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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Comedy

현대영화 _ 킬 룸, 니콜 페이온 감독

그냥_ 2024. 7. 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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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어. 느새. 부터. 미. 술~~ 은 안 멋져.

 

 

 

 

 

 

 

 

니콜 페이온 감독,

『킬 룸 :: The Kill Room』입니다.

 

 

 

 

 

# 1.

 

현대미술이 영화에 머리채를 잡히는 건 연례행사다. 끝없이 관념적으로 뻗어나가는 현대미술 일체를 스노비즘(snobbism)으로 치부하거나, 부자들의 친목 모임 뒤에 숨겨진 재산 은닉과 탈세에 복무하는 시종이라 조롱하는 식이다. 때문에 제 아무리 이런저런 킬링포인트를 추가한다 하더라도 큰 틀에서의 작동은 죄다 거기서 거기다. 예술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이 대충 만든 작품을 미끼로 던져 놓은 후, 그 황당한 작품에 허망한 형용을 난사하는 업계를 조소하는 구조로 흘러간다. 코미디언 장동민이 잭슨 폴록의 드리핑을 흉내 낸 그림에 미학자 진중권이 진땀 흘렸던 모 예능을 영화적으로 부풀려 놓았다 생각하면 편리하다.

 

니콜 페이온 감독이 우마 서먼과 함께 만든 영화 <킬 룸>이 의외인 것은 주인공 레지(aka. 수금원)가 미술에 진지하다는 점이다. 그는 심드렁한 고든의 지시와 별개로 나름의 작업실에서 끝까지 진지하게 작품에 임한다. 거친 손길로 두텁게 적층 된 끈적한 유화물감과, 그로테스크한 형형색색 비닐봉지 조형은 작가의 삶과 고뇌가 진솔하게 투사되어 있다는 면에서 예술적이다.

 

또한 그런 레지의 작품을 보는 딜러와 리뷰어의 실력도 인정하고 있다. 영화 속 전문가들은 수금원의 작품에서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의 그것으로 추측되는 투박함 뿐 아니라, 위화감과 폭력성과 공포감 따위를 정직하게 읽으며 작가와 교감한다. 일련의 조작은 영화로 하여금 예술 그 자체를 비방한다는 모함으로부터 벗어나 '예술을 수단 삼는 사람들'만을 비판한다는 정당성을 확보케 한다.

 

 

 

 

 

 

# 2.

 

영화에는 예술과 함께 자본, 마약, 살인이라는 이질적인 세 요소가 교차하는 데, 각각은 감독이 해석하는 현대미술의 어두운 단면이다. 고든이 한눈에 꿰뚫어 본 것처럼 현대미술은 있는 사람들의 돈세탁과 탈세의 장이다. 자산가들은 작품 그 자체보다 작품에 대한 접근 능력으로 필터링된 이너서클 간 사교의 장을 소비한다. 왜 비싼지 모를 작품은 비싸다는 이유로 더 비싼 값을 받는다. 누가 만든지도 모를 작품은 저명한 리뷰어의 텍스트를 이유로 더 비싼 값을 받는다.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인 비닐봉지를 액자에 고이 담아 그 아래서 잠자리를 가지는 모습은 아주 강력한 비판이다. 또한 마약처럼 비싸고 소비적이며 감정적이고 허무한 것이기도 하다. 접촉한 사람들은 지독한 허영과 그보다 더 지독한 쾌락에 중독되고 역치는 끝을 모르고 상승한다. 사람이 모이면 모일수록 SNS의 피드는 늘어가고, 돈이 벌리면 벌릴수록 패트리스의 코로 넘어가는 마약의 양은 늘어간다. 폭력적이고 배타적이고 독점적이라는 면에서만큼은 살인과도 일정 부분 닮아 있다.

 

세 단면의 공통점은 인간성의 부재 혹은 파괴다. 제목인 <킬 룸>은 작품 속에 네 번 등장하는 데 그 크기에 따라 적층 되어 있다. 가장 작은 것은 사람을 죽이는 비닐봉지, 그다음은 러시아 부호가 들어있는 보관함, 세 번째는 패트리스의 프로젝트 갤러리, 마지막은 니콜 페이온의 영화다. 넷 모두 각자의 위계에서 인간이 없는 죽음의 방이다. 예술이 예술이기 위한 뿌리라 할 수 있는 '인간'을 상실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은 일견 통렬하다.

 

영화는 크게 예술가가 된 범죄자와 범죄자가 된 예술가의 이야기로 요약된다. 범죄자로서도 예술가로서도 인간이지 못했던 두 사람은 서로 충돌하는 과정에서 잊었던 인간을 발견한다. 어릴 적 과오로 이탈리아 마피아의 손에 떨어진 레지는 미술로 인해 억눌린 창작욕과 인간성을 발현한다. 패트리스는 레지가 스스로 발전시킨 인간성으로 말미암아 예술 본연의 의미를 되찾는다. 풍자와 스릴러와 코미디가 혼합된 영화는 상호성장의 버디무비이기도 한 것이다.

 

 

 

 

 

 

# 3.

 

다만 여기까지는 구조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영화가 주창하는 인간 회복은 끝내 두루뭉술하다. 내러티브는 설득력이 없고 종착지는 존재하지조차 않는다. 풍자는 스노비즘에 대한 세간의 태만하고 무신경한 비난을 극복하지 못한다. 스노비즘에 빠진 사람들의 지적 허영을 논평하는 데 실패한 영화에는 역설적이게도 현대미술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지적 열등감만이 묻어난다. 비판을 체계화하지 못한 채 지루한 나열에 그치기에 전반부는 놀림당하는 우마 서먼의 1인극으로 전락한다. 하고 싶은 욕을 전반부에 다 한 감독은 후반부를 앙상한 캐이퍼 무비에 짬처리한다.

 

흥미진진한척하기 위해 사무엘 L. 잭슨을 불러다 탁월한 계획인양 호들갑을 떨지만, 무시무시한 이탈리아 마피아의 정적을 앉은자리 계획으로 뚝딱 죽이면서, 심지어 영상으로 사람들 앞에 공개까지 하면서 아무 문제없었답니다! 를 이해해 달라는 건 황당하다. 영화 내내 기망하고 마약 하며 범죄에 물들어가는 패트리스는 아무런 반성도 책임도 없다. 자기 사정이야 무엇이든 연쇄살인마임에 분명한 레지 역시 걸맞은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 우마 서먼의 바보 연기와 사무엘 잭슨의 서스펜스를 접붙이는 것만으로도 킬링 타임용 팝콘 무비가 되는 듯한 착시를 제공하는 <킬 룸>은 되려 그 자체로 스노비즘으로 점철된 현대영화스럽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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