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개미굴을 관찰하는 건 개미의 역사와 본성을 알기 위함이다.
로버트 알트먼 감독,
『고스포드 파크 :: Gosford Park』입니다.
# 1.
거장 로버트 올트먼은 2001년작 <고스포드 파크>를 통해 관객을 100여 년 전 영국 상류층의 세계로 초대한다. 하나같이 꼬장꼬장한 귀족들의 차량이 줄지어 들어오는 동안 카메라는 보이지 않는 손님이 되어 끔찍한 주말 파티의 현장으로 스며든다. 쏟아지는 비를 지나 웅장한 문을 넘어 마주하는 미로와 같은 복도는 그 자체로 제국주의의 한계와 불안한 미래를 앞둔 1930년대 영국의 단면이다. 저택의 내부는 과시적인 우아함으로 가득하다. 눈 둘 곳을 정하기 힘들 만큼 정교하게 꾸며진 장식, 교양과 위선을 연기하는 귀족들의 화려한 의상, 정중하면서도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하인들의 모습은 당시 영국 사회를 생생하게 재현한다.
감독은 관객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영화는 살인 사건의 미스터리보다 저택의 미로를 탐험하는 어드벤처로서의 즐거움이 더욱 중요해 보인다. 하인도 귀족도 아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자 보이지 않는 손님이 된 관객은 무수히 많은 인물들의 표정과 행동과 관계와 이해와 서사의 조각을 모아 세계를 짐작한다. 영화는 인간의 욕망과 계급 갈등, 변화하는 시대상을 탐구하는 거대한 실험실로, 도입은 이러한 복잡하고 입체적인 주제의식을 지적 호기심에 얹어 암시함으로써 관객을 긴장감 넘치는 주말 저택의 일원으로 초대한다.
# 2.
저택 위층은 귀족과 상류층 손님의 영역이고, 아래층은 이름 없는 하인들의 영역이다. 계단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분리된 세계를 상징하는 강력한 메타포다. 두 세계는 물리적으로는 붙어있지만 계급적으로는 단절되어 있다.
상류층의 세계는 과시적인 여유와 풍요로 가득하다. 우아한 식사, 사교 모임, 피아노 연주, 사냥 등의 활동을 통해 특권적인 삶이 그려진다. 매기 스미스가 연기한 콘스탄스 트렌차드 백작부인, 마이클 갬본의 윌리엄 맥코들 경 등은 각자의 방식으로 상류 사회의 규칙과 가식을 체현한다. 반면, 계단 아래의 세계는 끊임없는 노동과 엄격한 규율로 작동한다. 헬렌 미렌이 연기한 가정부 윌슨, 에일린 앳킨스의 요리사 크로프트 부인 등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삶 없이 일하는 하인들의 현실을 보여준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귀하게 여겨지지는 않지만 그들의 세계 또한 나름의 효율성과 복잡성의 사회 구조를 이룬다. 감독은 두 세계를 교차시킴으로써 계급 간의 차이와 갈등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데, 주목할만한 것은 두 세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비밀 연애나, 숨겨진 혈연관계, 공통의 비밀 따위의 미묘한 상호작용은 두 단절된 세계를 넘나드는 드라마의 씨앗이 된다.
영화는 계급의 재현을 넘어 계급의 시대적 한계까지 포괄한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음은 상류층 인물들의 태도를 통해 미묘하지만 성실하게 묘사된다. 젊은 하인들의 의식 변화와, 귀족들의 경제적 위기, 중산층의 부상 등을 자연스럽게 녹여낸 밀담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할리우드에서 온 영화 제작자 모리스 와이즈먼과 그의 배우 이보르 노벨로는 기존 질서의 균열이자 새로운 시대 변화의 상징이다. 저택 한 복판을 장악하는 피아노 사운드는 새로운 문화의 침공으로서, 트럼프로 대표되는 기성 사회의 가치관과 생활상에 도전장을 던지고, 하인들에게는 자기중심적인 주체적 삶의 욕망을 자극한다.
# 3.
일련의 복잡한 인간관계와 사회구조 묘사의 종착점은 결국 욕망과 갈등에 반응하는 보편적 인간에 대한 탐구다. 계단 위와 아래는 서로 다르지만 닮아있고, 이들 모두는 인간의 본성을 다양한 측면에서 반영한다. 권력, 욕망, 질투, 사랑 등 보편적 인간의 감정과 행동들은 계급과 국가뿐 아니라 역사와 시대마저 초월하는 것이다. 저택의 초대는 영국의 초대이자 시대의 초대이며, 모든 사회로부터의 초대이자 인간 본연으로부터의 초대다.
맥코들 경의 살인 사건은 영화의 주요 플롯이지만, 범인의 정체는 핵심이 아니다. 사건은 전통적인 미스터리 추리물의 구조를 따르지만 감독은 사건의 해결보다는 이를 둘러싼 주변인물들의 반응과 관계 변화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각 인물들의 비밀과 욕망과 기회와 갈등과 관계의 역전은 작품의 진정한 주제다. 맥코들 경의 죽음은 영화 전후의 분기점이자, 각 개인들의 삶의 분기점이며, 이전과 달라질 영국 사회의 분기점이자, 한계에 다다른 제국주의와 계급 사회의 분기점이다. 그래서 카메라 놓인 저택 복도의 교차로 역시 분기점이다. 고스포드 파크는 분기점에 대한 영화인 것이다.
마지막 장면들은 마치 무대의 커튼이 내려가는 것처럼 연출된다. 손님들은 떠나고 하인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복귀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 듯 보이지만 인물들의 내면에는 비가역적인 흔적이 남았음을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관객은 무수히 많은 인물들의 내일을, 이미 알고 있는 영국의 내일과 엮어 상상함으로써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내일을 상상한다.
# 4.
전통적인 후더닛 장르의 요소를 포함하면서도, 로버트 올트먼 특유의 플롯 구성과, 연출 스타일, 블랙 코미디, 드라마적 요소를 결합하여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이 탄생한다. 일련의 장르적 실험은 관객들에게 지적 자극과 감동을 동시에 제공하며 영화를 단순한 오락거리 이상의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유동적인 카메라워크와 복잡한 사운드 디자인은 관객들에게 저택 내부에서 길을 잃고 탐험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난해하고 어지러운 인물도를 이해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이 미로와 같은 저택의 '지도'를 그리는 것과 같고, 이는 곧 1930년대 영국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기도 하다. 관객 상당수가 전반부를 보는 동안 어지러움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작품은 특정 인물의 모험을 그린 작품이 아니라 인물 그 자체를 모험하는 영화이고, 모험이란 모름지기 아직 알고 있지 못한 어지러운 미로를 기꺼이 헤매는 것이기 때문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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