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스케이트 보드를 왜 타는 거냐는 물음에 답하며
조나 힐 감독,
『미드 90 :: mid90s』입니다.
# 1.
스케이트보딩을 다룬 영화들은 보드의 미학을 작품 안에 끌고 들어와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존재하는 듯하다. 래리 클락의 <키즈(1995)>, 구스 반 산트의 <파라노이드 파크(2007)>, 크리스털 모젤의 <스케이트 키친(2018)>과 같은 영화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영화에서 주로 활용되는 보드는 상당히 모순적인 활동이다. 무모하면서 무기력하다. 자유로우면서 구속적이다. 개인적이면서 계급적이고, 낭비적이면서 가난하다. 투쟁적이면서 도피적이고, 공격적이면서 비굴하며, 강인한 척하지만 나약하고, 물리적이지만 정신적이다. 화려한 트릭이 무색하게 내내 같은 공간을 맴돈다. 앞으로 나가는 듯 보이지만 정확히는 멈춤에 저항하는 것에 가깝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거친 바닥에 나자빠져 깨지더라도 아픈 척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처와 흉터는 솔직하더라도 말이다.
미드 90의 보더들에게 스케이트보드는 목적이라기보다는 '증상'에 가깝다. 이들은 사회와 가정으로부터 배제되고 고립되어 '현실도피적 대안'이자 '자기학대적 낭만'으로서 보드로 흘러들어 고인다. 조나 힐은 연출 데뷔작을 통해 90년대 중반 LA의 불행한 가정에서 소외되어 거리로 나온 10대 보더들의 현실을 16mm 필름과 Lo-Fi 음악에 얹어 가속되는 일탈의 속도감으로 그려낸다. 영화는 풍부한 텍스쳐와 배우진의 열연에 힘입어 자전적 성격의 호소력 짙은 드라마룰 구현하면서도, 일련의 스타일로 말미암아 적절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듯한 중립성과 객관성을 함께 도모한다.
# 2.
제목 그대로 90년대 중반 LA를 관통하는 작품은, 당시의 스타일을 미술적으로 구현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시작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별다른 도움 없이 어떤 시점의 이야기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다. VHS의 질감을 재현하는 필름무비 특유의 물 빠진 색감, 낡은 캠코더 감성을 자극하는 핸드헬드 촬영, 왜곡과 디테일 따위 아랑곳 않는 솔직한 자연광의 활용, 특정한 시대를 포획하려는 듯한 아카데미 비율(1.33:1)의 16mm 필름은 작품에 높은 현장감을 부여한다.
주인공 스티비의 형인 이안의 방은 일견 반가움마저 불러일으킨다. 이제는 레트로가 되어버린 디테일들, 이를테면 선반 가득 쌓인 CD(당시에는 LP에 비해 감성이 없다는 비아냥을 들었던)와 잡지들, 벽엔 우-탱 클랜(Wu-Tang Clan)이나 헐크 호건 따위의 포스터가 걸려있고, 옷장에는 여지없이 에어 조던이 모셔져 있다. 이들은 모든 것들이 데이터베이스화되기 직전 마지막 아날로그 시대의 고고학 같은 느낌마저 든다. 쏟아지듯 발굴되는 시대의 유물들은 당대의 서브컬처에 대한 노스탤지어로 승화된다. 잠시의 공백도 허락하지 않는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의 음악적 공헌 역시 치하되어야 한다. 물론 일부의 이견도 있다. 특히 가디언(the guardian)은 이안이 뒤집어쓴 빌 클린턴의 마스크가 못마땅한 듯 하지만, 그 정도는 감독 이름을 생각할 때 소소한 농담으로 이해되어도 좋을 것이다.
# 3.
주인공 스티비는 형 이안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쫓기고 맞고 빼앗기지만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스티비는 이안을 악마로 여기지만 동시에 동경하고 있기도 하다. 억지로 들어보는 덤벨과 높은 옷걸이를 올려다보는 시선, 형의 방에 몰래 들어가 포스터와 힙합 CD를 살펴보는 장면 따위인데, 이는 스티비의 성장을 견인해 줄 마땅한 동경의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싱글맘 데브니는 집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많은 것을 말하는 엄마에게는 셧업이라는 막말로 반발한다. 주는 것 없이 괴롭히는 형제에게는 초라한 모습에 대한 조소로 반발한다. 가정의 부재에 떠밀린 스티비는 탈선과 불법의 경계에 위치한 서브컬처의 세계로 흘러들어 간다. 한심한 음담패설을 진지하게 나누고, 진지한 사람들을 한심하다 비웃는 아이러니는 시대의 모순이다.
레이, 퍽쉿, 포스 그레이드, 루벤. 그룹은 스티비보다 두 뼘은 더 큰, 형 이안과 비슷한 또래들이다. 레이는 별명이 없는 그룹의 실질적 리더다. 나름대로의 원칙과 철학이 있고 프로 스케이터를 꿈꾸고 있다. 퍽쉿은 매번 욕으로 시작하는 말버릇이 별명이 되었다. 레이와 마찬가지로 꿈꾸는 소년이었지만 끔찍한 가정환경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 술과 안정제에 의존한다. 루벤은 스티비와 그나마 가까운 나이다. 스티비에게 억지스러운 규칙을 만드는 등 우월한 지위를 선점하려 하지만 계급 관계가 역전되자 시기하기도 한다. 포스 그레이드는 4학년 짜리처럼 바보 같아 붙여진 별명이다. 양말하나 살 돈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가난하지만 친구들을 캠코더에 담으며 영화감독을 꿈꾼다.
스티비는 용기(보다는 객기에 가까운)로 말미암아 스케이터 그룹에 받아들여지고, 그룹은 곧 스티비의 대안적 가족이 된다. 땡볕(Sunburn)이라는 별명을 얻은 소년은 밤새도록 보드를 연습하는데, 그 공간은 드라이브웨이다. 울타리 안이지만 집 안은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서 혼자 방치된 채 무언가에 몰두하는 인물인 셈이다.
# 4.
'스케이트 보드를 왜 타는 거냐'는 질문에 대해 영화는 '보드를 탈 수밖에 없는 현실'과 '보드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력'을 입체적으로 설명한다. 전자는 가족의 붕괴에 좌절하는 무력한 소년들의 남성성에 대한 자기 파괴적 과시다. 전쟁에 참여한 참전용사나 번듯한 직업의 경비원에게 시비를 건다거나, 나이에 맞지 않게 술과 담배를 배운다거나, 법원 앞에서의 도발적인 스케이팅 따위다. 자신의 가족을 폄훼하는 가학적인 대화, 전리품으로 여겨지는 섹스,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음주 운전하는 객기 모두 왜곡된 투정이다. 남성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되려 남자가 되지 못한 자신을 증명하는 아이러니는 일견 측은하기도 하다. 일련의 자학적 상황은 비디오 게임 라인으로 스스로 목을 조르고, 헤어빗으로 허벅지에 상처를 내는 충동으로 비장하게, 비참하게 정의된다.
반면, 스케이터들의 대안 가족 안에서 교감하며 성장하기도 한다. 커뮤니티 안에서 예의와 관계와 유대와 신뢰와 규칙을 배운다거나, 삶이란 자신의 기술과 용기를 증명하기 위한 투쟁임을 배우는 식이다. 그들의 상호성장 과정에서의 우정은 장면 마다의 미술적 완성도로 누적되다 밤새 지킨 병원 로비의 장면으로 완성된다. 감독은 도로 한가운데 위태롭게 가로지르는 스케이트 장면을 두어 차례 묘사하는데, 무리의 뒤를 쫓아가기 바쁘던 첫 번째 스케이팅은 전자의 대답, 레이와 교감하는 두 번째 스케이팅은 후자의 대답을 대신하고 있다.
영화는 포스 그레이드가 찍은 VHS 테이프로 마무리된다. 초광각 렌즈의 레코더 테이프를 거쳐 영화 전체가 회고됨으로써 일련의 과정이 실제 벌어진 일을 촬영한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동시에 관객이 보고 있는 영화 또한 불완전하며 그 이면에는 90년대 중반 LA의 스케이트보더들에게 훨씬 더 깊은 사연과 상처와 성장이 있음을 감각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end.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 본 블로그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글에서 다루는 작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댓글", "포스트를 자신의 블로그로 유인하는 데 이용하려는 댓글", "무분별한 맞팔로우 신청 댓글" 등은 삭제 후 IP 차단될 수 있습니다.
"좋아요", "댓글", "구독"
은 블로거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