사람의 여행을 방해하지 않는다. 탐욕이 일부 표현되기도 하지만 그뿐이다. 대부분은 내면의 무언가를 크게 상실한 듯 살아있는 것도 죽어있는 것도 아닌 중간 어딘가의 존재처럼 퍼질러져 있다. 감독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파괴적인 새로운 무언가가 아닌 거대한 부재로 표현하고 있고, 따라서 영화의 목적 역시 부재한 무언가에 대한 탐구임에 틀림이 없다.
# 2.
세계는 부도덕과 부조리로 가득하다. 헨리의 무리가 에릭의 차를 훔친 것에 주저함이 없다. 약에 취한 소년은 매춘하고, 매춘을 중매하던 노파는 헛된 질문만 던진다. 총을 팔던 왜소증 사내는 값을 흥정하려다 총에 맞고, 그와 함께 마작하던 무리 역시 총에 맞는다. 도움을 받은 에릭은 의사를 공격한다. 상점 주인은 총을 들이밀어 에릭을 위협하지만 강도하는 대신 굳이 물건을 판다. 군인에게 체포된 에릭은 아내와 내연남을 살해했음에도 누구도 자신을 추궁하지 않았음에 절망했다 고백한다. 자백을 들은 군인은 관심 없다 말하자마자 살해당한다.
부조리한 세계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경계하는 것뿐이다. 질서와 희망을 잃고 불안한 존재들의 움추러드는 내면과 서로를 향한 충동적 공격이야 말로 감독이 창조한 디스토피아다. 차를 잃어버리고 분노에 찬 에릭과, 모텔 방에 숨어 노크소리에 총을 쏘는 레이는 사실 같은 존재다. 드넓은 세계를 비워둔 채 좁은 케이지에 갇혀 살고 있는 개의 두 가지 모습인 것이다. 신뢰가 붕괴된 세계는 거대한 공백과 같은 것으로, 극을 통해 표현된 다양한 부조리들과 각각의 부조리 사이 길고 허무한 드라이빙의 실체다.
모래바람은 관계가 바스러져 풍화되어 버린 세계를 표현한다. 뿌연 창문으로 보호받는 차는 스스로를 가둔 케이지다. 도입에서 차량을 도난당한다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창문이 깨진다는 것이다. 창문의 파괴는 언젠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것이고, 한번 파괴된 이상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인 것이다. 결말에서 차를 되찾는다 하더라도 온전한 차를 복구할 수는 없고, 이는 그가 허구적 안식처를 극복할 것이라는 복선이 된다. 트렁크의 개와 내면의 비관을 함께 끄집어내어 땅에 묻는 필연인 것이다.
# 3.
에릭과 레이는 결국 헨리의 패거리와 만난다. 헨리는 동생의 죽음에 절망하며 에릭으로 하여금 무슨 짓을 한 거냐 묻는다. 영화는 레이가 겪은 그 '무슨 짓'에 관한 것이고 이는 에릭뿐 아니라 관객에게 되묻는 것이기도 하다. 대답은 도로를 달리는 동안 레이가 경험한 모든 것으로써 문명이 문명이기 위해 합의된 질서와 희망의 흔적들이다. 자신을 스스로 방어하는 의지와, 희생된 타인에 대한 죄책감과, 대가 없이 사람을 돕는 의사의 선의와, 그것을 에릭에 대한 구원으로 되돌리는 경험이다. 그 끝에 설령 혈육이라 하더라도 질서를 어기고 희망을 저버린 헨리에게 총을 겨눌 수 있게 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건조한 디스토피아는 중립적으로 순수한 존재가 경험한 질서와 희망이 선명할 수 있도록 배경을 하얗게 비워내기 위함이다.
두 사람의 드라이브는 레이에겐 질서와 희망을 경험하는 것이었다면 에릭에겐 질서와 희망이 살아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마지막 자신의 차를 훔쳤던 삼인조가 아닌 나머지 한 명에게 총을 들이민 에릭은 끝내 총을 쏘지 않는다. 쏠 이유가 없기 때문이고 이는 이전까지 이유 없이 사람들을 죽였던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는 세 사람의 시신을 방치하는 대신 화장한다. 트렁크에 실려 유예되었던 개를 꺼내와 땅에 묻는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쏠 수 있었던, 죽은 사람의 시신을 고깃덩어리처럼 바라보았던, 그래서 의사로부터 나쁜 사람이라 원망을 들었던 사람의 손에 깃든 연약한 희망이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상정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굳이 외계인이 침공하거나, 핵전쟁이 발발하거나, 바이러스가 창궐하지 않더라도 질서와 희망이 없다면 이미 포스트 아포칼립스고, 그것은 관객이 살고 있는 현실과 그리 멀지 않은 것에 있다는 지적은 서늘하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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