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가이 리치가 이런 영화도 만들 줄 알았나
가이 리치 감독,
『더 커버넌트 :: Guy Ritchie's The Covenant』입니다.
# 1.
자잘한 이야기를 리드미컬하게 썰어 들어가길 즐기던 가이 리치에게 이런 면도 있었던 걸까. 제이크 질렌할과 다르 살림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영화는 감독의 전작들과 달리 굵고 선명한 이야기를 힘껏 끌고 가는 맛이 인상적이다.
보통의 영화에서 큰 선택은 큰 동기에 의해 일어난다. 큰 희생을 통해 큰 우정을 표현한다거나 큰 결단을 통해 큰 신념을 관철하는 식이다. 반면 시작부터 삐걱거렸던 파견 군인과 현지 통역사의 브로맨스는 큰 행동을 움직이게 만드는 작은 동기에 대한 영화다. 감독이 포착하고자 하는 작은 동기란 제목에도 적시된 '계약'으로, 상대적으로 고차원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약속이나 신의 같은 것이 아니다. 식당을 찾은 손님이 달아나지 않고 밥값을 낼 것이라는 믿음이자, 굳이 주방에 들어가 감시하지 않더라도 상식적인 음식이 서빙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상대가 계약을 성실히 이행할 것이라 믿는다 해서 그것에 식당 주인과 손님 사이에 우정 같은 것이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그가 계약을 준수할 것이라는 가상의 신화를 공유하는 형식으로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고 있고, 영화는 그 계약을 준수한다는 것이 얼마나 엄정하고 무거운 것인가를 개인의 고뇌에 축약해 그린다.
# 2.
아메드는 피격된 존을 버리고 달아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는다. 100km에 달하는 거리를 건넌 드라마보다 중요한 것은 이유다. 가족을 위해서 그런 것 아니냐 생각했다면 오해다. 가족의 보호는 오히려 존의 구원을 방해하는 요인에 가깝다. 존의 죽음에 아메드는 아무런 책임이 없고, 만삭의 가족에게 최악의 상황은 존의 죽음이 아니라 아메드의 죽음이다.
두 사람 사이에 우정 따위의 감정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전반부를 통해 충실히 설명된다. 특히 존에게 아메드는 자기 역할을 벗어나 자꾸만 선을 넘는 껄끄럽고 건방진 피고용인 정도로 여겨진다. 존이 눈앞의 아메드에게 무기를 빼앗아 등 뒤의 전우에게 건네는 시퀀스라거나, 반복적으로 시야 앞에 아메드를 세우고 뒤를 잡는 시퀀스 모두 신뢰의 부재다. 작전을 앞두고 아메드를 밖에서 기다리게 하는 것도, 사소하겐 맥주를 주지 않는 것도 모두 '계약을 준수하는 미국인'과 대비되는 존재로서 '계약을 준수하지 않을 수도 있는 아프가니스탄인'을 신용하지 않음이다.
함정에 빠져 전우를 모두 잃은 존은 마지못해 아메드에게 총을 건넨다. 이때의 총은 이전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계약을 상징한다. 비탈길을 굴러 내려오던 아메드로 하여금 굳이 한 번 총을 잃어버리게 한 후 다시 존의 손으로 총을 쥐어주는 것은 관객들에게 총의 함의를 곱씹어 생각해 볼 것을 요구함이다. 아메드가 총을 받아 든 것은 단순한 무기가 아닌 계약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민으로서의 의무에 계약한 아메드는 그에 걸맞게 혼신을 다해 존을 구한다. 나의 위기에 옆사람이 호응할 것이기에, 옆사람의 위기에 나도 호응해야 한다는 계약 말이다.
돌이켜보면 아메드는 처음부터 계약을 게을리한 적은 없다. 때때로 존 개인의 판단에 반하는 행동을 할지언정 통역사로서의 역할에는 항상 충실하다. 자신에게 통역을 맡긴 미국인을 교란하고 기망하지 않는다는 계약이자, 함정과 밀정을 고발하는 등 자신이 소속된 미군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계약 말이다. 서류상으로만 미비할 뿐 그의 행동양식은 애초부터 미국인이다. 그런 아메드를 까다롭다 평가한 것은 아메드의 문제가 아닌 그를 편견 하는 군인들의 문제다. 1
# 3.
극적으로 구조되어 살아 돌아온 존은, 자신이 잠든 동안 아메드는 미국으로 건너오지 못한 채 가족과 숨어 지냄을 알게 된다. 그는 심각한 죄책감을 느끼는 데 이때의 죄책감이란 사선을 함께 넘은 전우에 대한 감상적인 죄책감이나, 목숨을 빚진 상대에 대한 개인적인 고마움 같은 것이 아니다. 계약을 이행한 상대를 배신한 공동체의 부도덕에 대한 죄책감이고, 이는 연민이나 걱정이 아닌 '저주'라는 표현으로 명확히 구분된다.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존은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 아메드의 가족을 찾기로 결심한다. 존의 가족은 아메드의 가족이 그러했던 것처럼 존이 계약을 이행하는 걸 고민하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아내 케롤라인 또한 담대하게 남편을 보낸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시민성에 닿아있는 것으로, 아내는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그 계약을 이행해야 함을 이해하고 있다. 타인과의 계약은 가족의 사랑에 비해 한없이 사소하지만 때론 그 사소한 계약이 무엇보다 우선할 때가 있고 상식적인 시민인 당신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편리하게 취사선택할 수 없는 계약이라는 관계는 비단 존과 아메드뿐 아니라 영화 속 모든 사람들의 관계다. 이런저런 핑계로 빙빙 돌리던 문의전화를 통해 까다로운 것으로 묘사된 비자를 대령이 얻어준 것은, 그가 계약을 지킨 존에게 목숨을 빚진 또 다른 계약자였기 때문이다. 더 화려한 일을 핑계로 존과의 약속을 미뤘던 사설 용병 에디가 의뢰인이 '존 킨리와 그 아흐메드'였음을 알게 된 후 한달음에 달려온 것 역시, 공적 기반이 없는 용병 집단에게 유일하게 기댈 근거로서 계약의 가치를 더없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4.
영화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민간인을 공격해선 안된다는 세계인으로서의 계약을 위반한 탈레반에 대한 응징이라 정의하고 있고, 이는 마지막 구출씬에서의 웅장하고 통렬한 공격으로 표현된다. 반면 그런 당위의 미군이 철수하면서 현지 통역사들을 버리고 돌아온 것은 탈레반과 다르지 않은 계약 위반이라 지적하고 있고, 이는 엔딩을 통해 엄숙하고 비장하게 묘사된다. 안전하게 구조된 아메드의 가족보다 중요한 것은 희망과는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어두운 낯빛과 붉은 불빛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태우고도 남을 거대하고 화려한 수송기가 텅 비어있다는 것이다.
파편화된 개인들이 주고받는 계약으로 연결된 서사는 그 자체로 사회계약론의 드라마적 실현처럼 보인다. 특히 모든 민주주의 혁명의 동력이 되었던 사상이라는 면에서, 민주주의의 유산을 받은 미국이라면 더더욱 계약에 성실해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은 서늘하다. 다소 추상적으로 들리는 시민으로서의 계약 의무라는 것에 대한 확인을 이끌어내어 버려진 통역사들에게 비겁한 미국을 지적하면서도, 전쟁을 수행한 군인들을 비난하거나 탈레반을 옹호한다는 혐의에서 벗어나는 스토리는 유려하다. 그것을 특유의 난해하고 복잡한 스타일에서 벗어나 직관적인 스토리, 단단한 플롯, 세련된 액션으로 구현한 것은 더욱 유려하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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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의 미국인이란 '계약을 준수하는 시민성'을 의미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