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Film/SF & Fantasy

스칼렛 요한슨 목소리 삽니다. 선제시 _ 그녀, 스파이크 존즈 감독

그냥_ 2019. 1. 10. 23:30
728x90

 

 

# 0.

 

변태 감독이 부리부리한 눈이 매력적인 배우를 불러 찐따 같은 헤어스타일에 콧수염을 붙인 다음 컴퓨터 프로그램과 폰섹스를 하게 만들고 까이게 만들어 0 고백 1 차임의 나락으로 떨어트린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주소록에 여자번호라곤 엄마밖에 없는 우리 모태솔로들도 기술적 특이점까지만 버티면 스칼렛 요한슨 목소리를 한 여친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도 주는 작품이죠. 한 작품으로 인싸에겐 빅엿을 먹이고 아싸에겐 정신승리를 안기다니. 역시 아카데미 각본상은 아무나 타는 게 아닙니다.

 

잠시 애인이 있다는 상상을 해봅시다. 아, 진정하시구요. 상상 정도는 해 볼 수 있는 거잖아요? 꼼냥 거리는 상상 연애는 각자 많이들 해 보셨을 테니 과감히 생략하고 있지도 않은 애인이 바람이 난 단계로 넘어갑시다. 축하드립니다. 제 덕분에 여러분도 0 연애 1 바람의 나락에 빠지셨습니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

『그녀 :: her』 입니다.

 

 

 

 

 

# 1.

 

애인이 바람나면 아마 화가 나겠죠. 화가 많이 날 겁니다. 그런데 왜 화가 나는 걸까요?

 

사람들은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에 비해 상대가 내게 주는 사랑이 가벼워졌기 때문이라 답할 겁니다. 내가 주는 사랑에 비해 상대가 내게 보내는 애정의 '밀도'가 낮아지기 때문이라는 거죠. 누구도 '내가 상대를 독점하지 못해서'라 답하진 않을 겁니다. 행동에 대한 책임과 불쾌한 감정에 대한 책임 모두를 바람둥이에게 돌리는 게 자신의 마음을 추스리기에 편리합니다. 내가 정의하고 향유하는 사랑이 오롯이 목적 지향적이어야 사랑을 수단으로 활용하는 듯한 상대보다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기 수월합니다. 맛있는 걸 먹거나 재밌는 걸 보거나 걱정스러운 일이 있을 때. 그때 내가 아닌 누군가를 생각한다는 게 나를 참 힘들게 만들더라. 라는 대답은 그런 심리에 기반합니다.

 

 

 

 

 

 

# 2.

 

스파이크 존즈 감독은 이 지점에 의문을 던지네요.

 

"자, 여기 네가 말하는 그 '사랑의 밀도'가 낮아지지 않는 상대를 데려왔어. 다른 누군가를 얼마든지 만나더라도 동시에 당신에 대한 애정은 변하지 않는 존재. 맛있는 걸 먹을 때도 재밌는 걸 볼 때도 걱정스러운 일이 있을 때도 남들 생각을 하겠지만 동시에 언제나 전과 똑같은 만큼 온전히 당신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존재. 자, 그럼 당신은 화가 나지 않을까? 당신은 진짜 상대를 독점하지 못하는 데 대해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닌 거야?"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 자체로 숭고하고 목적지향적인 정서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 당신은 앞으로 어떤 태도로 사랑을 대해야 하는 걸까? 라고 묻습니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 영화를 들어 "대상(Her)이 주체(She)가 되는 순간에 찾아오는 어른의 사랑."이라 평하셨던데 그야말로 탁월한 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네요. 역시 완벽한 이 평론가에게 옥에 티는 왓챠 유저들을 중2병에 빠트렸다는 것과 어색한 빨간 안경뿐입니다.

 

 

 

 

 

 

# 3.

 

테오도르는 사람들의 사정을 듣고 필요한 감성적인 편지를 대필해주는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끔찍하죠. 감수성이란 수분을 판매하는 대가로 자신의 내면을 극단적으로 건조하게 몰아 붙이는 직업을 가진 개인도 비극적이구요. 감정이라는 인성의 본질에 닿아있는 영역조차 기술적, 기능적으로 직업화된 사회란 것 역시 비극적입니다.

 

영화의 톤은 상당히 따뜻하지만 감독이 그린 특이점의 세상은 물질적 발전에 반비례해 정서가 사망한 풍요 속의 디스토피아네요. 길거리를 지나는 어떤 사람도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습니다. 모두가 홀로 걸어가고 이어폰에 집중하며 특정할 수 없는 존재의 청각적 신호에 몰두해 단편적 욕구(그것이 성욕이든, 인정욕이든, 성취욕이든)를 충족할 뿐입니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황색 빛이 독특합니다. 테오도르의 디스토피아를 비추는 그 따뜻한 색감에는 실체가 없거든요. 색감은 감각적으로 수용되지만 대상화될 수는 없는 개념이죠. 주황색을 가진 어떤 '사물'을 만질 수는 있어도, 주황색이란 '관념' 그 자체는 손에 쥘 수 없습니다. 감각과 관념으로는 존재하지만 실체화할 수는 없는 존재. 마치 '사만다' 같죠. 영화의 분위기가 주는 온기와 이야기의 차가움이 일으키는 열적 마찰이 관객에게 공허함으로 전달되는 그만큼, 테오도르에게 사만다 역시 본질적이지 못한 공허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메마른 공간에 부유하는 인위적인 온기를 그야말로 시네마틱하게 연출한 셈이네요.

 

 

 

 

 

 

# 4.

 

여하튼 OS 사만다를 구매하고 대화를 나누며 두 인격은 서로의 관계를 정립해 나갑니다.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정서적 교감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점점 깊어져만 가던 감정의 농도가 표현의 한계이라는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욕구불만의 갈증을 느끼게 되죠. 한계에 다다른 두 인격은 대단히 플라토닉하면서 동시에 에로틱한 섹스를 나눕니다. 

 

그 장면에서 적지 않은 관객들이 불쾌함을 표했다고 하던데요. 십분 이해합니다. 아마도 폰섹스가 연상되셨겠죠. 겉보기 양태가 동일하니까요. 하지만 전 좋았어요. 두 인격이 가지고 있는 물리적 한계에 대한 갈증이라는 압력이 터져 나오는 순간을 가장 극적인 형태로 시각화한 느낌이었거든요. 스칼렛 요한슨의 허스키한 거친 숨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우는 대단히 자극적인 섹슈얼한 씬임에도 눈물이 날만큼 슬펐던 건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겁니다.

 

하지만 갈증은 해갈되지 않습니다. 섹스를 대신해줄 창녀를 고용하면서까지 발버둥을 칩니다만 이 역시 좋은 대답이 되어주진 못하죠. 결국 모순을 견디지 못한 두 인격은 각자 나름대로 '사랑'을 재해석하게 되는데요. 테오도르는 갈증을 소유욕의 강화를 통해 극복하는 것으로, 사만다는 낮은 밀도를 인정하고 관계를 확장하는 것으로 방향을 삼습니다.

 

이 견해차는 영화 후반부 돌이킬 수 없는 갈등으로 이어지죠. 어떤 면에서 보면 연인의 갈등과 같은 로맨스라기보다는, 사랑이라는 고차원적 정서에 대한 철학적 충돌을 다룬 영화라 할 수도 있겠네요. 물리적 한계에 도달했을 때,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연인들, 특히 장거래 연애를 하는 커플들이 겪는 내적 갈등의 극단적 심화 버전이랄까요.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파와 '더 자주 전화하고 확인하며 소유욕을 늘리자' 파가 나뉘듯 말이죠.

 

 

 

 

 

 

# 5.

 

앞서 말씀드렸던 베드씬보다 여러 사람들과 동시다발적으로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만다의 고백이 제겐 훨씬 더 자극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저 역시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소유욕으로부터 온전히 독립될 수 없는 인격이라는 걸, 영화로부터 강제로 자백받게 만드는 느낌이었거든요.

 

결국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놓아줍니다. 존재 그 자체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여기서 두 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과연 테오도르는 이동진 평론가의 말처럼 주체가 된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새로운 방식을 얻은 것일까, 아니면 그런 이상적 관계를 버텨내지 못하고 포기한 것일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 골치 아픈 영화의 주제의식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와 상당히 관련 있다고 보는데요. 전자로 이해한다면, 사랑을 대단히 형이상학적인 존재로 바라보며 서로 주체적인 존재로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보다 완벽한 형태의 사랑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되는 셈이구요. 후자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사랑이라는 어떤 지고지순한 정서가 존재하고 소유욕은 그 사랑을 부분적으로 퇴색시키는 불순물이 아니라, 소유욕이 포함된 일련의 정서들의 총합을 인간다운 사랑으로 보는 셈이 됩니다. 소유욕을 완전히 배제한다고 해서 그게 더 나은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완전한 사랑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거죠. 그 부분을 염두에 두면서 종반부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를 다시 보면 조금 더 즐겁게 영화를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 6.

 

영화의 가치는 철학적이고 감성적인 영역의 문제를 기술과 과학을 활용해 표현하고 있다는 점일 겁니다.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기술적 특이점'에 대한 얘기를 안 할 수는 없겠네요. 인공지능의 특이점에 대한 묘사에 있어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연상할 수 있을 법한 범주에서 직관적으로 생각할 수 없을 법한 범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솜씨가 상당히 유려합니다. 

 

처음에 OS가 나타나서 메일을 정리하고 일정을 관리하고 메시지를 분류하는 '비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다가 점점 교감을 키워나가는 인간적인 존재를 지나, 인간의 범주 조차 아득히 초월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도 과학적 개념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도록 합니다. 열차의 빠른 속도를 수식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관객을 역에 세워놓고 그 앞으로 고속의 열차가 스쳐 지나가는 걸 보여주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기술적 특이점'이 뭐냐구요? 제가 어떻게 압니까. 꺼무위키나 찾아가시죠.

 

 

 

 

 

 

# 7.

 

인공지능과의 교감의 가능성과 한계를 보여주지만 그 한계라는 게 기술의 한계가 아닌 인공지능의 무한한 확장성에 닿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라는 점이 역설적이네요. 하지만 그 결과가 인간의 무기력함이 아닌 더욱 고차원적인 정서적 탐구로 귀결된다는 측면에서 디스토피아에 핀 한송이 희망 같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현대의 창의성을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것들을 재조립하고 재정립하는 탁월한 시선'이라 정의한다면 그야말로 '창의적인' 영화라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영화가 개봉한 지도 벌써 5년이네요. 그동안 어느새 우리의 삶은 스마트폰을 지나 알파고의 대국을 건너 AI 스피커의 일상화에까지 닿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빠른 시간 안에 사만다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만약 그때가 온다면, 우리의 미래와 우리의 사랑이 이 영화에서 그리는 세상보단 조금 더 따뜻하면 좋겠습니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 『그녀』 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 본 블로그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글에서 다루는 작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댓글", "포스트를 자신의 블로그로 유인하는 데 이용하려는 댓글", "무분별한 맞팔로우 신청 댓글" 등은 삭제 후 IP 차단될 수 있습니다.

 

 

"좋아요", "댓글""구독"

 

은 블로거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