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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Comedy

HELLO, HOW ARE YOU, WHO ARE YOU _ 김씨표류기, 이해준 감독

그냥_ 2018. 12. 17.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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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천하장사 마돈나』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키덜트 한진우 박사를 데려다 살을 뒤룩뒤룩 찌우게 만들어 성전환 수술을 꿈꾸는 트랜스젠더 씨름 선수로 만든 미친 영화죠. 짝사랑하는 선생님은 초난강, 씨름부 감독은 백윤식, 쿵짝을 맞추는 동료는 개그맨 문세윤입니다. 막장 영화 아니냐구요? 전혀요. 주연 류덕환은 천하장사 마돈나로 그해 대종상과 청룡영화상을 비롯한 7개의 영화제에서 신인상을 휩쓸게 되는걸요.

 

이 골 때리는 영화를 만든 사람이 2009년 차기작이라고 가져온 영화가 바로 이 작품입니다. 천만명이 사는 서울 한복판에 표류된 남자를 다룬 케스트 어웨이.

 

 

 

 

 

 

 

 

'이해준' 감독,

『김씨표류기 :: Castaway on the Moon』 입니다.

 

 

 

 

 

# 1.

 

남자 김씨는 신용불량자입니다.

 

부모의 무모한 기대, 취업시장의 가혹함, 버거운 경제적 현실과, 그로 인해 헤어진 연인, 마지막까지 빨아먹으려는 사채까지. 그 모든 것에 떠밀린 남자는 결국 한강에 몸을 던지지만 눈을 뜨니 '밤섬'이네요. 목숨을 끊기 위해 다리를 뛰어내린 그는 스스로 모래강변에 'HELP'라는 글씨를 씁니다. 강에 뛰어내리던 몸부림이 도와달라 소리치는 울부짖음이었다는 듯 말이죠.

 

수영으로 건너보려 해도, 그냥 죽어버리려 해도, 뭐 하나 마음처럼 되지 않습니다. 자신을 옥죄던 넥타이에 마지막으로 목을 매려던 순간, 큰일이 급했던 남자는 느닷없이 똥을 싸더니 눈 앞의 사루비아를 먹으며 오열합니다. 사루비아의 꽃말은 불타는 마음, 열정. 잊고 살았던 삶에 대한 열망을 입에 문 김씨는 말합니다. "달콤합니다. 눈물이 날 만큼 달콤합니다."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 말하는 그는 밤섬에서의 삶을 새로이 만들어 갑니다. 모래에 써놓은 글은 'HELP'에서 'HELLO'로 바뀌게 되죠. 목숨을 끊을 만큼 위태로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고작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였던 걸까요. 살아서 밤섬을 탈출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김씨는 이제 밤섬에서의 삶을 위해 움직입니다. 죽지 못해 사는 사람과, 삶 그 자체를 위해 사는 사람의 대조가 정재영의 뛰어난 연기로 표현됩니다. 버섯을 따고 물고기를 잡아먹고 새까지 잡아먹으며 활짝 웃는 김씨의 말은 웃기면서도 묘하게 서글픕니다.

 

"어류보다 조류가 맛있습니다. 진화라는 건 어쩌면 맛있어지는 과정이 아닐까요."

 

 

 

 

 

 

# 2.

 

남의 일상을 훔쳐 가공된 삶을 만드는 그녀. 여자 김씨는 은둔형 외톨이입니다.

 

발 디딜 틈 없이 쌓인 쓰레기, 안에서 잠긴 자물쇠, 문 앞의 엄마에게 조차 말 대신 건네는 문자.

 

"삼 년째. 방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생활이지만 이 안에서도 엄연한 규칙은 존재합니다. 기상은 아빠가 출근하고 난 여덟 시. 간단한 준비를 마치고 집 밖을 나섭니다. 아침은 백칠십일 칼로리. 아홉 시까지 만보계의 숫자 삼천을 채웁니다. 아홉 시에는 출근. 청소를 하고. 화장실은 엄마가 출근하고 난 열두 시까지 참습...

 

점심은 오백이십오 칼로리. 소화가 될 때까지 만보계 육천. 잠시 바람을 쐰 후. 다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고 자기 계발에 매진합니다. 모든 일정을 끝내고 퇴근한 후엔. 취미 생활을 합니다. 달 사진 찍기. 달을 찍는 이유는 달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없으면 외롭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자기 전 만보계 남은 숫자를 채웁니다. 건강을 위한 건 아닙니다. 만 번을 채우고 나면 하루를 열심히 산 것 같은 착각이 들기 때문이죠. 너무도 건전한 현실도피입니다. 취침은 아빠가 퇴근하는 아홉 시.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취침이 아니라 최면입니다. 오늘 하루가 클리어하게 지워지는 최면. 내일 하루가 새롭게 재생되는 최면. 하루하루에 충실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레드 썬."

 

여자 김씨를 단번에 설명하는 대사이자,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입니다. 제일 중요한 대사도 아니고 특별히 맛있는 대사도 아닌데, 마냥 슬프기 때문이죠. 연민은 아닙니다. 그냥... 슬퍼요. 떨어지는 꽃잎을, 메말라가는 웅덩이를, 무심히 밟히는 잡초를, 어미 잃은 아기 고양이를 글로 그리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요.

 

 

 

 

 

 

# 3.

 

일 년에 두 번 있는 민방위날. 사람이 사라져 달과 같아진 지구를 보며 여자의 몸이 자유로이 떠오릅니다. 그러다 변태 같은 '외계 생명체'를 발견하곤 뚝 떨어지죠. 탁월한 시각적 전달입니다. 남자의 몸부림을 관찰하던 여자. 집으로 삼은 오리배를 버겁게 끌고 가던 남자를 보며 여자는 비웃는 대신 카메라 앵글 넘어 뒤를 밀어줍니다. 거창한 대안보다 사소한 관심과 응원이 때론 서로에게 더 필요할지도 모르죠.

 

짜파게티 분말 반봉지를 발견한 남자는 야호! 소리를 지르는 대신 다소곳하게 털썩 주저앉습니다. 적당히 코믹하면서도 노골적이지 않고, 작위적이지 않으면서도 극적이라 좋네요. 언제 자살을 기도한 사람이었냐는 듯 땀까지 뻘뻘 흘리며 농사 짓는 남자의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질문하게 합니다. 무기력해 보이는 사람들은 진짜 욕망이 없는 걸까. 열정이 없는 걸까. 어쩌면 그 욕망과 열정을 활용할 길이 없었던 건 아닐까.

 

짭짤한 땀을 흘린 남자는 진화의 끝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졸라 맛있는 사람. 졸라 맛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죠. '진화한' 김씨는 전까지 입고 있던 양복을 윌슨을 오마주한 허수아비에게 줘 버립니다. 양복을 입은 사람은 허수아비입니다. 맨몸에 팬티 한 장 달랑 걸친 남자는 짜파게티 봉지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희망은 멀리 있는 것, 구하거나 주고받는 것이 아닌 '발견'하는 것입니다.

 

 

 

 

 

 

# 4.

 

남자를 찾아가기로 한 여자. E.T의 손가락이 연상되는 오마주와 우주복을 패러디하는 오토바이 헬멧으로 무장하고 그래비티의 조지 클루니마냥 두려운 우주유영을 나섭니다. 어렵게 어렵게 전달한 메시지가 전달되는 데는 3개월 하고도 17일이 더 걸렸죠. 메시지는 한 단어, 'HELLO'. '안녕하세요' 란 인사는 그만큼 멀리 있고, 그만한 시간을 감내할 만큼 감동적입니다. 남자는 살려달라는 말도 구해달라는 말도 너는 누구냐는 말도 아닌, 'HOW ARE YOU'. 여자의 안부를 묻습니다.

 

짜파게티를 먹기 위해 면을 뽑을 농사 지내는 걸 본 여자는 짜장면을 보내지만 거절당합니다. 짜장면을 돌려보낸 남자는 배달부의 입을 빌려 이렇게 전하죠. "자기한테 짜장면은 희망이래요." 짜장면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먹고 싶은 건 삶을 녹여 만든 희망이니까요. 여자는 남자가 보내온 거대한 희망을 맛보기로 합니다. 불어 터진 짜장면을 한입 베어 문 여자는 3년 만에 처음으로 엄마에게 목소리로 말합니다. 옥수수를 키워보고 싶다구요. 여자는 그렇게 자신의 희망을 발견합니다. 어느샌가부터 달 사진 찍는 걸 잊고 낮에도 헬멧을 쓰지 않고 창밖을 내다봅니다. 희망이 무르익으며 남자 김씨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보이는 짜장면을 먹고, 여자 김씨는 수면실이란 이름의 최면실을 스스로 걸어 나옵니다.

 

 

 

 

 

 

# 5.

 

하지만 희망은 충분히 강인하지 못합니다.

 

여자는 미니홈피가 다른 사람들에게 훔쳐와 만든 것이라는 게 알려지자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기분을 느낍니다. 남자의 해피라이프도 비바람에 잔인하게 쓸려나갑니다. 떠내려가는 오리배. 미니홈피의 삶과 마찬가지로 밤섬에서의 남자의 삶도 사실 진짜 자신의 것은 아닙니다. 곧 들이닥친 공무원의 등살에 그는 그의 낙원에서 쫓겨납니다.

 

억지로 허수아비의 양복이 입혀진 원시인. 그는 63 빌딩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릅니다. 영화 초반의 '63 빌딩이었으면 표류되진 않았을 텐데'라 말하던 떡밥이 회수되는 순간입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절망에 다다른 그는 다시 잘못된 선택을 하려 합니다.

 

그 순간 여자가 나타나 그의 손을 잡으며 남자를 구원합니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이러지 말아요, 잠시 커피라도 할까요. 가 아닌 그녀가 건네는 말은 'WHO ARE YOU?'. 당신은 누구냐는 인사뿐입니다. 이 영화는 결국, 'HELP'로 시작해 'HELLO'와 'HOW ARE YOU'를 지나 'WHO ARE YOU'에 도달하는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 6.

 

영화는 50억이나 때려 박은 보람이 있는 빼어난 영상미를 보여줍니다. 스캐일이 크지도 않고, 빡빡한 로케이션이 필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출연자가 많지도 않은 이 영화가 왜 때문에 그렇게 돈이 많이 들었지 싶지만, 그 의문은 30분 안에 해결됩니다. 구도와 화각, 색감과 디테일 하나하나에 섬세하게 놓치지 않고 연출을 꾸역꾸역 욱여넣느라 그랬구나 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서사는 독특한 독백의 내레이션을 통해 전개됩니다. 일기나 수기를 대독 하는 느낌이죠. 덕분에 묘사가 풍부하면서 동시에 소설처럼 상상력을 자극하고, 진심이 담겨있지만 즉흥적인 것이 아닌 정갈하게 정돈된 느낌을 물씬 줍니다.

 

정재영과 정려원의 존재감은 대단합니다. 저렇게 이쁘고 늘씬한 여자가 흉터 좀 있다고 히키코모리가 된다는 게 살짝 이해가 안 가지만, 그걸 제외하면 정려원의 연기는 어디 하나 아쉬울 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주연은 정재영이죠. 선역과 악역의 성격적 스팩트럼, 지식인과 범죄자와 서민을 넘나드는 배역의 스팩트럼, 스릴러와 드라마와 코믹을 넘나드는 장르적 스팩트럼까지 모두 갖춘 배우입니다. 정재영의 연기는 다른 싼마이 배우들의 콩트식 희극연기가 얼마나 싸구려인지를 증명합니다. 영화에서의 진짜 코미디 연기는 이런 자연스러움도 살아있어야 돼! 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 7.

 

이동진 평론가는 이 영화에 '잘 만든 단편 하나와 평범한 단편 하나를 연이어 보고 난 느낌'이라고 평하셨더군요. 확실치는 않지만 모르긴 몰라도 '잘 만든 단편'은 정재영이 분한 남자 김씨의 이야기, '평범한 단편'은 정려원이 분한 여자 김씨의 이야기를 말하시는 거라 봐야겠죠. 저 역시 기본적으로 동의합니다. 두 개의 독립된 이야기가 맞닿는 방식이 화학적 결합보단 물리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건 분명하니까요. 남자 김씨의 이야기는 여자 김씨의 이야기에 비해 훨씬 파격적이고 과감하며, 감각적이고 풍부합니다. 아무래도 미니홈피에 빠진 히키코모리는 밤섬에 갇힌 원시인에 비하면 약할 수밖에 없죠.

 

다만 그게 단점이라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잘 만든 특별함도 평범함과 다르지 않다'라는 걸 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동원된 평범함 같았거든요. 이 평론가의 평을 지금 새로이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가 개봉한 2009년으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혹시 지금도 남자 김씨의 이야기가 여자 김씨의 이야기보다 특별한 단편인 걸까. 혹시 지금의 시점에서는 여자 김씨의 삶이 더 잘 만든 단편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라고 말이죠.

 

우연히도 이 영화의 두 주연은 모두 정씨입니다. 그래서 정씨표류기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는데요. 결국엔 감독의 뜻대로 김씨표류기로 정해졌다 하죠.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씨. 너무도 많은 정확히는 너무도 흔한 우리 사회의 김씨들. 그들의 표류기란 거겠죠. 10여 년이 지난 지금 더욱 많아지고 더욱 힘들어진 우리 주변의 무수히 많은 성을 가진 김씨들에게 응원의 마음을 담아 이 영화를 권합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당신은 누구신가요? '이해준' 감독, 『김씨표류기』 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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