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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와 코끼리 _ 킬링 소프틀리, 앤드류 도미니크 감독

그냥_ 2024. 8. 2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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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비겁하고 야비한 당나귀

이기적하고 잔인한 코끼리

 

 

 

 

 

 

 

 

앤드류 도미니크 감독,

『킬링 소프틀리 :: Killing Them Softly』입니다.

 

 

 

 

 

# 1.

 

버락 오바마의 연설로 시작되는 영화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숨길 생각이 없다. 겉으로 드러나는 양상은 겁 없이 도박장을 턴 두 도둑과 그들을 쫓는 살인청부업자의 네오 누아르지만, 이면엔 부시 말기부터 오바마 초기까지의 혼란스러운 미국 사회를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로 가득하다. 수다스러운 걸쭉한 농담과 드라마틱한 액션 연출의 매력이 분명한 작품이다. 다만 주연이자 제작자이기도 한 브래드 피트가 진단하는 미국에 대한 날 선 시선은 때론 너무 노골적이고 감정적이라 영화를 시시하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 마지막 대사는 문장의 완성도와 별개로 굳이 스스로 말해야 했을까 싶은 것도 사실이다.

 

재키가 힐난하는 것처럼 영화가 이해하는 미국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가 아닌 각자도생의 사업체다. 상류층은 시스템을 기만하며 도박하길 즐기고, 하류층은 강도하고 마약 하길 일삼는다는 것이 당대 미국에 대한 염세적 진단이다. 조지 V. 히긴스의 범죄소설 <코건의 거래>에 경제위기를 엮으려 했다는 감독의 소회처럼, 돈으로 돈을 버는 도박판은 월가에 대한 은유로서 글로벌 금융위기의 문제의식을 끌고 들어온다. 도박장을 터는 것은 상류층의 돈을 하류층이 탐한 것이다. 상환능력 밖의 대출로 집을 사 중산층으로 도약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를 빗댄 것으로 이해된다. 자연스럽게 하류층을 무모한 게임에 참여시킨 속칭 '다람쥐 영감' 조니는 무분별하게 대출상품과 채권을 팔아 재끼던 투자은행이라 생각하면 무난하다.

 

 

 

 

 

 

# 2.

 

영화 속에서 도박장은 두 번 털리는 데 한 번은 마크에 의한 자작극, 두 번째는 프랭키 등에 의해서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건의 대가가 다르다는 것이다. 마크의 행각은 용서되지만 프랭키들의 행각은 용서되지 않는다.

 

부자들이 시장을 기망해 돈을 챙기는 것은 명목상의 적당한 대가(두어 번의 주먹질)로 양해 가능하다. 자작극을 벌인 마키는 강도질을 자신이 벌인 것이라 겁도 없이 자백하지만, 당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자기 돈이 아니라는 이유로, 마키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웃어넘긴다. 반면 하류층이 부자의 지갑을 탐하는 건 용서될 수 없고, 그런 상황을 허용한 마크 역시 용서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계급과 그 계급을 유지시키는 시스템이다. 돈 몇 푼쯤이야 웃어넘길 수 있지만, 시스템에 대한 도전은 허용할 수 없는 것이다.

 

도박장의 부자들이 프랭크와 러셀을 쳐다보는 장면은 다양한 배우들에 의해 공들여 연출된다. 이름 모를 강도가 산탄총을 들고 돈을 털러 왔지만 누구도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다. 돈을 빼앗길 것을 걱정하지도 않는다. 스타킹을 뒤집어쓴 일그러진 얼굴은 상류층의 눈에 비친 하류층으로, 같은 인간이 아닌 하찮은 괴물일 뿐이다. 그 눈빛에 담긴 숨겨지지 않는 차가운 냉소에 프랭키는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 위협하지만 자신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자들의 눈초리에서 달아날 방법은 없다.

 

 

 

 

 

 

# 3.

 

프랭키는 적당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빈민층 전과자로 아직 체념하지 않은 인간이다. 러셀은 더 이상 사람이길 포기한 막장인간으로 둘 사이에도 일정한 차이는 있다. 러셀은 개를 훔쳐 플로리다에 팔아 돈을 버는 데 흥미로운 것은 배우 벤 멘델슨이 러셀이라는 캐릭터를 스스로 '개'의 느낌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본성에 따라 탐욕하고 허비하는, 마약과 섹스 밖에 생각 없는 한없이 지저분한 그는 개다. 인간이 개를 파는 것이 아니라 개가 개를 파는 것이라면, 이는 곧 인신매매의 은유라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벌어들인 목돈으로 마약으로 넘어가겠다는 계획은 단순한 러셀 개인의 일탈이 아닌 하류층에서 발전하는 범죄조직의 원리를 개인에 적용한 것이다. 프랭키 등의 범죄행각이 들통난 것은 러셀의 가벼운 입 때문이다. 같이 개를 팔던 케니가 사실 딜런의 부하였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상류층에겐 상류층의 조직(도박장)이 따로 있고, 하류층에겐 하류층의 조직(마약상)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면 착각이다. 하류층의 커뮤니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상류층에 감시되고 통제된다.

 

결과적으로 러셀은 감옥에 가고 프랭키는 살해당한다. 짐짓 살해가 더 중한 것으로 보이지만 약간은 다른 해석을 제안하고 싶다. 영화에서 죽음은 은유고 감옥은 직설이라고 말이다. 러셀이 감옥에 가는 것은 온전히 그의 책임으로, 이는 그 어떤 사회적 원인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는 것인 반면, 프랭키와 마키의 죽음은 시스템으로부터의 배제를 미학적으로 은유하는 것이다.

 

 

 

 

 

 

# 4.

 

그리고 여기까지가 세팅이다. 영화는 일련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두 인물의 이야기로 축약된다. 브래드 피트의 재키 코건, 리처드 젠킨스의 운전수(실명은 등장하지 않는다)다.

 

둘은 각각 민주당과 공화당의 의인화로 이해된다. 책임지지 않는 의회주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민주당은, 리더가 아닌 여론의 핑계 뒤에 숨은 비겁한 운전수다. 빈곤층이든 부유층이든 누구에게나 다정해 보이지만 실상은 철저히 돈에 따라 움직이는 공화당은, 도박장(시장)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누구에게도 총을 당길 수 있는 비정한 살인청부업자다. 온정적이지만 방어적이고 마땅한 대책도 없이 미온적인 민주당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 뒤에서 공화당에 손을 빌린다. 영화는 어느 한 세력의 손을 드는 대신 양측 모두를 힐난하는 양비론적인 작품으로, 일련의 맥락을 잡을 수 있다면 이후의 전개는 훨씬 편안하게 이해된다.

 

재키는 자기 손을 더럽히는 몇몇의 일을 장르적으로 마친 후 술집에서 다시 운전수를 만나는 데, 끝까지 이름을 알 수 없는 비겁한 운전수는 그 와중에 보수를 깎는다.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결국 한통속이고 그들의 머릿속에는 돈뿐이다. Tv 속 오바마가 '미국은 하나'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자 재키는 토마스 제퍼슨이 만든 개소리라 힐난한다. 제목 Killing them softly는 나의 상관없는 타인에게 더없이 잔인한 미국이자, 스스로 천천히 말라죽어가고 있는 미국이다.

 

사실 영화의 인사이트는 그리 깊지 않다. 국가적 스케일의 경제위기를 사소한 개인들의 사건으로 치환한 것은 성과이나, 그 과정에서의 통찰이란 손쉬운 양비론에 불과하다. 다만, 영화의 가치는 관객의 감상, 보다 정확히는 재키에 대한 평가로 말미암아 완성된다. 어떤 사람들은 재키를 무자비하고 폭력적이고 비열하다 생각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재키를 신사적이고 실용적이며 유능하다 생각할 것이다. 그 사람들을 같은 커뮤니티라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진보, 보수를 막론하는 탐욕적 자본주의가 만든 처절한 경제위기 앞에 무기력했던 한 인간의 실소다. end.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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